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매일경제

광개토왕이 정복한 영토 중 가장 중요한 땅은 어디일까

임기환 입력 2017. 07. 21. 06:04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소재 오두산성. 사적 351호. 광개토왕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백제 방어의 요충지였던 관미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사진=문화재청
[고구려사 명장면-24] 광개토왕 정복활동의 성과, 즉 그 왕호의 '광개토경'이라고 하면 흔히 만주대륙의 드넓은 평원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붙인 고구려인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하였을까? 고구려인들의 생각과 관념들을 그대로 전해준다는 점에서 비문에 담긴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을 전하는 문헌자료를 보면, '삼국사기'에는 주로 백제와의 전쟁을 기록하고 있으며, 중국 측 역사서에는 고구려와 후연과의 전쟁 기사가 대부분이다. 사실 남쪽의 백제 및 서쪽의 모용 선비세력은 고국원왕 이래 고구려의 주적(主敵)이었다. 광개토왕으로서는 할아버지 고국원왕 때의 뼈아픈 패배를 설욕한다는 점에서도 백제 및 후연과의 대결에 우선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헌기록에서는 그런 역사상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문 기사들은 이런 문헌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먼저 후연과의 대결을 보면, 400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고구려가 신라 구원전에 대군을 투입한 400년에 후연은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 영역을 탈취해갔다. 광개토왕은 곧바로 반격에 나서 402년에 후연의 요충지인 요서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고, 404년에 연군(燕郡)을 공격하는 등 요하를 건너 후연 영역 깊숙이 공세를 취하였다. 후연 역시 요동성을 공격하는 등 반격하였으나, 대체로 고구려가 우세한 전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양국의 공방전은 407년에 풍발의 쿠데타로 모용 씨 왕실이 무너지고, 고구려인 후예인 고운(高雲)이 즉위하면서 그치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후연과의 전쟁을 보여주는 기사가 비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영락 17년(407년) 전쟁 기사에서 정벌 대상이 결락되어 있는데, 필자는 이를 후연과의 전쟁 기사로 보고 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1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沙溝城 婁城 □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지금까지는 이 전쟁의 대상을 백제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 왜냐하면 17년 전투 이후 고구려군이 회군하면서 공파한 여러 성 중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등 백제 혹은 한반도 계통으로 추정되는 지명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지명은 부여(扶餘) 지역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위 기사에서 전투 상대방에 대해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斬煞蕩盡)' 하였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태왕의 속민(屬民)이 된 백제에 대한 표현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에 대한 논증은 고구려의 천하관과 관련된 문제로서, 다음 회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또 전투의 성과로 만여 벌의 갑옷이나 군수물자를 거론하는 대상으로도 백제보다는 후연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영락 17년 기사가 후연과의 전쟁 기사라면, 양국이 대결을 벌였던 곳은 부여가 위치한 중국 농안(農安) 일대에서 동요하(東遼河) 일대로 이어지는 평원 지역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영락 17년조 기사만으로는 고구려의 공세인지, 아니면 후연의 공세인지 알기 어렵지만, 이 전투가 그동안 공방전을 주고 받은 고구려와 후연의 전쟁과정에서 고구려 측의 승리로 쐐기를 박는 전투였음은 분명하다.

문헌기록에는 당시 고구려와 후연은 여러 차례 충돌하지만, 비문에는 필자의 의견을 따르더라도 후연과의 전쟁 기사는 영락 17년조 1건뿐이다. 이는 여러 해에 걸친 전쟁의 성과를 모아 한번의 전쟁 기사로 집약해서 기술하여 광개토왕의 훈적을 선양하기 위한 비문의 필법이다. 이런 기술은 백제와의 전쟁 기사에서도 나타난다.

비문에 의하면 영락 6년(395년)에 광개토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58성(城) 700촌(村)을 공파하고 아리수를 건너 백제의 도성을 압박하여 마침내 백제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한 때는 광개토왕 즉위 초부터 4년까지 매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비문의 기사는 여러 차례 이루어진 대백제전의 성과를 모아 영락 6년의 광개토왕의 친정(親征)의 성과로 일괄 기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 비문에는 고구려가 정복한 58성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고 있다. 광개토왕의 성과로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문에는 광개토왕이 정복한 최종 성과를 64성 1400촌이라고 정리하고 있는데, 그중 58성이 영락 6년의 성과였던 것이다.

그런데 58성의 소재지가 어디냐를 두고 논란이 적지 않다. 좁게는 한강 이북으로 한정하는 견해에서,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역에 걸친다는 견해, 그리고 임진강에서 남한강 상류까지 포함하는 견해 등 다양하다.

일단 한강 이북설은 그 영역 안에 58성을 설정하기에는 너무 좁아 취하기 어렵고, 경기도 일대를 포함하는 중부지역에 위치한다는 견해도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납득할 수 없다. 임진강~남한강 상류 지역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후 영락 10년(400)에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5만명의 군대를 출병시키는 교통로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아마도 영락 6년에 공취한 58성 중에는 북한강에서 원주·단양 일대에 이르는 교통로 지역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에도 비문에는 영락 10년 신라구원전, 영락 14년(404) 대방계를 침공한 백제와 왜군의 격파 등 한반도 내에서의 전쟁 기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광개토왕은 백제와의 대결에서 거듭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 승리는 단지 숙적 백제를 압도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역관계로서 백제와 연결된 가야와 왜를 포함한 일군의 세력을 모두 제압한 것이며, 신라를 일종의 신속국으로 거느리게 되었던 것이다. 비문에는 이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 중에서 흔히 요동이나 만주 북방의 영토 팽창을 주목하지만,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오히려 한반도 내에서 광개토왕 군사 활동 모습이 두드러지게 기술되어 있는 셈이다. 특히 광개토왕의 성과 중에서 한강 유역의 장악이 매우 특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당시 정세상 한강 유역의 장악이 곧 한반도 서북부의 안정으로 이어지고 다시 요동 일대 장악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비문에서는 광개토왕의 훈적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왕의) 은혜로움은 하늘에 미쳤고, 그 위엄은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들을) 쓸어 없애시니 백성들은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도다" .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즉 '광개토경'에 대한 당대 고구려인의 평가는 그것이 백성들의 편안하고 풍족한 삶으로 이어졌다는 칭송으로 나타났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좋은 정치란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임을 비문은 보여주고 있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