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스런 은행가인가 애국자인가

2017. 7. 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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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사-비난 한몸에 받은 '금융황제'
제이 피 모건 1200쪽짜리 전기
'부 폭발' 미국 사회 묘사 돋보여

[한겨레]

금융황제 J. P. 모건
진 스트라우스 지음, 강남규 옮김/이상·4만8000원

현대 미국의 거대 투자은행인 ‘제이피(JP)모건체이스’의 창립자 존 피어폰트 모건(J. P. Morgan, 1837~1913). 그는 19세기 말 세계금융의 중심이 런던에서 뉴욕 월스트리트로 이동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금융재벌이었다. 월스트리트 체제를 선망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그에 대한 자신만의 평가를 내려야 하지 않을까. 미국의 전기 작가 진 스트라우스가 쓴 12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전기 <금융황제 J. P. 모건>은 모건의 삶과 그 시대를 판단하기 위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모건은 자수성가형은 아니었다.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태어난 그는 20살 때 뉴욕의 철도투자회사에 무보수로 취직하면서 월스트리트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다. 런던의 투자은행을 소유한 그의 아버지 제이 에스 모건이 거래 관계에 있는 이 회사와의 유대 관계를 강화하고, 모건에게 신흥 시장이었던 미국의 금융을 가르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등으로 거액을 벌어 런던 제2의 은행가로 성장한 아버지는 많은 사업을 아들과 같이 벌였다. 상속세 제도가 없는 시절에 막대한 회사 지분과 돈을 물려줬다.

1903년 젊은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찍은 제이 피 모건의 모습. 모건이 “형편없다”며 그 자리에서 찢어버린 일종의 비(B)컷이다. 스타이컨이 몰래 사진을 인화해 유명 사진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에게 줘 그의 갤러리에서 전시하도록 했다. 1909년 모건의 측근이 전시된 이 사진을 본 뒤, 모건 쪽에서 원본을 5천달러에 사들이겠다고 했지만 스티글리츠는 거절했다. 현재 뉴욕 ‘피어폰트 모건’ 도서관에 전시돼 있다. 이상 제공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19세기 말까지 ‘도금시대'(마크 트웨인)가 열렸다. 인구는 두 배, 부는 네 배로 증가했고 남북을 횡단하는 철로가 깔렸다. ‘석유왕’ 록펠러, ‘철강왕’ 카네기가 등장했으며 금융의 주도권도 점차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동했다. 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의 미국이라는 좋은 환경이 갖춰져 있었다.

모건 자신도 ‘투자자’로서 능력이 뛰어났다. 1861년 남북전쟁 당시 카빈소총 5천정을 정당 3.5달러에 사들여 22달러에 판 악명 높은 거래를 성사시키며 앞으로의 화려한 이력을 예고했다. 1862년엔 자신의 이름을 딴 투자은행을 설립해 남북전쟁 상황에서 정부 채권과 외환 거래, 단기 대출 등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창업 다음해엔 200만달러 규모의 금을 사들여서 그 절반을 런던에 보내 월스트리트의 금값을 폭등시킨 뒤, 나머지 절반을 파는 투기로 큰 이익을 봤다.

1873년 경제공황으로 미국 최대 은행인 제이쿡이 몰락할 때도 모건은 착실히 성장했다. 그는 에디슨의 백열전구의 가치를 알아보고 나중에 ‘제너럴일렉트릭’이 되는 에디슨의 벤처회사에 투자하기도 했다. 대규모 연방정부 채권 매입 전쟁에서는 재무장관과 하원의원 등 연줄을 활용해 유럽 최대 금융 거물 로스차일드 가문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40대에 이미 세계적 금융가가 됐다.

1903년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찍은 제이 피 모건의 공식 초상 사진. 현재 뉴욕 ‘피어폰트 모건’ 도서관에 전시돼 있다. 이상 제공

50대의 모건은 중앙은행이 없던 미국 시장의 안정성을 지켜내는 “중앙은행”이자 “비공식 재무부 장관”이었다. 1895년 미국에서 유럽으로 계속 금이 빠져나가, 미국은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해야 하는 위기에 몰렸다. 모건은 대통령을 만나 국제 금융회사들과 함께 신디케이트(인수단)를 만들어 금 1억달러를 정부에 제공하고, 금 유출을 막겠다는 담판을 지었고 실제 그렇게 했다. 이후 정부가 금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모건의 신디케이트가 500만달러의 이윤을 취한 까닭에 극심한 공황으로 고통받던 대중의 분노를 샀고, 퓰리처의 <월드>는 “도적질하는 고리대금업자”라고 비난했다. 반면 <뉴욕 타임스>는 “모건 같은 파수꾼이 없었다면, 어떤 투자자도 정부 채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서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모건은 ‘자신의 이익=국가의 이익’이란 등식을 굳게 믿었다. 독점에 가까운 거대 기업을 만드는 것이 출혈경쟁과 중복투자를 막아 기업인, 은행가, 노동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고 미국이 대외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는 꾸준히 철도회사들을 구조조정(워크아웃)하고 합병해 1901년 거대한 철도 지주회사인 ‘노던 시큐리티스'를 설립했다. 같은 해 철강왕 카네기에게 4억8천만달러를 주고 철강회사를 사들여 ‘유에스스틸'이란 거대 철강회사를 만드는 ‘세기의 거래'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다음해엔 영국과 미국의 대형 해운회사를 합병해 거대 해운 트러스트를 만들었다. 1907년 금융위기 때는 기업 줄도산을 막아보자며 금융인들을 모아 자금을 시장에 공급하는 사실상의 중앙은행 구실을 했다.

제이 피 모건은 1901년 거대한 철도 합병회사와 철강회사를 만들고, 1902년엔 거대 해운 트러스트까지 만들었다. 1902년 그려진 만평. 이상 제공

그러나 대다수 미국인들은 소수에게 권력과 돈이 집중되는 데 뿌리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월스트리트를 통제할 필요성을 느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모건의 노던 시큐리티스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기소했고, 1904년 연방대법원은 해체를 명령했다. 1912년 모건은 독점금융자본을 조사하기 위해 의회가 구성한 ‘푸조 위원회’의 증인석에 섰고, 넉달 뒤 이집트 나일강 여행 중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

모건이 남긴 유산은 8천만달러에 이르렀고 그의 투자은행은 지금도 세계 최대 은행 중 한 곳이다. 하지만 그의 유산만 이어져 온 것은 아니다. 성장의 낙수는 더디게 떨어졌고 공황의 홍수가 낮은 곳부터 덮쳤던 그 시기, 정치인과 자본가들이 결성한 ‘그들만의 리그’에 대한 분노도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인민당의 결성으로, 2011년 월스트리트 점령(오큐파이) 시위로, 지난해 미국 대선 기간 버니 샌더스의 돌풍으로.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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