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죽는다, '논어'도 죽었을까

입력 2017. 9. 17. 10:26 수정 2017. 11. 27.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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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① 연재를 시작하며

[한겨레] ▶ 김영민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 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영문 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이 연재물은 정밀 독해, 역사적 맥락, 정치이론을 결합하는 관점에서 <논어>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격주 연재.

<논어>의 언명은 수천년 전에 발화된 것들이고, 그 발화자와 청중들은 오래전에 죽었으며, 그 언명에 원래 의미를 부여하던 맥락들 역시 역사적 조건이 변화하면서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러한 <논어>의 내용을 살아 있는 고전의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논어>와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오랜 시간과 맥락의 간극을 무시하는 일이다. 위키피디아

오늘날 “동양” 고전 읽기에 관련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고전을 미끼로 해서 파는 만병통치약이다. 여러 고전 해설가들은 동양 고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뿌리를 발견하기도 하고, 환경오염을 해결할 대안을 발견하기도 하고, 현대사회의 소외를 극복할 공동체를 발견하기도 하고, 물질적 퇴폐에 맞서 인간성을 회복할 정신적 가치를 발견하기도 하고, 노화를 위로할 신경안정제를 찾아내기도 한다. 만병통치약을 파는 고전 해설은 건강보조식품 광고에 실린 기나긴 효능 리스트를 닮았다. 진정한 민주주의, 자연친화적 세계관, 소외를 극복하는 공동체의 이상, 그리고 피로회복, 변비, 탈모 치료에 이르기까지. 서점의 자기계발서 판매대에서만 고전을 만병통치약으로 포장해서 파는 것이 아니다. 정교한 지식을 추구해야 할 대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사이비 만병통치약을 사고판다고 감옥에 가야 한다면, 오늘날 대학이 곧 감옥이다.

이것이 곧 동양 고전에서 현대산업사회 위기의 해결책이나 버거운 인생에 대한 위로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필요하면 거의 모든 것에서 원하는 바를 찾아낸다. 외로운 영혼이 건설 현장 덤프트럭에서 심리적 위로를 얻었다고 해서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따뜻한 손길이 그립다 보면 녹슨 포클레인에서도 따스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동양 고전에서 무엇을 찾아내든 상관없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면.

문제는 그것을 만병통치약으로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팔 때 시작된다. 그러한 부류의 고전 해석은 해당 고전보다는 그 판매자에 대해서 보다 많은 것을 알려준다. 누군가 덤프트럭에서 정서적 위안을 얻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덤프트럭에 대해서보다는 덤프트럭에서조차 위안을 찾아야 하는 그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는 것처럼. 만병통치약을 표방하는 고전 해석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동양 고전에 대한 상대적으로 정확한 지식이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전시하는 지적 권위에 대한 화급한 욕망, 사회인들의 전방위적 멘토가 되어보겠다는 허영, 그리고 무엇보다 지성계에 광범위하게 뿌리 내린 허위의식이다.

지적 네크로필리아들이 전제하는 건
어떤 특정 고전이
인간이 가진 근본문제에 대해
확고하고도 결정적인 답을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고전은 변치 않는 근본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제공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문제에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과
자극을 주기에 유의미하다

1817년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의 입학례를 그린 <왕세자입학도첩>의 한 장면. 영조는 1742년(영조 18) 성균관에서 열린 사도세자의 입학례에서 <논어>에 나오는 주이불비(周而不比)와 비이부주(比而不周) 문구가 새겨진 탕평비를 세우도록 했다. 공(公)을 따르는 군자와 사(私)를 따르는 소인의 처세를 지적한 내용이다. 경남대학교박물관

<논어>의 언명은 수천년 전에 발화된 것들

허위의식 중 대표적인 사례는 동양 고전을 통해서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동양”이라고 부르는 폭넓고 느슨한 전통에서 가장 강해 보이는 무기를 골라 “서양”이라고 부르는 역시 폭넓고 느슨한 전통에서 가장 취약해 보이는 지점을 타격한다. 오늘날 온갖 병폐의 근원은 특정 동양 고전이나 전통에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 역시 허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건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대범하고 과장된 주장은 동서양 문명에 대해서 정교한 이해를 전해주기보다는 그러한 주장의 근저에 있는 다소 서글픈 허위의식을 드러낸다. 씹을 수도 없을 정도로 큰 빵을 억지로 입에 넣고 버둥대는 작지만 탐욕스러운 입술들처럼.

하필 <논어>는 그러한 허위의식에 가장 취약한 고전 중의 하나이다. <논어>는 오랜 시간 고전으로서의 권위를 누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일견 고도의 지적 훈련 없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언명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논어>를 불후의 고전이라고 선언하고 자신들이 발견하고 싶은 것을 <논어>에 마음껏 투사한다. “살아 있는 고전의 지혜”라는 상투어를 남발하면서. 여기 지혜가 살아 숨쉬고 있어요! 상하기 전에 빨리 한 권 사서 집에 가져가세요! 당신이 당면한 문제를 살아 있는 고전이 해결해 줄 겁니다!

그러나 <논어>에 담긴 생각은 이미 죽었다. <논어>의 언명은 수천년 전에 발화된 것들이고, 그 발화자와 청중들은 오래전에 죽었으며, 그 언명에 원래 의미를 부여하던 맥락들 역시 역사적 조건이 변화하면서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러한 <논어>의 내용을 살아 있는 고전의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논어>와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오랜 시간과 맥락의 간극을 무시하는 일이다. 과거의 고전을 사랑하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와 연애를 하는 일과는 다르다. 죽은 것을, 죽었기에 사랑하는 지적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지켜야 할 사랑의 규약이 있다.

먼저 인간이 시간의 수인(囚人)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적 환경 속으로 내던져지기에 그 변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인간의 조건이 있다면 적어도 그 조건에 관한 한 인간은 시간을 초월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야말로 변치 않는 인간의 조건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제 어디에서 살든 먹고 마시고 배설한다. 혹은 집단을 이루어 산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 조건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또는 인간은 현재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늘 보다 나은 상태를 꿈꾼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 조건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각자 염두에 두는 인간 조건이 무엇이든 고전이 시공을 초월해서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 불변의 인간 조건이 만드는 근본문제에 대해 발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록 과거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고전에 담긴 생각은 무의미한 시체가 아니다. 인간의 조건이 변치 않는 한, 근본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고전의 가치 역시 변치 않는다. 그런데 과연 인간에게 그토록 변치 않는 근본문제가 있는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같은 생물학적 종으로 일정한 조건을 공유하는 한 근본문제는 있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근본문제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언젠가는 근본문제이기를 그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신(神)의 섭리를 해석하는 문제를 근본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의학이 혁신적으로 발전한 어떤 미래에는 인간의 생로병사 역시 근본문제이기를 그칠지 모른다. 컴퓨터의 발달은 인간에게 가장 적절한 공동생활의 형태가 무엇인지, 권위의 근원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종식시킬지도 모른다.

새로운 상상의 지평을 열어주는 서먹함

근본적이든 아니든 인간에게 문제는 늘 있다. 그것이야말로 근본문제다. 그렇다면 변치 않는 근본문제의 유무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에 대한 답이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지적 네크로필리아들이 전제하는 것은 어떤 특정 고전이 인간이 가진 근본문제에 대해 확고하고도 결정적인 답을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고전이 결정적인 해답을 정말 줄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 문제는 오래전에 해결되어 더 이상 인간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고전은 변치 않는 근본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제공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문제에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과 자극을 주기에 유의미하다. 그래서 하나의 고전을 성전으로 만드는 대신 지적 네크로필리아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다양한 양질의 자극을 찾아서 오늘도 역사의 바다로 뛰어든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의 근본문제는 일거에 대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혈압이나 피부 트러블처럼 평생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할 인생의 동반자이다. 어제 맛있는 케이크를 먹음으로써 인생의 허무라는 근본문제를 해결한 것 같았어도, 오늘 다시 배가 고파지면 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인생의 허무란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보다 맛있는 케이크를 찾아 오늘도 새로 문을 연 제과점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다.

변치 않는 인간의 근본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고전에 대해 또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즉 <논어>와 같은 텍스트가 어떤 근본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일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존재했던 특수한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맥락과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논어>에 담긴 생각은 죽은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죽은 생각의 시체가 오늘날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상사의 역설은 어떤 생각이 과거에 죽었다는 사실을 냉정히 인정함을 통해 비로소 무엇인가 그 무덤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이 죽어 묻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생각의 무덤을 우리는 텍스트(text)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텍스트가 죽어 묻히는 자리는 어디인가? 텍스트의 무덤을 우리는 콘텍스트(context)라고 부른다. 콘텍스트란 어떤 텍스트를 그 일부로 포함하되, 그 일부를 넘어서 있는 상대적으로 넓고 깊은 의미의 공간이다. 죽은 생각이 텍스트에서 부활하는 모습을 보려면 콘텍스트를 찾아야 한다. 즉 과거에 이미 죽은 생각은 <논어>라는 텍스트에 묻혀 있고, 그 텍스트의 위상을 알려면 <논어>의 언명이 존재했던 과거의 역사적 조건과 담론의 장이라는 보다 넓은 콘텍스트로 나아가야 한다. 공들여 역사적 콘텍스트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을 때에야 비로소 고전 속에 죽어 있는 생각들은, “죽은 연인의 흰 목을/ 마지막으로 만질 때처럼/ 서먹하게”(진은영, ‘불안의 형태’) 온다. 고전이 담고 있는 생각은 현대의 맥락과는 사뭇 다른 토양에서 자라난 것이기에 서먹하고, 그 서먹함이야말로 우리를 타성의 늪으로부터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상상의 지평을 열어준다.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생각의 시체가 주는 이 서먹함을 즐기기 위해서는 서둘러 고전의 메시지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하지 말고, 그 목적지에 이르는 콘텍스트의 경관을 꼼꼼히 감상해야 한다.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려고 달리는 동안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놓쳐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경주가 끝날 때쯤엔 자기가 너무 늙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고전의 메시지에 빨리 도달하려고 서두르는 동안 콘텍스트가 주는 다채로운 경치는 모두 놓치게 되고, 경주 끝에 얻은 만병통치약은 사이비 건강보조식품으로 판명된다. 대신 콘텍스트가 주는 경관을 주시하며 생각의 무덤 사이를 헤매다 보면 인간의 근본문제와 고투했던 과거의 흔적이 역사적 맥락이라는 매개를 거쳐 서먹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오래전 죽었던 생각이 부활하는 사상사적 모멘트이다.

고전의 지혜가 우리가 현대에 당면한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논어>를 왜 읽는가? 고전을 왜 읽는가? 실로 고전 텍스트를 읽는다고 해서 노화를 막거나, 우울증을 해결하거나, 요로결석을 치유하거나, 서구문명의 병폐를 극복하거나, 21세기 한국 정치의 대답을 찾거나, 환경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대인의 소외를 극복하거나,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길은 없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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