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도시바가 뭐길래"..엇갈린 시선이 부른 혼전

이재운 입력 2017.09.0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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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드 시장 2위 매각전, 돌고 돌아 다시 안갯 속으로
도시바, 日 정부, WD, SK하이닉스 제각기 다른 입장
현실로 다가온 시장 재편 앞두고 주도권 경쟁 싸움
일본 가와나가현에 위치한 도시바 R&D센터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AFP
[이데일리 이재운 기자]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 원점으로 돌아가버린 도시바 낸드플래시 사업 인수 경쟁을 보며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당장 돈이 급해 매물로 내놨다는데, 도통 인수 협상이 ‘산(山)’으로 가는 것 같으니 말이다.

도시바에서 낸드사업부를 떼어내 만든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지난 6월 한·미·일 컨소시엄을 우선협상대상자로 교체했다가 최근 다시 웨스턴디지털 컨소시엄으로 우선순위를 교체했는데, 기존 한미일 컨소시엄이 애플과 손 잡고 다시 제안을 하면서 협상 자체가 새로 시작됐다.

이토록 엉키는 이유가 뭘까. 이를 둘러싸고 △모기업으로서의 도시바 △일본 정부·채권단 △웨스턴디지털 △SK하이닉스(000660) △애플과 삼성전자(005930) 등이 각자 가진 복잡한 속내와 입지를 보면 조금이나마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자존심 놓치기 싫은 일본, 막막한 도시바

일본은 한 때 메모리반도체 최강국이었다. 시스템반도체와 디스플레이까지 아우르며 세계 최고의 전자부품 기술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위기가 찾아왔고, 슬슬 한국이나 미국, 중국 업체 등에 밀리며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밀려났다. 2014년에는 D램 제조사 엘피다가 마이크론에 흡수되며 시장에서 떠났고, 도시바가 낸드 분야에서 2위를 지키며 유일한 자존심으로 작용해왔다.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미국 샌디스크(현재 웨스턴디지털에 합병)와 손을 잡으며 입지를 넓혀왔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소 설계사업에서 발생한 대규모 손실이 회계감사 과정에서 드러나면서 이 ‘알짜 사업’을 매각해야하는 상황에 처했다. 당장 손실 메우기는 물론, 대규모 설비투자가 지속 반복돼야 하는 장치 산업의 특성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 일각에서 제기하는 독자 생존설 검토가 힘을 크게 얻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적 자존심을 내주기 싫은 일본은, 그럼에도 일본 내 기업들이 나서지 않자 결국 해외 매각을 승인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한국이나 중국보다는 미국에 내주기를 차라리 원하는 모양새다. 사회적 여론도, 샤프를 대만 홍하이에 내줬다 일본 내 공장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마이크론이 엘피다 공장을 그대로 일본에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은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 원래 일본 사회에서 미국에 대한 선망과 선호가 높은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낸드 시장 재편기회 반드시 잡아야하는 둘

도시바 낸드플래시 제품. 도시바 홈페이지
시장 2위의 매각 추진은 필시 시장 내 재편을 불러온다. 점유율이 한 번에 요동칠 수 있고, 이에 따라 가격 변동이나 협상력 변화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000660)가 경영권 참여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이번 인수전에 3조원 가량을 출자하는 까닭은 바로 전략적 제휴와 다른 업체에 대한 견제 목적이다. 낸드 시장은 상위 5개 업체(삼성전자, 도시바, 웨스턴디지털, 마이크론, SK하이닉스)가 과점하고 있는데, 이번 인수전에 웨스턴디지털이 뛰어들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이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서버용만 만드는 인텔을 제외하고 현재 5개인 업체가 4개로 줄어들면, 3~4위권인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는 입지가 불안해진다. 독과점 시장의 가장 이상적인 구도가 3개 업체의 시장 분할이라는 점에서 추후 합종연횡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은데, 이때 주도권을 쥐느냐 혹은 흡수당하느냐의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웨스턴디지털은 여기에 또 다른 단서가 하나 붙는다. 도시바가 가진 원천 기술과 공장 생산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금껏 일본 요카이치공장을 함께 운영해왔는데, 이를 다른 컨소시엄에 내줄 경우 기술 유출 우려는 물론 경쟁력 자체가 위협받을 위험이 생긴다. SK하이닉스가 한·미·일 컨소시엄 내에서 제한적인 지위를 갖고 있음에도 유독 물고 늘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기회, 놓치지 않을 거에요” 두 앙숙의 각자 다른 이유

애플과 삼성전자는 또 다른 위치에서 접근한다. 우선 SK하이닉스 등과 함께 한·미·일 컨소시엄에 참여를 밝힌 애플은 두 가지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아이폰, 아이패드 등 자사 제품에 탑재할 낸드 제품에 대한 협상력 강화다. 애플은 그 동안 직접 생산보다는 기존 제조사와의 제휴나 인수 등을 통해 물량을 확보하고, 동시에 다른 공급 업체와의 협상 과정에서 이를 활용하는 전략을 계속 취해왔다. 낸드 시장에서 중요한 업체가 매물로 나온 만큼 이 참에 기회를 잡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앞으로 내놓을 기기에서 낸드 제품과의 최적화를 꾀하는 협업 강화 포석도 예상해볼 수 있다. 애플은 모바일 제품에 들어가는 프로세서(AP)를 직접 설계하는 등 자신만의 최적화 작업을 통해 성능을 높이는 전략을 취해왔는데, 저장장치에도 이를 접목하려는 시도도 점쳐진다.

낸드 시장 1위 삼성전자의 속내는 복잡하다. 인수해도 시너지 효과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여 인수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누가 인수하느냐에 따라 시장 판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3D 낸드 공정 전환이 다소 더딘 도시바 생산라인의 전환 작업에 자본이 급격히 투입되면 위협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도시바 자체가 손을 뗄 경우 누가 인수하더라도 시너지가 생각만큼 크지 않게 되고, 그러면 삼성전자의 현재 독주체제가 더 공고해질 가능성도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당초 6월에 마무리 지을 예정이던 매각 작업이 지연되고 있어 기존 경쟁업체들은 공급 부족에 따른 호황을 계속 누리고 있다”며 “다만 인수경쟁의 승자가 결정나면 업계 판도가 요동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올 2분기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 현황. IHS마킷 제공

이재운 (jwlee@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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