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서 매일같이 노동자가 매맞는 걸 봤지"

구정은 기자 2017. 7. 2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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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하시마 탄광서 어린 시절 보낸 빨치산 장기수 출신 구연철씨
ㆍ부친 따라 8세 때 들어가 …늘 배 고팠고 콩깻묵 먹으면서 버텨
ㆍ16~17세 정도 젊은이들 징용…임금 빼돌린다는 얘기 많이 들어

‘군함도’라 불리는 일본 하시마의 탄광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구연철 선생이 지난 25일 오후 서울 왕십리 CGV 영화관에서 양대 노총 주최로 열린 영화 <군함도> 시사회가 끝난 뒤 하시마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구정은 기자

“열여섯, 열일곱, 이런 사람들이 끌려왔어요. 나중엔 쌀도 없어서 콩기름 찌꺼기를 만주서 가져오면 그걸 삶아 먹었지. 그러다 배탈 나서 일 못하면 얻어맞고.”

지난 25일 서울 왕십리 CGV 영화관에서 일제 강제징용 문제를 다룬 영화 <군함도> 시사회가 열렸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마련한 시사회였다. 이 자리에는 부산에서 올라온 손님이 있었다. ‘군함도’로 불리는 일본 하시마(端島)의 탄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빨치산 장기수 출신의 구연철 선생(86)이었다.

영화는 탄광에 끌려간 노동자들의 지옥같은 삶,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극적인 탈출 시도 등을 그렸다. 구 선생은 “상황이 비슷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지만, 좋은 영화”라면서 하시마에서 보낸 시절을 돌아봤다. 1931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그는 만 8살 때 아버지가 일하는 하시마로 갔다. 부친은 먹고살기 힘들어 만주로, 일본으로 돌아다닌 노무자였다. “징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거든. 내가 거기 갈 때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성기였어.”

영화에선 경성(서울)에서 악단을 이끌던 ‘강옥’(황정민)이 어린 딸까지 데리고 탄광에 끌려간다. 구 선생의 설명은 달랐다. 전쟁 말기에 징용돼 온 노동자들은 “열여섯, 열일곱, 많아야 스물다섯 살의 젊은이들이었다”고 했다. “높이가 수십m 되는 승강탑으로 노동자들이 아침저녁 오르내렸어요. 곡괭이 하나씩 들고서.” 그는 6년 동안 아래위층에 방 한 칸씩 있는 목조건물에 살았고, 탄광마을의 학교에 다녔다. 섬을 에워싼 방파제 위에서 학생들은 매일 구보를 했다. 해방과 함께 14살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하시마의 기억은 너무나 깊이 박혀 있었다. “그 섬은 동서로 320m, 남북으로 640m여서 넓이가 6.3ha밖에 안돼.”

하시마는 나가사키(長崎) 남서쪽에 있다. 1890년 미쓰비시가 섬을 사들인 뒤 해저탄광 채굴기지로 삼고 주변을 매립해, 암벽을 둘러쳤다. 외관이 군함처럼 보인다 해서 생긴 별명이 군함도, 일본식으로는 군칸지마다. 1986년 공개된 사료에 따르면 1925~1945년 이 섬에서 숨진 노동자 1295명 중 조선인이 122명이었다. “배탈이 나거나 몸이 아파 일하러 못 간 노동자들은 구타를 당했어요.” 구 선생은 매일같이 노동자들이 얻어맞는 걸 봤다고 증언했다.

징용자가 아니더라도, 섬에서의 삶은 누구에게나 힘들었다. 모든 것이 배급제였다. “처음엔 콩이랑 쌀을 나눠줬는데 나중엔 먹을 게 없어 배가 고팠지. 만주에서 군용 콩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배로 옮겨왔어. ‘대두박’이라 부르는데, 그걸 삶아 먹으며 버텼어요.” 관리자들이 임금을 빼돌린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돌아온 고국에서도 그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동국대 진학 1년 만에 이승만 반대 투쟁을 하다가 제적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남의 신불산으로 들어갔다. ‘영남 알프스 빨치산’으로 불린 그의 일대기는 안재성 작가의 <신불산>이라는 책으로도 소개됐다. 1954년 체포돼 20년8개월 옥살이를 했다. 하시마, 빨치산, 장기수. 그렇게 이어진 선생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 현대사’다.

선생의 인생에 숱한 곡절이 새겨지는 사이, 하시마도 변했다. 탄광은 1974년 문을 닫았고 한때 체류자가 5000명이 넘던 섬은 무인도로 변했다. 방치된 섬은 <배틀 로얄>이란 소설과 영화의 배경으로 유명해졌다. 구 선생은 지난해 10월 크루즈 관광지가 된 하시마를 방문했다.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어 갔는데, 정작 살았던 곳과 학교, 징용자 합숙소 같은 곳들은 출입이 통제돼 보지를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일본은 아픈 역사를 지운 채 ‘메이지시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이 섬을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켰다. 징용자들의 역사가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양대 노총은 다음달 12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운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부부 작가가 제작했다.

부인과 함께 부산에 사는 구 선생은 혹시나 노동자들이 많이 왔을까 해서 이날 시사회에 참석했다.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만이 많다고 그는 말했다. “내가 목격자니까, 당시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여러 사람과 얘기해보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우리 테두리 안에서만 노동을 얘기하면 그건 모순이야.” 선생의 이야기는 하시마와 70여년 세월을 넘어, ‘통일’로 향해 가고 있었다.

<구정은 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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