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고래가 죽으며 남긴 경고문.."아이들이 사라진다"

입력 2017. 5. 29. 08:06 수정 2017. 5. 2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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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마지막 남은 범고래 무리
암컷 '룰루'의 사체 부검하니
PCB 농도 100배 넘게 나와
새끼 못 낳은 이유 이 때문이었나

참돌고래 오염물질 농도 높은
한반도 바다도 이미 위험 수준
"생식·면역체계에 영향 가능성"
'고래의 경고' 잊지 말아야 한다

[한겨레]

2016년 영국 스코틀랜드 해안가에서 숨진 채 발견된 범고래 ‘룰루’는 폴리염화비페닐(PCB)의 농도가 기준치보다 100배 높게 나오면서 ‘지구에서 가장 오염된 생명체’로 불리고 있다. 스코틀랜드해양동물좌초대응계획(SMASS) 제공

2016년 1월 얼룩무늬 범고래 한 마리가 스코틀랜드 타이리섬 해변가에 쓸려왔다. 그물에 걸려 죽은 것처럼 보였다. 이름은 ‘룰루’(Lulu). 영국의 마지막 남은 정주형 범고래 9마리 무리 중 하나. 이들은 20년 넘게 새끼를 출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룰루의 죽음은 영국인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그런데 이달 초 발표된 룰루의 사체 부검 결과는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 체내에 농축된 폴리염화비페닐(PCB) 농도가 기준치의 100배가 넘는 950㎎/㎏으로 나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해양동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농도는 9㎎/㎏이다) 룰루의 죽음은 기분 나쁜 상상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마지막 범고래들이 후대를 생산하지 못한 이유는 폴리염화비페닐 때문은 아닐까? 과거 영국 바다에 많았던 범고래들이 사라진 이유도? 그렇다면 피시 앤 칩스와 홍합스튜를 즐겨 먹는 영국인들은 안전한가?

새끼를 못 낳는 이유

폴리염화비페닐은 1929년 미국 몬샌토가 생산을 시작한 대표적 ‘잔류성 유기오염물질’(POPs)이다. 변압기·콘덴서의 절연유, 플라스틱 가소제 등으로 널리 쓰이다가 생식·면역 체계에 이상을 일으키는 게 발견돼 1970년대부터 금지되기 시작했다. 범고래 룰루가 던지고 간 질문을 풀기 위해 <한겨레>는 26일 세계적인 해양포유류학자인 마크 시먼즈 휴메인 소사이어티 수석과학자와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영국 바다에서 범고래가 사라진 것도 폴리염화비페닐 때문일까?

“과거 영국과 유럽의 범고래 자료가 충분치 않아 정확히 말하긴 어렵다. 과거 노르웨이나 덴마크의 고래사냥으로 개체수가 많이 줄었을 것이다. (사냥은 중단됐지만) 거기에 폴리염화비페닐 등 해양 오염물질이 개체수 회복을 방해했을 것으로 본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선 폴리염화비페닐이 범고래 개체수 감소의 주요 원인이 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룰루의 무리에서 새끼가 태어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인가?

“그렇다. 폴리염화비페닐은 생식 능력에 극심한 악영향을 미친다. 특히 범고래처럼 바다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있는 동물들 몸에는 고농도로 축적된다.(범고래는 물고기뿐만 아니라 바다사자, 물범, 다른 돌고래도 잡아먹는다.) 돌고래도 비슷한 처지에 있다. 과거 영국에서 바다와 강이 만나는 기수역에는 모두 돌고래가 살았지만, 지금은 서식지가 두세 곳으로 줄었다.”

폴리염화비페닐은 변압기나 플라스틱 가소제 등에 많이 쓰였다. 미국 정부의 PCB 함유 물질 경고문. 위키미디어코먼즈 제공
동물보호단체 ‘휴메인 소사이어티’의 수석과학자 마크 시먼즈. 해양동물 보전의 공로로 2013년 대영제국 훈장(OBE)을 받았다. 마크 시먼즈 제공

-그린피스 등 환경운동의 성과로 폴리염화비페닐은 1970년대 들어 금지되기 시작했다. 사용이 중단됐으니,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나?

“두 가지 경로가 있다. 첫째, 과거에 배출된 폴리염화비페닐이 해저에 퇴적돼 있다. 따라서 준설 작업으로 다시 분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하나는 건물 등 건축자재로 사용된 폴리염화비페닐이다. 건축 폐기물을 통해 매립되지만 결국 하수를 타고 지속해서 바다로 흘러들고 있다.”

바다는 오염물질의 하수구이자 정화조이다. 어떤 물질이든 쓰레기장에 매립해도 긴 세월을 거쳐 결국 바다로 흘러든다. 하지만 폴리염화비페닐 등 잔류성 유기오염물질은 자연환경에서 분해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바다에 진입해서는 미세플라스틱에 흡착돼 물고기의 입속으로 들어간다. 다시 범고래와 인간의 입속으로 들어간다. 체내에 농축된다. 영국의 범고래는 이미 번식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한반도 바다도 위험하다

범고래나 에스키모 원주민 등 바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생명들은 바다가 보내는 경고를 진즉에 알고 있었다. 이달 초 슬로베니아 블레드에서 열린 국제포경위원회(IWC)에 참석한 김현우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 연구원은 25일 귀신고래를 사냥해 섭취하는 극동 러시아 추콧카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몇 년 전부터 원주민들 사이에서 ‘냄새 나는 고래’(stinky whale)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이번에 열린 총회 과학위원회에 조사 결과가 보고됐는데, 냄새 나는 고래에서 체내 카드뮴 농도가 높게 나왔다는 겁니다.”

미국 알래스카의 북극해 마을 카크토비크의 원주민들이 2016년 9월 북극고래를 해체하고 있다. 고래를 사냥해 고기를 먹는 전통을 가진 에스키모 원주민들의 체내 환경오염 물질 농도가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wjryu@hani.co.kr

소문은 사냥한 귀신고래를 해체하면 고약한 ‘병원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인터뷰 조사를 시작했고, 확인된 사례만 2012~13년에 8마리였다. 러시아 해양포유류 연구기관인 틴로센터는 2008~2016년 귀신고래 사체 샘플의 분석 결과를 과학위원회에 보고했다. 분석된 8마리 중 3마리에서 카드뮴과 납의 기준치가 넘었다. 보고서는 “카드뮴과 납이 ‘냄새 나는 고래 현상’의 원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반도 바다는 어떨까? 문효방 한양대 교수(해양융합과학)는 26일 <한겨레>에 “우리나라 바다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한반도 해역에 사는 참돌고래와 밍크고래 체내에 있는 잔류성 유기오염물질을 조사하고 있다.

“참돌고래의 경우, 이미 성호르몬 교란이나 면역체계를 무너뜨리는 수준의 폴리염화비페닐이 검출됩니다. 떼죽음을 일으키는 수준은 아니지만, 일부 개체에 작용하여 전체 자원량을 감소시켰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비교적 먼바다에 살면서 크릴 등 먹이사슬의 하층에서 먹이를 구하는 밍크고래는 체내 축적 농도가 낮은 편이다. 반면 참돌고래의 농도가 높은 이유는 참돌고래가 오염이 심한 연안 가까이 살고 먹이사슬 상층의 먹이를 잡아먹기 때문이다. 폴리염화비페닐이 해양동물을 멸종의 나락으로 밀어내고 있지만, 사람의 경우 곧 멸종될 정도로 위험에 직면한 건 아니다. 다행히 우리는 항상 생선만 먹고 살진 않는다.

한국은 1979년 폴리염화비페닐을 넣어 만든 절연유 사용 금지를 시작으로 1996년 이 물질의 제조·수입·판매를 완전 금지했다. 문 교수의 연구를 보면, 고래의 일종인 상괭이 체내의 폴리염화비페닐 농도는 2003년에서 2010년 사이 60~69% 낮아졌다. 그러나 고래는 여전히 탄광 속의 카나리아처럼 경고를 울리고 있다고 문 교수는 말한다. “고래는 중요한 생물지표입니다. 고래에게서도 일어나면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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