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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자사 진의 출신지는?

임기환 입력 2017. 08. 31.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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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고분 진의 묘지명
[고구려사 명장면-27] 덕흥리 고분이 던진 파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핵심은 무덤 주인공의 출신 국적이 어디냐, 그리고 그가 지낸 유주자사라는 관직의 수여 주체가 누구이냐, 혹은 유주자사가 실직이냐 허구이냐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아래에 묘지명 전문을 제시한다.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감]리(□[甘]里) 사람으로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인 □□씨(□□氏) 진(鎭)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建威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饟將軍) 요동태수(遼東太守)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유주자사(幽州刺使)였다. 진은 77세로 죽어 영락18년 무신년(戊申年) 초하루가 신유일(辛酉日)인 12월 25일 을유일(乙酉日)에 [무덤을] 완성하여 영구를 옮겼다. 주공(周公)이 땅을 보고 공자(孔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武王)이 때를 정했다. 날짜와 시간의 택함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유함은 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후왕(侯王)이 되기를. 무덤을 만드는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에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두었다.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무덤을 찾는 이가 끊이지 않기를.

묘지명의 절반에 해당하는 뒷부분 길상을 기원하는 문장을 제외하고 보면, 무덤 주인공에 대한 기술은 성명과 출신지, 역임한 관직, 사망과 무덤 안장 관련 내용뿐으로 매우 단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문장에서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그 주된 이유는 무덤의 위치와 묘지명의 내용이 서로 잘 안어울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위 묘지명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무덤 주인공이 역임한 유주자사란 관직이다. 유주(幽州)는 그 치소(治所)가 지금의 북경 일대이며, 관할 구역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만 대략 북경 일대에서 요동에 이르렀던 지방행정 단위이다.

4세기 말에는 무덤 주인공이 유주자사로서 다스렸던 지역과 그가 묻힌 평양 일대 사이에는 서로 다른 왕조 간의 국경이 가로 놓여 있다는 게 통설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문헌 자료가 그렇게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덕흥리 고분의 묘지명은 유주, 즉 북경과 평양이 한나라, 즉 고구려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얼마나 센세이셔널한 자료인가.

덕흥리 고분을 발견한 북한 역사학계는 무엇보다 무덤 주인공 유주자사 진(鎭)의 출신지 파악에 주력했다. 그리고 진이 고구려 출신이라고 결론지었다. 묘지명에는 진의 출신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안타깝게 일부 글자가 잘 안보인다. 군(郡) 이름과 리(里) 이름은 모르지만 다행스럽게 신도현(信都縣)이란 현 이름이 명확하다.

북한 연구자들은 '고려사' 지리지3에서 "가주는 본래 고려 신도군이다(嘉州 本高麗信都郡)"라는 기사를 찾았다. 군과 현의 차이는 있지만, 이 기사에 의거하여 진의 출신지인 신도현이 평안북도 운전·박천 일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근거가 다소 미약하다. 무엇보다 고려사 지리지의 '고려'가 고구려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이 기사는 고려 초기의 신도군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학계는 리(里) 앞의 글자를 '감(甘)'으로 읽으면서 현재의 평북 운전군 삼광리에 중감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음을 들어 신도군이 고구려의 지명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설득력이 없다.

진의 출신지를 통상 유주자사를 설치한 중원 왕조의 범위에서 찾아보니, '진서(晉書)' 지리지에 '기주 안평국 신도현(冀州 安平國 信都縣)'이란 기사가 나온다. 그래서 진의 출신지인 신도현이 중국 하북의 안평(安平)군에 있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게다가 잘 보이지 않는 군 이름의 첫 글자에서는 '宀'에 가까운 획이, 두 번째 글자에서는 '一'의 획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安平'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다만 안평은 284년 이후에는 장락(長樂)으로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잘 맞지 않은 부분도 없지는 않다.

이렇게 출신 군(郡)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여서 양쪽 설의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다. 이럴 때는 무덤주인공의 성씨도 그 출신을 파악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진의 묘지명에서는 이름 앞의 성씨가 쓰여졌을 두 글자가 심하게 흐려져 읽을 수 없는 상태이다. 이처럼 출신 지역명도 일부만 확인되고, 성씨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진의 출신을 둘러싸고 처음부터 논란이 계속된 것이다.

물론 간접적인 자료로 접근할 수도 있다. 위 묘지명 중 도향(都鄕)은 군이나 현의 중심 관청이 있던 향을 가리킨다. 묘지명의 주인공은 군-현-향-리의 지방행정 조직을 갖추고 있는 지역 출신이다. 이는 중원왕조에서 내내 시행하고 있던 군현제 단위이기도 하다. 그런데 4세기 말에 고구려에서도 이러한 행정단위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도입하고 있었을까? 지금까지 자료로서는 이런 사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같은 광개토왕시대의 사정을 전하는 '모두루묘지'에는 '성민곡민(城民谷民)'이라는 기사가 있어서, 성-곡이라는 통치 단위를 상정케 한다. 물론 그렇다고 고구려가 군-현-향-리제를 도입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다. 과거 낙랑군이 있던 이 지역에 특별히 중국왕조식의 행정단위를 도입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덕흥리 고분에서 진의 묘지명이 발견되고 거기에 출신지와 성씨까지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중요한 글자 몇몇이 잘 보이지 않음으로써 국제적인 논쟁이 거듭되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처럼 고대 금석문의 경우 꼭 중요한 부분이 판독되지 않아 많은 논쟁을 낳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 회에서 살펴본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도 이에 해당한다. 그 덕분에 필자 같은 역사학자들도 이래저래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보다 명료한 증거는 부족하지만, 현재까지의 자료로서 최대한 합리적인 추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학자들이 진의 출신지를 하북의 안평군 신도현으로 본다. 그가 고구려지역 출신이 아니라면 어느 시기엔가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일 터인데, 그 망명 시기는 언제일까?

또 진이 고구려 지역 출신이 아니라고 해서 그가 유주자사를 지낸 것 조차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그가 역임한 유주자사는 망명한 뒤 지낸 고구려의 유주자사인가 아니면 망명하기 이전에 다른 왕조에 역임한 유주자사인가? 또한 실직인가, 허직인가? 유주자사라는 관직을 둘러싼 논쟁은 그 출신지 논쟁보다 더 뜨거우니, 다음 회에 말씀드리겠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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