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과 길] 태아의 고뇌 나는 어떤 존재인가'

강주화 기자 입력 2017.06.08. 20:50 수정 2017.06.08. 21:18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대사로 유명한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햄릿'.

"우리는 언제나 현재 상태에 괴로워한다"는 태아의 독백은 존재론적 고뇌에 빠진 햄릿을 떠올리게 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권력에 얽힌 비극적 가족사를 서사했다면 매큐언은 '나'를 존재론적 상징으로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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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문학동네, 264쪽, 1만3500원
영국 국립극장(NT)의 연극 ‘햄릿’의 한 장면. 소설 ‘넛셸’에서는 어머니 자궁 속 태아가 햄릿이 했던 존재론적 고민을 한다. 메가박스 제공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대사로 유명한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햄릿’. 현대 영문학의 거장인 이언 매큐언(69·사진)이 햄릿을 파격적으로 해석한 신작 소설 ‘넛셸’(Nutshell·호두껍데기)을 내놨다. 넛셸은 ‘아아, 나는 호두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나 자신을 무한한 왕국의 왕으로 여길 수 있네’는 햄릿의 대사에서 가져왔다.

“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 속에 거꾸로 들어 있다. …이 안에 있는 나는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여기 들어있는지 궁금해 한다.”(9쪽) 자궁 속 태아 ‘나’가 화자(話者)다. 매큐언이 고안한 21세기 햄릿이다. 우연히 태아의 고요한 존재감을 강렬하게 인식한 그가 ‘햄릿’을 다시 읽으며 주인공의 무력한 상태를 태아에 대입했다고 한다.

젊고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트루디는 삼촌 클로드와 함께 아버지 존의 살해를 모의한다. 불륜을 저지르며 살인을 모의하는 어머니와 삼촌은 각각 ‘햄릿’ 속에 등장하는 왕비 거트루드, 왕의 동생 클로디어스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 상태에 괴로워한다”는 태아의 독백은 존재론적 고뇌에 빠진 햄릿을 떠올리게 한다.

태아로 설정된 ‘나’는 햄릿의 심리적 갈등과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핵심적 장치다. “아버지 라이벌의 남근이 코앞에 있는 경험을 누구나 하는 건 아니다.” “‘아기는 어딘가에 두고.’ 반복할수록 그 말은 진실처럼 깨끗이 닦이고” “나는…죽은 존재였다. 증오하는 전처의 뱃속 무덤에 거꾸로 처박힌 채.”(100쪽)

그러나 ‘나’는 지적이다. 어머니 트루디가 틀어놓는 라디오와 팟캐스트 오디오북으로 국제 정세를 훤히 익혔을 뿐만 아니라 문학의 세계에도 일가견이 있다. 어떤 순간에도 태아는 철학 또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나’가 아버지에 쓴 편지 한 대목. “죽지 말고 살아서 아버지의 아들을 받아들이고…그 보답으로 충고 하나 드릴게요.”(116쪽)

하지만 매큐언은 태아의 존재론적 고뇌와 고통을 극한으로 몰아간다. 아버지가 숨졌다는 비보를 들은 태아는 유일한 보호자가 사라졌다는 절망 속에 탯줄을 감아 자살을 시도한다. 존재와 비존재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이진법에서 ‘나’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매큐언은 모든 사건의 목격자와 진술자로 태아를 선택함으로써 일단 상상하기 힘든 극적인 효과를 획득한다. “예정일을 이 주 앞둔 내 손톱은 무척 길다. 나는 우선 손톱으로 절개를 시도한다.”(255쪽) 출산에 관한 문장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권력에 얽힌 비극적 가족사를 서사했다면 매큐언은 ‘나’를 존재론적 상징으로 확대한다. 어머니가 삼촌과 잠자리를 갖는 동안 어머니의 욕망이 자신의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정신적 자유까지 압박한다고 처절하게 호소한다. 욕망과 고통의 정점에 한 생명 ‘태아’가 있는 것이다. 바다 위를 떠도는 난민에 대한 서사는 양수 위에 뜬 태아의 이미지와 겹쳐지기도 한다. 난민 역시 ‘나’처럼 자기존재를 선택할 수 없는 처지다.

매큐언의 간결하면서도 직설적인 문장들. 그 문장들 사이로 고요하고 우아하게 고발되는 등장인물의 숨겨진 욕망과 긴박한 사건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연민 많은 사람이나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이들은 이 책을 읽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임산부. 태아가 전하는 사실적 독백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수 있고 때론 지나치게 관능적이기 때문이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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