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국보급 역마살 유홍준 "내 구라엔 인생도 흐트러짐도 있어"

김지수 기자 2017. 9. 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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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 발간 열흘만에 10만부 돌파유홍준 “문화유산엔 좌우가없어… 나는 한국 미술 복음서 쓰는 중"“서양에 파르테논 신전 있다면 동양엔 종묘가 있다”인문학은 생존 싸움... 1등 기업 유지하려면 인류학, 민속학 배워야‘광화문 대통령' 일 추진하려면 청와대 먼저 비워줘야… 과거 숭례문 불 탄 건 기왓장 안 깨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70세)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을 냈다. 서울편 1은 종묘·창덕궁·창경궁 등 서울의 궁궐을, 서울편 2는 한양도성·성균관·동관왕묘 등 조선의 문화유산을 다룬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일본 편 4편을 포함해 모두 14편이다./사진=김지호 기자

‘강진과 해남 땅끝에서 시작한 지 햇수로 25년 만에 한양으로 입성하자니 감회가 없지 않다… 나의 독자들이 ‘답사기의 한양 입성’을 그런 기분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이니까… 서울 시내엔 조선왕조의 5대 궁궐이 있다… 모두가 즐기는 세계유산이다. 또 서울은 다름 아닌 내 고향이다. 서울 사람으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늘 있어왔다.’-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 편'에서

“대학교수 중 이렇게 넓은 방 없지. 볼래요?” 유홍준은 만나자마자 방 구경부터 시켜준다. “내가 영남대에서 명지대로 오면서 딱 두 가지 부탁했어. 인문대에 미술사학과 만들어 달라. 그리고 3만 권 넘는 책 좀 펴놓고 살게 넓은 방을 좀 달라(웃음).”

싱싱한 ‘수다체’로 인문서 380만 권을 팔아치운 작가답게, 자기 방도 문화재 해설하듯 맛깔스럽게 풀어놓는다.

“저 그림 좋지. 일제 시대 부여 화가가 그린 사냥하는 그림… 인세 받아 뭐해, 이런 데 쓰지. 마누라는 몰라요. 여기까진 일본 미술사, 저기 끝까지 중국미술, 문학사… 책 한 권 쓰려면 한 천 권은 자료를 보지. 이런 도록은 대학 도서관에서도 못 구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고. 나는 제자들을 위해 두 권씩 사놨지만. 천장에 달린 저 북어, 멋지지요? 복스럽잖아. 이 100년 된 고지도는 나이브 페인팅이야. 이 부채도 한번 구경해. 앞에 궁궐 그림은 내가 그린 거, 뒷면엔 글 쓰는 설계도면이야. 그 골조대로 글을 써요. 허허.”

방물장수 같은가 하면 서당 훈장 같기도 한 유홍준. 학문과 객설을 두루 섞은 저 입담은 이번에 출간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 편'에서 절정을 이룬다.

종묘 앞마당 달빛 고인 월대부터 은밀한 뒷간까지, 창덕궁 후원 정자에 쓴 정조의 명문장부터 창경원 시절 울려 퍼지던 맹수들의 울음까지… 궁궐의 성과 속을 종횡무진으로 아우르는 유홍준의 전지적 서술은, 현진건이니 프랭크 게리니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소설가, 음악가, 건축가들의 미학적 추임새와 어울려 독특한 하모니를 이룬다.

뿐인가. 개성에서 전격 도읍을 바꾼 태조 이성계와 무학 대사의 ‘신도읍 한양 설계' 스토리나 문화재청장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과 협공으로 북악산을 개방한 스토리는 정치공학적 스릴이 넘친다.

유홍준은 노력파다. 한 권의 책을 내기 위해 수백 리를 걷고, 수천 권의 책을 읽고, 수만 장의 사진을 찍는다. 그가 구경시켜준 두 곳의 개인 서가는 대학 도서관을 방불케 했다. 유홍준의 뇌를 쪼개서 열어본 듯, 웬만큼 정리정돈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장서에 묻혀 괴사할 분량이었다.

그 자신, 진짜 꿈은 책 한 권 없는 빈방이라지만.

동묘 편의 글을 쓰기 위한 설계도. DDP, 박수근, 동묘, 백남준 등의 메모가 보인다.

1993년 5월 ‘남도 답사 일번지'로 시작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이제 10권을 채웠고(4권은 일본 편), ‘서울 편'은 출간 열흘에 이미 10만 부를 찍었다. 칠십이 된 지금, 그는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답사기 ‘중국 편'을 준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이 칠십에 중국어를 배우시다니 대단한 학구열입니다.

“이제 회화 3권째 들어갔어요. 할 만해요. 오가는 길에 CD로 열심히 듣지. 허허허. 난 영원한 학생이에요. 영원한 학생!

-유홍준, 황석영, 백기완을 일컬어 ‘대한민국의 3대 구라’라고 하더이다(웃음).

“이어령, 김용옥, 유홍준을 묶어서 ‘대한민국 3대 교육방송'이라고도 해요(웃음). 구라, 라는 말 좋아요. 거기엔 인생도 있고 흐트러짐도 여유도 있잖아. 교육 방송엔 단정함이 있고. 그런데, 오늘 인터뷰 몇 매 쓸 거예요?”

-1만 2천 자 정도 씁니다.

“그렇게나 많이? 제대로 풀어야겠네. 오케이. 맘 잡았어요. 원고지 60매에서 80매면 단편 소설이야. 내가 답사기 쓸 때 한 꼭지를 100매 기준으로 써요. 단편 소설 분량이지. 딱딱 계산해서 쓴다고. 그게 한 사람이 소파에 누워서 읽을 수 있는 최대치야.”

-과연 독자들을 휘어잡기 위한 궁리가 치밀하네요. 이번 ‘답사기-서울 편'은 TV 미니시리즈처럼 한 챕터가 끝날만 하면, 다시 살살 흥미를 돋워서 손에서 놓지 못하고 한달음에 읽었어요. 문장에서 판소리의 유장한 맛과 객설, 리듬이 느껴지더군요.

“내 지인들도 그러더라고. 3일 동안 신문도 뉴스도 못 보고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책에 빠져 살았다고(웃음). 3일 동안 외국 여행하듯 서울 여행한 셈 쳤다더구만. 독자들은 알지 몰라. 내가 여러 수법을 써요. 풀어줬다 야단도 쳤다, 요런 건 몰랐지 디밀기도 하고, 개념으로 지적인 정리도 말끔하게 해주지. 허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2’ 유주학선 무주학불. 표지에 펼쳐진 북악산과 인왕산의 한양도성이 아름답다.

-선생을 미술사 스타 강사에서 ‘답사기' 저자로 스카우트 했던 창비(창작과 비평사) 편집 위원이자 문학평론가 백낙청 선생이 기가 막힌 평을 했지요.

“학삐리와 딴따라의 강점을 하나로 녹였다고, 그랬죠. 백낙청 선생이, 기가 막힌 평을 해줬어요. 학자 기질과 대중 예술가 기질이 반반씩 있었던 거라, 내가. 그분이 내가 세 번째 답사기를 내고 계속 히트를 하니까 분석을 했어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장수하는 것은 문학적 구성력에 있다는 거죠.”

-구전 같은 힘이랄까요. 25년간 380만 부라는 장기 베스트셀러가 나온 건 교양과 문학의 합작이 아니면 힘들지요.

“처음에 빵 치고 들어가기도 하고, 도입부에서 느슨하게 들어가서 휘몰아 끝내기도 하죠. 그 수법이 능수능란하다는 거죠. 허허. 모든 챕터가 단편소설같이 기승전결로 딱 떨어지도록 했어요. 사실 기행문도 오래 쓰면 패턴이 생겨요. 그 패턴 안에 불국사도 경복궁도 집어넣으면 뚝딱 나올 수도 있어. 난 그런 전형적인 게 싫어서, 모든 꼭지의 콘셉트를 달리했어요. 청중에게 해설하는 형식도 취하고, 혼자서 거닐기도 하고, 문헌 속을 헤집기도 했지요. 문학청년으로 갖고 있던 꿈을 답사기 형식으로 풀어 넣었다고 봐야죠.”

-‘서울 편’에서는 종묘와 창덕궁이 새로 보였습니다. 특히 종묘 정전은 동양의 목조 건물 중 가장 긴 117m의 길이감과 그 앞의 텅 빈 월대가 아름답더군요. 사막의 고요와 진공의 무게가 고였다는 말이 실감 났습니다. 서양의 파르테논 신전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고요.

“일본 건축계의 거장이었던 시라이 세이치가 그랬지요.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엔 종묘가 있다”고. (부채에 붓 펜으로 그린 종묘 그림을 보여준다) 이거 내가 그린 거예요. (눈 쌓인 종묘 사진을 가리키며) 비 오는 종묘도 눈 쌓인 종묘도 참 멋이 있지요. 프랑크 게리는 종묘를 참관하고 그랬어요. “한국인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걸 감사해야 한다. 심플하고 스트롱하지만 미니멀리즘은 아니다". 기가 막히죠.”

-미니멀은 감정이 배제된 건데, 종묘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아는 사람은 그 말이 확 다가올 거예요. 종묘제례악은 또 어떤가요. 작곡가 이건용 선생이 그랬어요. 화성도 작곡가도 없는데, 참 좋다고. 돌이켜보면 나는 삶의 과정에서 여러 좋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답사기 쓰기에 좋은 사람이 됐어요.

1세대 건축가 김수근 선생이 세운 공간사에서 일하며 승효상, 민현식 같은 여러 건축가 친구들을 사귄 것도 도움이 됐지요. 창덕궁도 조선왕조가 건국 13년 만에 지은 진짜 조선적인 궁궐이거든요. 건축가 민현식에게 “남북 일직선의 축선을 무시한 창덕궁 건축의 콘셉트가 어디서 나온 것 같으냐?” 물었더니, 땅이 시키는 데로 지어서래요.

종묘의 겨울. 눈이 내려 정전의 지붕이 하얗게 덮일 때 종묘는 거대한 수묵 진경산수화 같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요즘 우리나라 건축은 건물 대지를 반듯하게 밀어놓고 지으니 멋이 없어요. 땅이 생긴 대로 지으니 창덕궁이 경복궁보다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죠. 시점의 이동에 따라 공간의 변화도 풍부해요. 그렇게 우리가 창조한 유물은 우리 잣대로 미학을 세워야지, 자금성보다 작다느니 콜로세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떠들면 어리석은 거죠.”

-창덕궁 낙선재는 왕가의 마지막 여인들이 거주한 이야기만큼이나 그 창살 무늬의 아름다움에 놀랐습니다.

“참 예쁘지요? 자세히 애정을 갖고 보면 보여요. 궁궐 기행인 ‘달빛 기행’에 실제 가봐요. 더 예쁘거든.”

-우리 미학의 핵심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고 했는데, 맞는 말 같습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나는 2권의 부제인 ‘유주학선 무주학불(有酒學仙 無酒學佛)'이 좋아요. 흥선대원군이 쓴 글귀로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는 뜻이지요.”

-미술사학자로서 선생만큼 대중적 인기와 권력을 두루 누린 사람도 드물지요.

“많이 누렸지. 많이 누렸어요. 이십 대 때 군대 훈련소에서 만난 한 친구가 내 사주와 손금을 보고 그랬어요. “사십 넘어가면 넌 세상을 뒤집을 거다" 실제로 내가 43살에 답사기를 처음 썼어요. 그 친구가 “너 관운도 있다. 대신 반드시 감옥에 가야 해”하더니 다 맞았어. 허허. 제대하고 두 달 만에 감옥에 갔으니까(그는 삼선개헌 반대 시위로 1974년에 11개월간 옥에 있었다).”

사주팔자대로 옥살이 후에 얻은 관운 때문이었을까. 문화재청장 시절 그는 많은 문화재를 개방했다. 특히 경호 문제로 폐쇄됐던 청와대 뒷산을 개방한 것은 장안의 화제였다. 책에도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민정수석과 007작전 하듯 북악산 개방을 밀어붙였다는 대목이 흥미롭게 등장한다.

일요일 아침 일찍 청와대로 가서 북악산 정상에 오르니 그날따라 날이 맑아 관악산까지 내다보였다. 참으로 황홀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올라와 보고 처음이었다. 수행하던 경호원이 평소에는 시계가 멀어야 30㎞ 정도인데 오늘은 40㎞나 된다고 했다.“유 청장님이 신문사에다 글을 쓰겠다고 하면 지면을 내주겠지요? 어느 신문에든 이 좋은 산을 대통령이 독차지하면 되겠느냐고 호되게 비판하는 글을 좀 기고해주십시오”“개방하라는 뜻이죠?”“물론이죠.”-’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 편 2’에서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하여 여기에 기거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더 많이 살았다. 경복궁이 권위적이라면 창덕궁은 인간적인 분위기가 짙다.

-선생 덕분에 북대문인 숙정문과 북악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한양순성 길이 완성됐습니다. 서울 편-2권에 자세히 나오더군요.

“북악산도 개방했고, 경회루, 창덕궁 후원 개방까지 많이 문을 열었죠. 나는 문화유산에 출입금지 딱지가 붙는 게 싫었어요. 국민이 누려야죠. 삶 가까이 있어야 문화재도 온기가 돌아요.”

-반면 경복궁 만찬은 구설에 올랐지요.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국제대회에 국빈급이 오면 만찬은 그 나라 궁궐에서 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 그걸 못하게 하고 왕릉에서 고기 구워 먹었다고 하는 건 악의적 보도였어요. 250년간 제사 지내면 그것을 먹었는데, 밥 먹으려고 하면 국은 끓여야 잖아.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국회의원, 법원장, 도지사들인데, 다들 나보다 다 높은 사람들이었거든. 따지고 보면 다 참여정부와 언론의 불편함이 빚어낸 풍경이었죠.”

-이번 답사기 ‘서울 편'에 숭례문이 없어 의아했어요. 문화재청장 시절 불탔던 기억 때문인가요?

“(정색하며) 숭례문은 서울시 관할이었어요. 당시에 나는 루브르박물관 한국어 서비스 사업과 비무장지대 유네스코 등재 문제로 파리에 있었고. 아쉬운 건 목조건물은 골든타임이 5분이에요. 그런데 당시 소방차 60대가 왔는데, 어느 누구 기왓장을 못 끌어내렸어. 제1의 룰이 기왓장 깨는 건데... 기와 안에 대패와 나무를 보온과 방충용으로 집어넣는데 거기 불붙으면 끝이거든.

예전 수전 화성 서장대에서 불났을 때 소방관이 기왓장 깨고 30분 만에 불을 껐더니, 과잉진화라고 경찰 조사받은 일이 있어요. 내가 있었으면 책임질 테니 부수라고 했을 텐데. 참 운이 없었던 거죠. 불에 탈 운명이었던가 봐.”

-저는 현장에서 목격했는데, 일종의 트라우마가 됐습니다. 목재 타는 냄새가 진동했지요.

“가슴이 아프죠. 그런데 숭례문을 새로 지었다고 하면 영안실에서 다시 나온 거로 잘못들 알고 있어요. 아니야. 중환자실에서 완치된 정도예요. 2층만 새로 했다고. 숭례문은 앞으로 나올 책에서 다룰 거예요.”

180cm의 훤칠한 키. 하루 1만보 이상을 걷는다는 유홍준./사진=김지호 기자

유홍준은 숭례문 화재 사건 이후 문화재청장을 사퇴했다.

-서울 토박이로 서울 편을 쓰면서 더 애정이 깃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초중고를 모두 종로구에서 나왔어요. 서울이 변해가는 모습이 머릿속에 있지요. 지금 동십자각에서 삼청동 가는 길이 고1만 해도 개천이었지. 그리고 청와대길, 통인동 가는 길에서 스케이트를 탔고. 청운국민학교 다닐 때 통인시장 앞 복개공사를 했는데, 그 길을 갈 땐 몇 겹의 이미지가 쌓여서 떠올라요.

그래서 서울 편 3권을 쓸 때는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내가 살아본 서울, 문헌으로 본 조선 시대 서울. 1955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한국전쟁 끝나고 폭격으로 학교 건물이 한 채 남았어요. 10월이 되면 학생들이 가마니 가져와서 바닥에 깔고 천막 교실에서 난로 피워 우유를 끓여서 먹으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 시절에도 동네 부잣집 아들은 각설탕 3개를 가져와서 먹었지. 고놈이 나한텐 설탕을 안 나눠 주더라고. 내가 아직 기억이 나요. 허허. 그래도 없는 삶 속에서도 정을 나누는 분위기를 쓰고 싶어요. 대학생 시절에는 인사동 고서점인 통문관(1934년~)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통문관 주인 할아버지(이겸로 선생)가 끝까지 나를 손자 같은 친구로 삼아줬어요. 그분이 96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영남대 교수로 있으면서도 그분과 교류하며 미술사의 자양분을 공급받았어요.”

-한국미술사에 관심을 갖게 된 뚜렷한 계기가 있습니까?

“67년에 대학엘 들어갔는데 서울대 미학과 가서 매일 배운 학문이 칸트, 헤겔이었어요. 당시에 모든 게 팝과 모더니즘으로 설명되는 게 싫었어요. 나 자신을 잃고 싶지 않다는… 내 안에 감성적 직접성 같은 게 있었죠. 그러던 중 69년도에 이동주 선생이 잡지에 연재한 ‘우리나라 옛 그림'이라는 글을 봤어요. 그걸 모아 읽으면서 한국미술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죠.”

-당시 서울대 문리대 분위기도 일조했을 텐데요.

“4.19세대의 민족주의적인 써클 문화가 있었죠. 신동엽과 김수영의 시가 주는 문학적인 영향권 안에 우리가 있었어요. 김지하가 대표적이었어요. 노래하는 김민기, 판소리 하는 임진택을 비롯해서 나 유홍준도 김지하 키드라고 할 수 있어요. 김지하 이전은 모르겠고, 아무튼 김지하로부터 오고 가는 에너지가 참 대단했어요.”

스스로를 한국미술 전도사라고 부르는 유홍준 교수./사진=김지호 기자

그즈음 그는 아놀드 하우저가 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달나라에서 만 년 전부터 지구를 내려다본 사람이 쓴 것처럼 시야가 넓더라고. 그런 글을 쓰고 싶었어. 자연스럽게 백낙청 선생, 김윤수 선생(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만든 지식의 물줄기도 흘러들어오면서 나라는 사람이 키워진 거죠.”

어쩌면 그의 지난 25년은 답사기를 쓸 때와 답사기를 준비할 때로 나눠진다.

-사실 25년간 한 시리즈를 쓴다는 게 독자와 작가의 협업이 없으면 힘든 일입니다.

“한 60대 독자가 그래요. 내 ‘답사기'를 읽으며 나이 들었다고. 25년… 긴 시간 사랑받은 만큼, 내게도 긴 시간이 필요했어요. 1, 2, 3권을 쓰고 시즌1의 매듭을 지었어요. 쓰면 무조건 돈이 되던 시절이라 그러기 쉽지 않았지. 한번 쓰면 100만 부, 50만 부가 팔려나갔으니까. 하지만 미술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죠.”

지름길 대신 둘레길을 택했지만, 지식의 발밑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 사이 미술평론집을 내고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북한과 금강산 땅을 밟았고, 화가의 생애를 다룬 치열한 인물사 ‘화인열전’과 추사 김정희를 다룬 ‘완당평전’을 썼다. 그리고 문화재청장이 되어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에서 욕먹으며 신명 나게 일했다. 놀면서 공부하는 유홍준이라는 ‘답사 문화재'가 켜켜이 쌓여갔다.

“문화재청장을 하고 나서 다시 미술사로 돌아갔어요. 내가 미술사학자로 존경을 받을 때 ‘답사기'도 생명을 얻어요. 대중적 인기에 빠지면 나와 책이 모두 추해진다고. 출판사는 조바심을 냈지만, 기다리라고 하고 2년간 ‘국보순례’를 썼어요. 그런데 극과 극의 반응을 얻었어요. 허허.”

-극과 극의 반응이라니요?

“내가 좌파 성향으로 알려졌는데, 그 글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거든. 콘텐츠는 따라올 수 없지만, 좌파 학자 글이라고 독자들 사이에서 말들이 많았어. 그런데 문화유산이라는 것에 좌우가 어디 있어요? 나에게 좌우는 없다, 그건 라인이 아니라 에어리어다, 그랬죠.

2011년 출간된 ‘국보순례'.

게다가 ‘국보순례’는 원고지 5매라 그림과 글이 딱 떨어져. 내 친구들이 이건 화장실에 두고 보기에 좋다고들 하더라고(웃음). ‘국보순례'가 반응이 좋아서 세트로 ‘명작순례'를 이어서 썼어요. 요건 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읽으면 좋겠다 싶어서 25매로 썼죠.”

‘답사기’는 소파에서, ‘국보순례'는 화장실에서, ‘명작순례'는 침실에서… 독서의 공간과 시간까지 계산하는 치밀함이라니, 그 ‘장악의 욕망'이 무서울 정도였다.

-‘답사기'로 돌아오면서 제주도를 쓰고 2015년 바로 일본으로 건너갔지요? ‘일본 편' 순서를 앞으로 둔 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당시 한일관계에서 아베가 난리 치는 걸 보고 분개하면서, 학자로서 할 말을 하고 싶었어요. 나도 역사를 보는 프라이드와 굵은 선이 있는 거죠. 한국 역사 교과서의 문제가 뭡니까. 한국사를 한반도의 ‘사건사고사’로만 가르친다는 거예요. 문화도 스스로 창조한 것도 있지만 세계 문화의 흐름 속에 낙오되지 않고 따라간 게 있거든.

중국인이 청자로 세라믹 혁명을 일으켰지만, 그걸 벤치마킹해서 고려청자를 만든 건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해요. 일본도 서양도 수입해서 썼지. 한국인의 특징이 그래요. 주변부 문화국의 정체성인데, 사실 1등으로 리드한 적이 없어요. 명석하긴 한데 자원은 없고 그래서 어느 놈이 발명하면 그걸 금방 잘 따라잡아요. 굉장한 DNA예요.”

-지정학적인 특수성에서 나온 한국인의 강점이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것의 정체이기도 하고요. 그 DNA로 여기까지 이뤄냈습니다만.

“그냥 청자가 아니라 우리는 ‘상감청자’를 만들어 냈어요. 그냥 TV가 아니라 ‘삼성 TV’ ‘삼성 핸드폰'을 만들어냈죠. 2등이 갖는 행복이 있는데, 1등이 되니 문제가 생겨요.”

-앞장서면 방향을 제시해야 하니까요.

“뒤통수만 보고 뛰던 2등이 1등이 돼서 앞에 서면 아득해져요. 점프할지, 좌회전할 지. 그래서 핸드폰 기능을 어떻게 하느냐는 인류학의 문제, 심리학의 문제, 민속학의 문제가 되는 거야. 대한민국에서 기업 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대단해져서 인문학을 찾는 게 아니에요. 지금 인문학은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된 거예요.”

-중요한 시기지요.

“연암 박지원의 수필 중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칠십 먹은 노인네가 통곡을 해서 “영감님, 왜 그러십니까?” 물었답니다. 노인 말이, “지금까지 봉사로 살았는데, 지금 갑자기 눈을 뜨니 집을 못 찾아가겠다. 왜 이렇게 길이 많냐?”. 지금 상황이 그래요. 연암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그랬답니다. 노키아가 왜 망하고 샤프가 왜 망했겠어요. 길을 못 찾고 헤맸으니 선두를 빼앗기고 망했지요.

2등의 시선으로 머물던 ‘역사’를 우리는 다시 봐야 해요. 세계사 속에서 우리만의 고유 의식을 찾아야 할 때라고. 그래서 한국문화사라는 책을 쓰고 싶었고 꼭 쓸 거예요. 그 전에 한국미술사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 중국답사기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원하던 목표를 이뤘습니까?

“일본답사기에는 문화사 안에 유물을 빼곡히 넣었어요.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해요. 비로소 안다는 것의 실체감이 생기는 거죠. ”

-안다는 것이 실체감이라…

“아는 것에 대한 3대 명언이 있어요(웃음).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 그리고 유홍준의 ‘아는 만큼 보인다’. 인터넷에서 누가 그러더라고요. 인터넷 보면 별별 중생이 다 있어. 허허허.”

-문화재청장으로 일하던 시절을 더듬어보면, ‘아는 만큼 일했다’라 자부하십니까?

“신나게 했죠. 일단 수동적인 정부 기관에 큐레이팅 기능을 넣었어요. 유물 보고서도 나는 바깥의 전문 출판사에 아웃소싱해서 자료 다 개방하고 디자인 퀄리티도 높였어요. 문화재청의 조직과 예산도 두 배로 늘렸어요. 그게 제일 큰 거죠. 이를테면 복원을 위한 문화재 종합병원도 만들었고, 유네스코 등재도 내가 많이 했죠.”

-그런데 최근 서울시가 추진한 한양도성 유네스코 등재는 실패했더군요.

“아마 중국에서 반대했을 거예요. 유네스코도 대단한 ‘마피아’들이 있거든. 자칭 올드보이들인데, 그들과의 친선관계가 중요해요. 15년 이상 경력의 능구렁이들이라 로비가 엄청나. 쑤저우는 9개 정원, 교토는 사찰 14개에 신사 3개, 조선왕릉도 42개로 묶으니 등재가 됐잖아요. 묶으면 되는데, 그건 국제적 경험이 필요한 거거든.

남한산성도 그때 내가 있으면 단독으로 안 했어요. 북한산성 한양도성 같이 묶어서 하면 됐을 텐데. 결과적으로는 우리도 ‘올드보이’에 끼어들만한 귀신을 키워야 해요. 유네스코에서 한국문화유산의 가치를 올리는 일에 보람을 얻는 그런 인재가 분명 있을 거예요.”

-문재인 정부의 ‘광화문 대통령’ 공약 자문 책임자인데, 진척된 건 좀 있나요?

“광화문광장은 서울시 소유고, 정부청사 짓는 건 또 국토부의 일이에요. 세종시 이전 문제도 결정이 안 됐으니 지금은 서두르기보다 준비만 하고 있어요. 청와대는 나중에 고궁박물관으로써도 되고. 중요한 건 청와대를 비워준다는 사실이에요. 관저는 뒤쪽에 총리공관이나 안가가 있으니, 일단 방 빼주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우선 방부터 빼라고 해요(웃음).”

-학자로서의 삶과 관료로서의 삶, 어떤 쪽이 더 즐겁습니까?

“당연히 학자지. 관료 생활도 답사기 쓰는 데 누가 되면 안 해야지. 지금 나이가 칠십 줄인데 내가 관료로 들어가서 3~4년 일하고, 또 2~3년 재충전하면 76세야. 어휴... 우리 마누라한테 물어봐도 “극성부리지 말라"고 할걸. 허허허.”

-요즘 SNS를 보면 ‘보이는 만큼만 즐긴다’가 대세죠. 유적지가 아니라 가로수길, 경리단길을 걸으며 식문화를 소비하는 여가의 흐름에 섭섭함은 없는지요?

“공자 선생의 말에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데, 즐긴다는데 뭐가 나쁘겠어요. 다만 앎을 추구하면 더 좋은데 말이야... 감성의 소비가 아니라 알면서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허허.”

유홍준 교수가 필생의 역작이라고 꼽는 ‘화인열전'.

-칠십인데 허리도 꼿꼿하고 건강해 뵙니다. 평소에도 도보량이 많지요?

“기본 1만 보는 걸을 거예요. 답사로 체력이 충전됐죠. 젊은이들이 날 못 따라와. 알겠지만 내가 ‘1박 2일’에 네 번, ‘무릎팍도사'에 두 번, ‘놀러 와’ 등등 예능프로그램에도 많이 나갔잖아요. 시청률이 그때 20%가 다 넘었지. 나영석 피디, 그 양반이 참 똑똑해. 그즈음 강호동이 나가면서 ‘1박 2일’이 위기였는데, 다른 연예인 채워 넣는 대신 콘셉트를 바꿔서 나를 찾아온 거예요. 경주 남산 반응이 좋아서 마지막 프로로 경복궁을 한 번 더 하자고 해서 또 했어요.”

-예능 욕심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웃음). 요즘 지식 수다 ‘알쓸신잡'의 원조 격이죠.

“내 지론이 그래. 맛있는 음식도 좋지만, 영양가도 중요해요. 맛있게 빚으면 그게 최고지. 요리는 ‘1박 2일’이지만, 재료는 경주 남산과 궁궐로 들어간 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어요. 내가 대학 4년 다니면서 연극반을 했어요. 무대장치도 만들고 틈틈이 단역도 했지. 그 연극반 센스가 TV에서 나오더라고, 대학 친구들이 말해주데요. 허허허.”

-매사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비결이 뭡니까?

“꾸밈이 없으니까 실수를 해도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고 그런 거죠. 1등 이야기를 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내가 1등이잖아. 그러니 오류도 자주 지적받고 그래요. 조선일보나 삼성이나 다 똑같아. 1등이기에 당하는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문화권력자라는 비판도 받습니다만.

“그게 나쁜가요. 하하하. 권력을 가질만한 사람한테 가면 나라에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나는 권력을 쥔 적도 행사한 적도 없어요. 내 추천으로 장관 된 사람도 없고, 예산 편성에 관여한 적도 없거든.”

-답사기를 필생의 역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실 내가 생각하는 역작은 ‘화인열전’이에요. 삼국시대, 통일신라, 조선 시대를 두루 다룬 편안한 한국미술사인데… 소파에서 읽긴 너무 책이 두껍단 말이지. 아무튼 나는 이게 곰브리치의 ‘스토리 오브아트(서양미술사)'처럼 읽히길 소망해요.”

-인문학자로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내가 공부하는 미술사는 휴머니티에 관한 거예요. 내 생각은 그래요. 공부해서 얻은 지식을 그 시대 사람들과 나눠 쓰는 게 인문학자의 사명인 거지요. 나는 실천하는 인문학자가 되고자 했어요. 대학교수라는 커리어, 무슨 무슨 위원… 이런 게 사회적 실천이 아니야. (혀를 차며)‘답사기’는 교수업적평가회에서 대중서라고 1점도 안 줘. 논문 써서 발표하면 100점을 주면서. 그런 식으로 학문이 대중과 만나는 것을 갈라놓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학자가 자기 나와바리만 쌓으려 들면 안 되잖아.”

-문화유산 해설자로 독보적인 지위에 있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한계도 있을 텐데요.

“나는 ‘내수용’이에요. 서양에서 산 적이 없어서 그네들의 관점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설명하진 못해요. 그런 점에서 수출용은 나 다음에 누군가 또 써야 할 부분이에요. 한국의 임어당이 나오면 좋겠어요. 임어당은 한 다리는 중국, 한 다리는 서양을 밟고 한마음으로 우주를 향해 글을 썼지. 그런 기개 있는 사람이 나와서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요. 난 거기까지는 못하니까.”

-유홍준으로 사는 게 행복한가요?

“내 종교가 한국 미술이에요(웃음). 나는 그 전도사고. 바이블이 있었다면 그걸 들고 전도했겠지만, 없으니 또 쓰면서 전도해요. 힘들지만 강연도 행복하게 해요. 이를테면 성경의 마태나 마가 같은 거지.

그런데 내가 이번에 책을 내놓고 “여보, 나 장하지? 그런데 나 이거 대체 언제까지 써야 해?”했더니 마누라가 한마디로 잘라요. “써서 내보낸 지식은 당신 지식이 아녜요. 잘했다고 할 것도 없어.” 내 친구들이 그럽디다. “집에서 네 마누라가 너를 들뜨지 못하게 꼭 붙잡고 앉혀준다"고. 허허. 맞는 것 같아. 우리 마누라가 참 돌부처지요.”

소설가 이문구는 ‘역마살도 유홍준의 경지에 이르면 문화재급이다’라고 했다. 아니 그 인간 자체가 문화유산에 속하는 한 물건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의 종교가, 한국미술이라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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