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태아의 고뇌 통해 '햄릿' 파격적으로 재해석

심혜리 기자 2017. 6. 9.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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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넛셸
ㆍ이언 매큐언 지음·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64쪽 | 1만3500원

시동생과 모의해 남편을 독살하려는 여성이 있다. 이들의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엿들으며 번민하는 이는 다름 아닌, 여성의 자궁 속 태아다.

영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이언 매큐언(69)이 지난해 발표한 열네번째 소설 <넛셸(Nutshell)>은 자궁 속 태아를 화자로 내세워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최근 문학동네에서 번역돼 나왔다.

소규모 출판사를 운영하며 시를 쓰는 남편 존과 별거 중인 20대 여성 트루디는 부동산 개발업자인 시동생 클로드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 존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아내 트루디의 사랑을 다시 얻고 싶어하지만, 트루디는 클로드와 함께 존을 독살해 자살로 위장하고 저택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트루디와 클로드가 침대 위에서, 식당에서, 차 안에서 나누는 모든 비밀스러운 대화를 태아는 전부 듣고 있다. 태아는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트루디의 몸 안에 갇혀 있지만, 국제정세와 고전문학에 해박하다. 트루디가 틀어놓는 라디오와 팟캐스트 강의, 자기계발 오디오북의 내용을 모두 흡수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확실해질 미래 앞에서 태아는 고뇌한다. 만일 두 사람의 공모가 성공한다면? 클로드는 형의 아이를 맡아 기를 생각이 없어 보인다. 트루디의 모성이 기댈 만한 것인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나는 빈민층에서 비참한 유년 시절을 보낼 것이다. 반대로 계획이 실패한다면? 트루디와 함께 감옥에서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태아는 이 위험에서 아버지를 구하고 두 사람을 단죄하고 싶지만, 자신에게 허락된 행동은 발뒤꿈치로 자궁벽을 차는 것뿐이다. 그는 자신의 무능과 운명의 가혹함에 대해 번민한다. “두통은, 마음의 고통은 무엇을 위함인가? 나는 무엇에 대한 경고를, 무엇을 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는가? 근친상간을 저지른 네 삼촌과 어머니가 아버지를 독살하지 못하게 하라. 거꾸로 뒤집힌 채 빈둥거리며 소중한 나날을 허비하지 마라. 태어나서 행동하라!”

태아와 트루디의 순조롭지 않은 관계는 작품의 긴장을 한층 고조시킨다. 태아는 트루디와 한 몸이지만 서로에게서 자신을 지켜야 하는 모순적 관계다. 태아는 자신의 지성과 직관을 동원해 트루디에 대한 정보를 집요하게 수집하고 분석한다. 태아는 트루디를 좋아해야 할지, 불신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 태아는 자신의 ‘신’인 트루디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한다. 매큐언은 만삭의 며느리와 이야기하던 중 태아의 고요한 존재감을 강렬하게 인식한 후 이 소설에 대해 착안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작품은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비극으로 꼽히는 <햄릿>을 매큐언식으로 해석한 오마주다. 덴마크의 햄릿 왕이 급서한 뒤, 왕의 동생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올라 왕비 거트루드와 재혼한 데 대해 작은 아버지 클로디어스가 아버지를 독살한 것이라는 의심을 품는 햄릿 왕자가 모티브다.

작가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햄릿>을 꼽으며, 셰익스피어를 가장 만나고 싶은 작가라고 말한 바 있다. 소설의 제목 ‘넛셸’ 역시 <햄릿>의 2막 2장에서 따왔다. “아아, 나는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나 자신을 무한한 왕국의 왕으로 여길 수 있네.”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던 매큐언은 작품에서 셰익스피어뿐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 존 키츠, 제인 오스틴 등 여러 영문학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태아의 고뇌를 통해 종횡무진으로 활약한다.

이 소설은 이언 매큐언의 상징과도 같은 ‘리얼리즘’의 제약으로부터 탈피해 예술적 상상력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배 속의 ‘나’는 어떤 운명을 맞이할까? 트루디와 클로드는 완전 범죄를 할 수 있을까? 사태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최후까지 서스펜스는 계속된다.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서사 속에 인간의 덧없는 탐욕과 이기심, 도덕의 본질, 현대사회의 불안을 논하는 작품이다.

<심혜리 기자 gra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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