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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초기 임신부의 아찔한 출근길 전쟁

이유주 기자 입력 2017. 05. 24. 19:14 수정 2017. 05. 2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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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것보다 일하러 가는 과정이 힘들어요"

【베이비뉴스 이유주 기자】

 

아직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18일 오전 7시. 둘째를 임신한 워킹맘 신수민(30·임신 6주·가명) 씨는 여느 아침처럼 부랴부랴 현관을 나섰다. 옷매무새를 마저 가다듬지도,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한 채, 아파트 단지를 급히 빠져나가는 신 씨의 표정은 제법 상기돼 있었다. 

 

출근길을 동행하는 기자에게 애써 엷은 웃음을 띄워보지만 그것도 잠시. 오늘도 집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풍동(백마역)에서 직장인 서울 서초구 잠원동(신사역)까지 1시간 40분이나 걸리는 36km 여정을 시작하려니 웃음기가 금방 가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아, 또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언제 도착하죠? 얼른 회사에 도착해서 앉고 싶어요."

 

일반인도 부담스러운 장거리 통근이 초기 임신부인 신 씨에게는 오죽할까. 기자는 이날 초기 임신부가 겪는 출·퇴근길 고충을 들여다보기 위해 신 씨의 출근길에 함께 올랐다. 신 씨도 임신부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취재에 응했다. 

 

◇ "지하철 혼잡 피하려면 버스도 빨리 타야"

 

먼저 신 씨는 집에서 근처 버스 정류장까지 약간 숨이 찰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출근하는 지하철 승객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덜 혼잡한 지하철에 오르려면 버스도 빨리 타야 한다. 

 

18일 오전 초기 임신부 신수민(30·임신 6주·가명) 씨가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풍동 집 근처에서 백마역으로 가는 마을버스에 오르고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신 씨는 경의중앙선 '백마역'으로 가는 마을버스에 순조롭게 몸을 태우고 버스 맨 뒤 한자리를 차지했다. 유동인구가 적은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다행히 자리가 빌 때가 많다. 출근길 중 신 씨의 굳은 표정이 잠시나마 풀어지는 순간이다.

 

"그나마 자리에 앉아 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에요."

 

하지만 앉아서 숨을 고르는 여유도 아주 잠깐일 뿐. 눈을 붙일 수 있을까 싶더니 신 씨는 이내 곧 몸을 일으켜 내릴 준비를 했다.

 

신 씨는 "이제 시작"이라며 "지하철을 타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신수민 씨가 마을버스에서 하차해 백마역으로 들어가고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신 씨는 지체없이 백마역으로 향했다. 되도록이면 7시 25분 행 지하철에 올라야 한다. 경의중앙선, 특히 이른 아침 시간대는 배차간격이 길어 지하철을 한 번 놓치면 다음 차를 오래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신 씨가 종종걸음을 하는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최대한 빨리 지하철 문 앞에 줄을 서 혹시나 있을 차량 내 빈 좌석을 사수하기 위해서다. 신 씨처럼 초기 임신부는 장시간 서 있으면 다리와 하복부에 무리가 가 유산의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신 씨의 발걸음이 다급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 자리 양보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지하철이 도착하자 신 씨는 재빨리 탑승했다. 역시나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에서 빈자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 신 씨는 그나마 사람들로 덜 북적이는 노약자석 앞에 섰다. 노약자석은 노인을 포함한 장애인,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등 교통약자를 위해 만들어진 자리다. 신 씨처럼 초기 임신부도 당연히 노약자석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날은 신 씨보다 어려 보이는 한 여성과 중년의 몇몇 남성들이 노약자석을 차지 하고 있었다. 신 씨는 '임신부 배지'를 가방에 달았지만 이를 알아보고 자리를 내어주는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스마트폰을 보거나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을 뿐. 

 

신수민 씨가 임신부 배지를 달고 지하철 노약자석 앞에 서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임신부 배지는 임신부가 대중교통 이용 시 배려 받을 수 있도록 정부가 가방고리 형태로 제작해 배포하고 있다. 배지에는 아직 배가 나오지 않은 초기 임신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임신부 중에서도 특히 육안으로 임신 여부를 알기 어려운 초기 임신부를 보호하려는 의미가 담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씨는 평소 이 배지를 잘 달고 다니지 않는다. 신 씨는 "배지를 달면 승객들에게 괜히 부담감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배지를 단다고 해서 자리를 양보해주는 경우도 없고, 배지를 달고 계속 서 있는 것도 민망하다"고 털어놨다. 임신부를 배려하고자 고안된 배지의 취지와 효과가 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두세 정거장 지났을까. 노약자석에서 한 남성이 일어나 내렸다. 하지만 신 씨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 빈 자리에 선뜻 앉지 못했다. 

 

"다음 정거장에서 어차피 노인분들이 많이 타서요. 배가 부른 티도 안 나고 눈치가 많이 보여요."

 

배가 부른 만삭의 임신부도 아직 '노인석'으로 인식되는 '노약자석'을 이용하면 어색하게 바라 보는 승객들의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이러한 마당에 배가 부르지 않아 일반인과 구분이 되지 않은 초기 임신부는 더더욱 노약자석에 앉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결국 신 씨 앞 빈 노약자석은 자신의 주인인 신 씨를 앉히지 못한 채 서울을 향해 달렸다. 

 

신수민 씨가 임신부 배지를 달고 서 있지만 자리를 양보해주는 시민은 없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 임신부배려석은 엉뚱한 주인이 차지

 

하품이 나오고 눈이 반쯤 감기자 신 씨는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고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졸음을 쫓으려고 애썼다. 초기 임신부는 가벼운 감기에 걸린 듯 몸이 무겁고 나른하며 피로감, 졸음이 자연스레 많아진다. 신 씨도 눈이 감기는 횟수가 늘어나고 초점이 흐려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량 내 마련된 임산부배려석 앞으로 몸을 옮겨봤다.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임산부배려석의 엉뚱한 주인 40대 한 남성은 신 씨를 힐끗 보더니 스마트폰 화면의 뉴스에 집중했다. 그렇게 신 씨는 30분을 넘게 서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출근길의 반도 안 왔지만 신 씨의 이마와 미간은 이미 주름이 잔뜩 졌다.

 

"지금은 입덧을 안 하지만 속이 많이 안 좋아요. 벌써부터 졸음이 밀려오고 신경도 예민해지네요."

 

지하철 내 임산부배려석 앞에서 신수민 씨가 손잡이를 잡고 눈을 감고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유동인구가 많은 공덕역에 도착하자 임산부배려석 근처 빈자리가 하나 생겼다. 신 씨는 재빨리 착석해 눈을 붙였다. 눈을 감자마자 신 씨는 꾸벅꾸벅 새우잠에 빠져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신 씨는 "오늘은 정말 운 좋게 앉은 것"이라며 "평소에는 경의중앙선 타는 50분 내내 서서 간다"고 씁쓸해했다.  
 

겨우 15분 조금 넘게 눈을 붙였을까. 선잠에서 깬 신 씨는 3호선을 갈아타기 위해 옥수역에서 내렸다. 긴 환승구간을 3~4분 정도 걸었더니 신 씨를 반긴 건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직접 오르고 또 한 번의 긴 계단을 올라 겨우 3호선 승강장에 도달했다. 두 번째 지하철에 겨우 올라 타 깊은 숨을 내뱉는 신 씨. 인중과 콧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3호선 승강장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신수민 씨.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이제 두 정거장만 가면 돼요. 지금은 초기라 운동 삼아 걷긴 하지만 앞으로 배가 불러오면 어떡하죠? 일찍 휴가를 써야 하나 싶어요."

 

옥수역에서 갈아 탄 지하철에서도 신 씨는 한 번 앉아보지 못한 채 신사역에서 하차했다. 이어 5번 출구로 나와 또다시 지체 없이 걸었다. 평평하지 못한 인도와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 울퉁불퉁한 흙길, 지하차도를 10여 분 걸은 뒤에서야 드디어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임신부 배려석, 비워두는 문화 필요"

 

신 씨가 출근 길 앉았던 시간은 마을버스에서 5분, 경의중앙선 지하철에서 15분 정도로 총 20분 남짓. 나머지 1시간 20분은 서 있거나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아침에 봤던 뽀송뽀송한 신 씨의 피부가 어느새 축축해지고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이유가 이해가 됐다.

 

신 씨는 "나라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는 아기 키우는 것이 턱없이 부족하다. 또 앞으로 들어갈 돈을 생각하면 일은 계속해야 된다"며 "일하는 것보다 일하러 가는 그 과정이 가장 힘들다"고 답답해했다. 

 

"임산부배려석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임산부 오면 비켜주면 되지'가 아니라 '임산부가 탈 수도 있으니 비워둬야지'라는 인식으로요. 그래야 특히 저 같은 초기 임신부들도 눈치 보지 않고 언제든지 좌석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출산 시대에 임산부들을 배려해주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심각한 저출산 시대가 올 거예요."

 

회사 입구로 들어가는 신 씨의 어깨가 유달리 작고 무거워 보였다. 신 씨처럼 매일 고단한 출·퇴근길 전쟁을 치르는 초기 임신부가 우리 사회에 또 얼마나 많을까.

이삼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고령화대책기획단장은 "초기 임신부는 특히 유산의 위험이 있는 만큼, 교통약자로 배려 받아야 한다. 이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아 자리를 양보 받기 힘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승객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며 "노약자석을 이용해서 생기는 세대 간 갈등 해소를 위해서도 임신부 배려석을 비워두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일부에서는 반발이 있겠지만 평소 장애인 주차장을 비워두는 논리를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1시간 40분을 걸려 회사에 도착한 신수민 씨.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초기 임신부 배려 캠페인] 베이비뉴스는 "배가 나오지 않아서 더 배려가 필요해요" 초기 임신부 배려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임신 초기는 가장 배려가 필요한 시기이지만,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직 부족한 실정입니다. 해피빈X포스트 공감펀딩(https://goo.gl/tPzB7h)을 계기로 초기 임신부 배려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이번 캠페인은 한국솔가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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