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작 구성 광개토왕비문 그 연결과 독립성의 비밀

임기환 2017. 6. 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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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문 3면과 4면 (주운태 탁본). 비문의 3부에 해당하는 수묘인연호 관련 문장이 새겨져 있다.
[고구려사 명장면-21] 이번 회에서는 광개토왕비에 대해 상상력이 다소 발휘된 주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혹 독자분 중에는 상상력이 지나치다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료와 논거가 부족하더라도, 무언가 설명을 필요로 하는 주제에 대해 좀더 상상해보는 것도 고대사를 연구하는 재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를 '사실'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 그럴 듯한지 아닌지만을 짚어보시기 바란다.

광개토왕비문은 내용으로 볼 때 3부로 나누어진다. 제1부에는 시조 추모왕의 건국설화를 비롯하여 광개토왕의 약력과 업적, 비의 건립 경위 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1면 1~6행 부분이다. 제2부는 광개토왕대에 이루어진 정복 활동의 훈적을 연대 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1면 7행~3면 8행 부분으로 분량상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비문의 중심이다. 제3부에는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 330가(家)의 출신지와 연호 수, 수묘인과 관련된 광개토왕의 개혁 조처 및 관리 법령 등을 기술하고 있다. 3면 8행~4면 9행 부분이다.

문장의 분량을 보면 2부가 중심이지만, 이렇듯 비문에 여러 내용이 담겨 있으므로 비의 건립 목적이 무엇인지, 비의 성격을 어떻게 볼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부 내용에 주목하여 광개토왕의 훈적비라는 설, 3부를 중시하여 수묘비라는 설, 여러 요소를 두루 갖춘 종합적인 성격을 갖는 독창적인 비문이라는 설, 또는 묘비나 신도비라는 설 등이 있는데, 그중 종합적 성격의 비문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왜 비문 내용이 이렇게 독특하게 종합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답도 제시되고 있지 않다. 비문 1부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그 말씀(詞)은 이러하다(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로, 광개토왕의 훈적을 새겨 후세에까지 전하고자 함이 목적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래서 비문을 훈적비라고 보는 견해는 일면 타당하다.

그런데 3부 수묘인연호와 관련된 내용은 1·2부와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 3부는 수묘인연호와 관련된 일종의 공문서(公文書)쯤에 해당되는 내용이 많다. 물론 2부와 3부에는 서로 공통되는 내용도 있다. 2부에서 광개토왕의 정복기사에 등장하는 성(城) 이름이 3부에서 수묘인이 차출되는 신래한예의 성 이름과 대부분이 중복된다. 이점에서 수묘인연호비가 비문의 중심이고, 2부는 그런 지역을 어떻게 정복했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이라는 주장도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2부에는 수묘인과 관련 없는 정복활동이 연대기로 기술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비문 전체를 수묘인연호비로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2부와 3부 내용의 일부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같은 비문 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2부에 보이는 백제로부터 빼앗은 성의 숫자와 성 이름 표기가 3부에 보이는 신래한예 차출 지역과 일부 차이를 나타나고 있다. 또 3부 내용에는 광개토왕대 사실과 장수왕대 사실이 혼재되어 있어 광개토왕대 사실을 기술한 1·2부와 차이가 있다.

지난 회에서 살펴본 비문의 역사관이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그렇다. 1·2부에서 '과거'는 현재의 광개토왕이 계승해야 될 전통이다. 즉 광개토왕 업적은 과거의 재현과 복원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3부에 보이는 수묘제 운영에서 잘못이 많이 나타난 '과거'는 개혁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광개토왕의 훈적으로는 과거와 다른 새롭게 개혁한 수묘제도가 제시되어 있다. 선왕들의 왕릉 앞에 수묘인연호비를 세운 것은 광개토왕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였다. 이렇게 1·2부와 3부에서 역사관의 맥락이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이런 차이점들로 보면 비문의 1·2부와 3부는 본래부터 하나의 텍스트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현 광개토왕비문은 훈적비와 수묘인연호비라는 별도로 작성된 2개의 텍스트가 합쳐졌다고 추정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장수왕이 처음에는 부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해서 훈적비를, 그리고 부왕의 왕릉 수묘를 위해서는 수묘인연호비를, 즉 2개의 비석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능을 만들고 비를 세우는(遷就山陵, 於是立碑)"는 과정에서 훈적비와 수묘인연호비를 하나의 비석에 합쳐 기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겠다. 현재의 광개토왕비문에서 1·2부와 3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은 점도 아마 그런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현 광개토왕비문이 훈적비문과 수묘인연호비문을 합쳐서 만든 것이라는 추론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문제는 왜 두 비문을 합치게 되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좀더 상상력을 발휘해보도록 하자. 이때 광개토왕비의 거대한 외형과 입지가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겠다.

광개토왕비가 왕릉과 관련된 비임은 비문 내에서 "산릉으로 모시었고,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였다(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고 밝히고 있음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광개토왕릉 역시 현 광개토왕비가 서 있는 부근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유력한 후보는 태왕릉과 장군총이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게 광개토왕릉인가를 두고는 학계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이렇게 논쟁이 거듭되는 이유는 장군총과 태왕릉 모두 위치상 광개토왕비와 그리 긴밀하게 연관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태왕릉은 비와의 거리가 가깝지만, 비가 태왕릉 뒤에 위치하고 있다. 장군총은 방향은 어울리지만 거리가 지나치게 멀다. 따라서 광개토왕비가 애초부터 왕릉비로서 적절한 입지가 선택되어 세워진 것이 아닐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한다.

지난 회에서 광개토왕비 외형을 통해 비의 원석이 어떤 종교적 성격을 갖거나 신앙과 숭배의 대상물로서 기능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 바가 있다. 이런 추정과 연결시켜 보면, 장수왕이 광개토왕의 훈적을 좀더 선양하기 위해 왕릉과 가까이 위치한 이 원석을 비문석으로 선택하였고, 본래 훈적비와 수묘인연호비 2개로 세울 비문을 합쳐 하나의 비문으로 기록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지금까지 광개토왕비의 독특한 외형, 광개토왕비문만의 독자적인 내용 구성을 설명하기 위해 상상력이 많이 발휘된 추론을 해보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의 경우 무엇보다 중요한 태도가 계속 궁금증을 갖고 의문을 제기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광개토왕비와 비문을 마주하고 이런저런 의문을 제기하고 나름 합리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보시기를 바란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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