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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그늘에 가려진 '반란의 고향' 여수

서부원 입력 2017. 06. 1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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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그늘' 여순사건 찾아 떠난 답사 여행

[오마이뉴스서부원 기자]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 광장과 장군도 해상에서 펼쳐진 2016여수밤바다 불꽃축제의 모습
ⓒ 여수시 제공
전라남도 여수는 남녘의 내로라하는 관광지다. 지난 2012년 세계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이탈리아 나폴리와 브라질의 리우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미항'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몇 해 전 그룹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단숨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얼마 전 뭍과 섬을 잇는 해상 케이블카가 설치 운행되면서 또 한 번 시선을 끌었는데, 그 덕에 한 해 여수를 찾는 관광객의 수가 천만 명을 헤아릴 정도로 유명세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몰려들며 외국어 간판을 단 상점과 식당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가히 여수가 대세다. 이렇듯 여수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때가 또 언제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여수를 상징하는 것은 따로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존경하는 역사 인물로 단연 첫손에 꼽는,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듣자니까 어느 기관에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2위인 세종대왕과도 큰 차이를 보일 만큼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조금 과장하자면, 태어나면서 엄마와 아빠의 이름 다음으로 먼저 듣고 배우는 이름이 아닐까 싶다.

여수를 걷다 보면 온통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실상 여수가 보유한 문화유산의 '팔 할'은 충무공 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 즈음 전라좌수영의 객사 건물이었다는 진남관부터, 그의 업적을 기록한 좌수영대첩비, 부하들에게 귀감이 된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타루비, 그를 기리는 최초의 사당 충민사, 거북선을 건조했다는 선소 유적 등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찰 정도다. 숱한 유적들뿐만 아니라, 오동도와 종고산, 충무동 등 섬과 산, 작은 동네의 이름에서까지도 그의 자취는 깊게 남아있다.

 1948년 10월 23일, 여순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진압군이 투입됐다. 해군 LST함이 여수앞바다 선상에서 시내를 향해 무자비한 박격포 공격을 하자 여수시내가 불타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다.
ⓒ 주철희 제공
하지만 여수에는 '찬란한' 이순신만으로 규정되기에는 슬픈 현대사가 서려 있다. 70년이 다 되도록 진실규명은커녕 사실조차 입 밖에 내기 꺼리는 참혹한 역사를 품고 있는 고장이기 때문이다. 여수는 제주에서 일어난 '4.3 항쟁'을 진압하라는 미 군정과 이승만의 출동 명령을 거부하며 미군 철수와 통일 정부 수립의 기치를 내걸고 시작된 '여순 사건(여수·순천 사건)'이 발화된 곳이다.

여순 사건은 당시 여수에 주둔한 14연대 내 소수 좌익계 군인들에 의한 항명 사태로 시작되었다. 이내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전라남도 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지만, 불과 8일 만에 진압되고 일부는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6.25 전쟁이 끝난 이후까지도 토벌군과 맞선, 이른바 '빨치산'의 원조 격인 셈이다.

여순 사건이 엄청난 규모의 양민 학살로 비화한 것은 진압이 종결된 뒤다. 수개월 동안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숱하게 학살됐다. 당시 공표된 '남녀 아동까지 일일이 조사해 불순분자를 다 제거하라'는 이승만의 무시무시한 담화문은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에게 중용된 친일 경찰들은 물 만난 고기 마냥 온갖 불법을 자행했고, 그럴수록 학살된 양민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이른바 '손가락 총'으로 부역자를 가려내고 즉결 처형하였으며, 학살 후 수백 명의 시신을 기름을 끼얹어 불로 태우는 만행조차 서슴지 않았다. 심사를 기다리는 군중이 보는 앞에서 날 선 일본도로 부역자로 지목된 이의 목을 벤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의 만행은 지금까지도 지역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고 있다.

무자비한 양민 학살은 이후 6.25 전쟁 중 수많은 보도연맹원 학살로 이어졌다. 여수의 경우, 그들을 먼바다로 끌고 가 수장시켰다는 증언까지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조차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 없고, 여태껏 '빨갱이'라는 낙인 속에 '반란 사건'으로 규정되며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진실규명이 요원한 상태다.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 사건은 그해 12월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귀결되고, 대한민국을 철저한 반공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변곡점이 된다. 이듬해인 1949년 한 해 전국의 교도소 수감자 중 70%가 국가보안법 위반자라는 통계만 보더라도 여순 사건이 미친 영향을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후 '빨갱이'라는 굴레는 지금까지도 연좌제처럼 남아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옥죄고, 이유 없는 공포를 안기는 무소불위의 힘을 갖는 단어가 되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발족하여 여순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우선 활동 기간이 짧았고 권한이 크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관련 사료가 충분치 않은 데다 증언과 해석이 사람마다 분분하고 유적마저 대부분 사라지거나 훼손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여순 사건의 현장에는 스테인리스로 된 안내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사건 발생 58년만인 지난 2006년 전라남도 순천에 희생자 위령탑을 시작으로 인근 지방자치단체에 위령 시설이 하나둘씩 세워지곤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것이 사람들의 기억과 성찰을 이끌어내기에는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망각에 맞서야 한다. 우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하루가 멀다고 사라지고 훼손되는 유적을 찾아나서는 노력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곳에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그것도 망각이 강요되어 온 참혹했던 역사가 남겨진 터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뜻 맞는 지인들과 함께 부러 남녘 바다 여수로 답사를 떠나려는 이유다.

거창하지만, 이번 답사는 그렇듯 미루어진 여순 사건의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작지만 의미 있는 한 걸음이라 자부한다. 충무공 이순신과 '여수 밤바다'로 치장된 화려한 여수 관광에 맞선,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의 일환이다. 주말 우리는 남녘의 내로라하는 관광지, 전라남도 여수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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