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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진왜란 때 조선 3도를 명나라에 주려 했다?

배한철 입력 2017. 09. 02.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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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소재 남연군(흥선대원군 생부) 묘.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25] "조선인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더 크고 건장하며 활달한 인상을 갖고 있다. 두 민족에 비해 훨씬 몽골이나 북아시아의 야만적인 유목민을 연상시키지만 습성은 온건하다. 일부 조선인에게서는 코카서스(유럽계)의 흔적도 발견된다. 유럽인처럼 콧부리가 치솟아 있는 반면 코끝은 다소 처져 있으며 몽골족에서 볼 수 없는 얼굴 측면의 뚜렷한 선이 그들에게서 나타난다. 머리카락도 중국인이나 일본인처럼 완전히 검다고 할 수 없다. 두 민족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갈색이나 밤색, 심지어 아마빛(황갈색)의 머리색도 보여진다. 수염도 풍부해 조선의 젊은이들은 유럽의 멋쟁이들이 질투할 만큼 매우 독특한 짙고 긴 수염을 날리며 거리를 활보한다."

1890년 발간된 '금단의 나라, 조선으로의 항해'라는 책은 130년 전 우리 민족이 중국과 일본보다는 유럽계 혼혈에 가깝다고 묘사한다. 어찌된 일일까.

쇄국을 고수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
이 책의 저자는 놀랍게도 우리에게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하고 도망간 파렴치범으로 각인돼 있는 독일 상인 E. J. 오페르트이다. 그는 세 번에 걸친 조선 탐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 19세기 말 조선의 인문, 지리, 정치, 역사, 풍습, 언어 및 문자, 산업 등을 사실적이면서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오페르트는 조선인에게서 유럽계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은 서남아시아(중동)에서 전쟁이나 내부 혁명으로 인해 축출된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주해 정착해 살았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신라 향가의 주인공인 처용, 경주 괘릉의 무인상에서도 볼 수 있듯 개방적이던 신라나 고려시대 한반도에서는 국제 간 교류가 빈번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대재앙을 겪고 나서부터는 나라의 문을 닫아걸었다. 오페르트는 조선이 완고하게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외국인을 홀대한 결과 당시 유럽인이 아는 조선에 관한 것은 전부가 17세기 이전, 그마저도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얻어진 자료들이었다고 설명했다.

19세기 조선은 모든 분야에서 아시아의 꼴찌였다. 오페르트는 억압적 정치 체제의 통치를 겪고 인접 국가들과의 교역마저 전면적으로 단절되면서 조선에서 산업정신이 무너진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고 했다. 면과 대마 제품은 조잡하기 짝이 없으며 비단은 아예 만들지 못해 상류층은 중국제를 구입해 입었다. 목기와 철기 제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제조되는 우수한 기호품과 사치품과 비교해 매우 질이 떨어졌다. 다만 사대부들이 주로 썼던 종이는 3국 중 품질이 제일 좋아 잘 찢어지지 않았다.

건축양식도 마찬가지다. 도시에서조차 건물들은 대부분 단층에 진흙으로 지어졌으며 지붕도 연토나 짚을 이어서 올렸다. 유리가 생산되지 않아 창은 기름종이를 발랐다. 세간이라 해봤자 식기 외에 별 게 없다. 식기도 자기와 질 그릇이 전부였고 쟁반은 사용하지 않았다. 의자와 책상, 그외 가구들은 오직 상류층만이 구비하고 있었지만 역시 장식용에 불과했다. 군사력은 실로 한심한 수준이었다. 상비군은 문서상에서만 존재해 병인양요 당시 무장력이 전무해 1000명의 포수를 모집하기도 했다. 병사들은 거의 칼을 차고 있지 않으며 장교와 고위 지휘관들만이 일본도를 차고 다녔다. 오페르트는 임란 때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남겨놓은 것들인 듯하다고 추정했다. 임란 때 동아시아 최강을 자랑했던 해군력 역시 서울 근처의 노후한 몇 척의 배를 정박시켜 놓은 게 전부였다. 몇 차례 정조준된 포격이면 한 시간 이내에 조선의 전 함대를 격침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장담했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구조화돼 있었다. 지방관의 임기가 매우 짧았다. 한 임지에 머무는 기간이 2년에도 못 미쳤다. 정부는 빈번한 매관매직을 통해 부족한 국고를 채웠다. 특히 흥선대원군과 그의 충복들은 모든 관직과 서훈을 높은 값으로 매매했다. 지방관들은 관직을 사는 데 들어간 돈을 회수하기 위해 신속하게 납세금을 징수하고 뒷돈 챙기는 데 열중한다. 지방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아전들은 예외없이 신임 상관들의 이러한 뒷돈을 챙겨주며 자신들의 기득권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오페르트는 19세기 후기 조선의 인구가 750만~800만명이며 이는 조선정부가 산출한 공식 통계라고 밝힌다. 지방관리들이 세금을 가로채기 위해 중앙정부에 가능한 실제 인구수를 감추어 신고해 실제보다 크게 축소됐다는 것이다. 본토에서 떨어져 있는 수백 개의 섬도 실사가 어려워 인구 추계에서 빠진다. 조선에서 취합된 신뢰할 만한 보고에 따르면 본토와 그에 부속되어 있는 섬의 실제 주민 수는 1500만~1600만명에 이르는데 이러한 추계는 지나치게 많다기보다는 도리어 적게 추산된 것이라고 오페르트는 전한다.

책에는 오페르트가 마주친 당대 조선인들의 다양한 생활양식도 소개된다. 식기를 입에 대고 먹는 중국인, 일본인과 달리 숟가락으로 음식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신기하게 여겼다. 오페르트는 이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고 적었다. 음주문화는 무절제했다. 틈만 나면 술자리를 만들며 독주가 들어오면 폭음을 한다. 주량은 모두가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오페르트 일행이 방문한 한 관리와 그의 3명의 수하들은 불과 30분 만에 샴페인 4명과 체리 브랜디 4명을 비웠다. 그들은 기분이 고조되자 대범하게도 대원군과 정부의 전제적인 강권 정치를 비판했다.

조선인은 유럽의 음악에 매료됐다. 오페르트 일행 중 바이올린 연주자의 공연이 끝나자 큰 박수갈채를 보냈고 군사고관은 평범한 손풍금 음색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고 노래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매우 대중화되어 있는 극이나 다른 공연과 같은 연예가 조선에서는 매우 낯선 영역에 속했다. 오페르트는 이 나라에 마술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고도 했다.

소박하게 치러지는 장례식은 인상적이었다. 시신은 평범한 목관에 넣어 매장하는데 신분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차이도 없다. 외국인들은 무덤 속에 귀중품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시신은 어떤 종류의 장신구와도 함께 묻지 않는다. 조선은 유교국인데도 간혹 뼈를 추려 새로 묻기도 하고 일부 상류층에서는 화장을 드물게 하기도 한다고 서술해 낯설다.

책은 조선의 역사를 고대부터 근대까지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 정리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 조선의 사서를 참고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역학구도 속에서 전체 역사를 풀어간다. 따라서 을지문덕, 연개소문, 이순신 등 우리의 전쟁 영웅들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으며 의병 활동과 같은 외세에 대한 자주적 저항 노력도 언급되지 않는다. 임진왜란에서 연전연패하던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승리를 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뜻밖에도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호기를 잡은 중국은 원군을 급파했고 우두머리를 잃은 데 이어 본국에서의 원조마저 끊긴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궤멸됐다. 저자는 조선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라면서 당시 수많은 왜군 탈영병들이 한반도 남단으로 달아나 정착했다고 말한다. 그들이 정착하면서 일본에서 유래한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동화됐는데 조선 남부지방의 방언에서 그러한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요사이 경상도 사투리가 언뜻 듣기에 일본어 발음과 비슷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이런 요인에 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임란 당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대규모 구원병을 파견한 명나라가 전적으로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중국은 조선의 영토로 인식됐던 요동지방의 완전한 양도를 요구해 복속시켜 실질적인 이득은 놓치지 않고 챙겼다. 심지어 명나라는 황제가 자리를 찬탈당할 경우를 대비해 조선이 자국의 3도를 황제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비밀 조약까지 조선에게서 받아냈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오페르트는 현재로서는 그 조약이 유효한지, 당시의 통치자에게만 적용되는지, 아니면 그 후계자들에게도 적용되는지는 애매하다고 기술했다.

쇄국정책의 상징 홍성척화비.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 억류된 조선군포로들. 군인의 모습을 찾기보기 힘들다.
조선의 쇄국정책은 대원군에 이르러 정점으로 치달았다. 오페르트는 왕위 찬탈자로 표현하면서 강하게 그를 매도했다. 그는 대원군이 의심과 억측이 많아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개방이 자신의 통치를 약화시킨다며 외세의 영향력을 배척했다고 했다. 이로 인해 대원군 시기에 전제 정치에 익숙한 조선사람들마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압제와 테러가 다반사로 자행됐다고 비난했다.

그는 책 서문에서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가 너무 늦기 전에 조선을 점령하고 지배해야 한다고 했다. 두만강은 물론 동해안 전체를 이미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여전히 조선을 수중에 넣지 않고 있어 세계적 놀림감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위선적 박애주의는 분쟁과 결국에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강조한다. 책이 출간된 지 불과 14년 후 한반도로 남하하는 러시아와 한반도를 거쳐 중국 대륙으로 뻗어나가던 일본이 동해에서 충돌하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점령하고 제국주의의 발판을 다진다.

▶E. J. 오페르트(1832~1903)=독일 함부르크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10대 후반에 상인 신분으로 홍콩에 왔으며 중국 문물과 인종에 대해 공부했다. 상하이에도 상점을 열어 무역업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면서 조선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1866년 2월 흑산도 일대를, 같은 해 6월 해미를 방문해 현감을 만나고 덕적도, 강화도를 둘러보면서 통상을 요구한다. 이를 거절당하자 통상협상에 볼모로 활용할 유물을 도굴하기 위해 1868년 6월 대원군의 생부인 남연군 무덤을 판다. 그러나 이 일은 오히려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을 더욱 강화하게 만든다. '금단의 나라 조선'(1890)과 함께 '동아시아 견문기:인도, 중국, 일본, 한국의 모습과 회상'(1898) 등의 저서를 남겼다. 71세의 일기로 고향에서 죽었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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