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함성을 들어라

2017. 9. 2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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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② 텍스트 '정밀 독해'

[한겨레]

침묵이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심각한 해석을 요청하는 강력한 발화가 될 수 있다. 침묵이 강력한 발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려면,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지난 5월17일 서울 서초동 지하철2호선 강남역 주변에서 열린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주기 추모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침묵행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내 주변의 학자 한 분은 평생 배우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뿐 아니라 어지간한 일에는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기에, 그는 마치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텍스트를 읽을 때 보여주는 열정과 통찰력은 놀랍다. 어떻게 하면 그의 텍스트 독해 능력을 강의실의 학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공자는 말하거나 혹은 침묵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명시적으로 자신은 특정 사안에 대해
침묵하고자 함을 표명한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논어> 텍스트 전체는 발화한 것,
침묵한 것, 침묵하겠다고 발화한 것
이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텍스트를 정밀하게 독해(close reading)하려면 기본적인 문해력 이상의 능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알아보게끔 문장의 양지에 드러나 있는 의미뿐 아니라 문장의 음지에 숨어 있는 의미까지 포착하려면 남다른 집중력과 훈련된 감식안이 필요하다. 이 정밀 독해의 방법이 가진 문제는, 양적 자료를 다루는 방법과 달리 일정한 절차로 정식화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예컨대 사회연결망 분석처럼 양적 데이터를 다루는 연구는 자료를 어떻게 가공한 뒤, 어떤 단계를 거쳐, 어떤 소프트웨어에 구동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식으로 절차를 정식화할 수 있다. 반면, 텍스트 정밀 독해의 관건은 정식화된 절차를 적용할 줄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독해를 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마치 깊은 울림을 주는 회화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공식화된 붓놀림의 절차를 밟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런 회화를 그릴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텍스트를 잘 읽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종의 “동어반복”이 텍스트 정밀 독해 방법의 핵심을 이룬다.

텍스트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려면

따라서 텍스트 정밀 독해를 익히는 과정은 컴퓨터 소프트웨어 구동 방법을 익히는 일과는 다르다. 텍스트 정밀 독해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정식화된 절차를 외우는 대신, 상대적으로 더 훈련된 감수성을 가진 독해자를 만나 그와 더불어 상당 기간 동안 함께 텍스트를 읽어나가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수성을 열고 단련해야 한다. 학생이 아무리 텍스트를 들여다보아도 별다른 의미를 찾아낼 수 없어 난감해할 때, 선생은 그 학생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듣고 나서는 쉽게 거부할 수 없는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좀 전에 느꼈던 난감함은 텍스트를 좀 더 섬세하게 읽을 수 있는 감수성으로 발전할 것이다.

얼어붙은 감수성이란 마이크로웨이브에 넣어서 후다닥 해동시킬 수 있는 냉동식품이 아니다. 따라서 텍스트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는 배움의 과정은 종종 더디고 괴롭다. 그래서 학생은 호소한다. 이렇게까지 힘든 일인가요,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이? 아무리 되풀이해서 읽어도 별생각이 안 나요! 이 텍스트 안에 뭔가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있긴 있겠죠, 하지만 제 눈에는 그 메시지가 보이지 않아요, 문법이나 단어를 다 알고 있어도요. 어떻게 숨어 있는 텍스트의 의미를 간파해낼 수 있죠? 그러나 정식화된 절차로 이루어진 방법론은 없기에 학생을 만족시킬 수 없다. 난감해진 선생은 이렇게 학생을 달래보는 거다. 우리는 양적 자료를 분석하는 이들과는 다르네. 우리의 방법론은 “정신집중”이지.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거야. 자, 정신집중.

이때 상당수의 학생들이 문득 구식 학문의 어둡고 축축한 폐허에 혼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뭐? 이 분야의 방법론은 정신집중이라고? 학생들은 주섬주섬 짐을 싸서 좀 더 손에 잡히는 배움을 얻을 수 있는 분야로 떠나려 할 것이다. 잠깐! 선생은 부랴부랴 학생을 붙잡는다. 이 분야가 완전히 망해버리면 안 되는데…. 당황한 선생은 부랴부랴 정신집중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조언을 하려 든다. 잘 씻고, 좋은 영양 상태를 유지하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비타민C도 챙겨 먹어 봐요. 건강해야 텍스트 독해도 잘되는 법이죠. 이 말을 들은 학생은 이제 짐조차 팽개친 채 1초라도 빨리 이 구식 학문의 폐허를 떠나버리려고 든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내 짧은 인생은 소중하니까.

침묵이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다

학생은 떠났겠지만, 선생이 아주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중년에 이른 많은 학자들은 알게 된다. 젊은 시절의 폭음과 방탕함이 결국 이제 와서 자기 학문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체력이 달려 정신을 집중할 수 없는 자신에게 한탄을 거듭하는 한밤중.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 보면, 라면과 소주로 하릴없는 나날을 보내던 젊은 날의 자신이 거기 서 있다. 영양이 부실하여 초가을 추위에도 부들부들 떨면서 망연한 모습으로 거기 서 있다. 전 당신이 내팽개쳤던 젊은 날 당신의 육체예요. 평생 공부하는 삶을 살 거였으면서 왜 젊은 날 그렇게 날 학대했죠? 양질의 고기 한 점 입안에 안 넣어주고….

그러나 이것은 노쇠해가는 학자의 한탄일 뿐. 당장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텍스트 읽기에 몰두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는 정신집중 구호 이상의 조언이 필요하다. 바로 이때, 침묵도 일종의 발화로 간주하며 텍스트를 읽어보라고 조언할 수 있다. 이 문장들은 도대체 뭘 말하고 있는 거지, 라며 문장의 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던 학생을 불러 세우고, 엄숙하게 말하는 거다. 이 텍스트는 무엇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것인지, 왜 그에 대해서 꾸준히 일관되게 함구하는 것인지, 라고 물어볼 필요도 있어요, 침묵과 공백을 단지 발화의 결여로만 간주하지 마세요. 그래야 문장들 간의 사이를 무심코 지나치지 않을 수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침묵이 강력한 발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려면,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마치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식스 센스>의 마지막 반전처럼.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동생이기도 한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 소설 <나사의 회전>에서 시점의 이동을 통해 사태를 완전히 새로 볼 수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소설 후반부에서 더 분명해지는 시점의 이동을 예고라도 하듯, 헨리 제임스는 <나사의 회전> 중반부에서 침묵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입심 좋게 여느 때보다 더욱 많이 지껄였고, 그러다 보면 우리 사이에 뭔가 거대하고 뚜렷한 침묵이 생겨났다. 이 침묵을 달리 부를 방도가 없다. 그건 이 순간 우리가 낼지도 모를 어떤 소리와도 무관하게 고조되는 환희이거나 활기찬 낭독일까, 아니면 더욱 힘찬 피아노 연주 따위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정적일까.”

그렇다. 침묵이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낭독이자, 들을 수 있는 정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침묵을 듣기 위해서는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는 나비 꿈을 꾸는 장주(莊周)인가, 아니면 장주 꿈을 꾸는 나비인가, 라고 묻는 호접몽처럼, 침묵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 저렇게 요설을 쏟아내는 것인가, 아니면 요설을 계속하기 위해서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일까. 전자라면, 텍스트의 주인공은 더 이상 요설이 아니라 잠시 기다렸다가 찾아오는 침묵이 아닐까.

이처럼 관점을 바꿀 수 있게 되면, 이제껏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집중했던 학생은 텍스트가 무엇에 대해 “구태여” 침묵하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좀 더 예민한 독해자가 된다. 그리고 그 예민함은 앞에 놓인 <논어>의 이해를 넘어 자신의 연애생활에까지 그 감수성의 촉을 뻗치게 된다. 그는 마침 연애 중이어서, 상대의 말 한마디 한마디, 연애편지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정신을 집중하고 그 의미를 캐고 있던 참이었다. 침묵도 일종의 발화임을 깨달은 그는 문득 깨닫게 된다. 왜 내 연인은 지난 2년 연애하는 동안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지? 왜 사랑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침묵했지? 어떤 사안에 대한 집요한 침묵이 있었다고 할 때, 혹은 발화가 예상되는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침묵이 흘렀다고 할 때, 그 침묵은 단순한 발화의 휴지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심각한 해석을 요청하는 심오한 “발화”가 되는 것이다.

‘언젠가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문득 깨어 보니 틀림없는 자신이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나비의 꿈을 소재로 중국 명나라 화가 육치가 그린 ‘호접몽’.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말하지 않고자 한다”

리오 스트라우스의 추종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종종 침묵의 의미에 대해 주목했다. 특히 주목한 것은, 박해가 두려워서 침묵한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순간, 그 발화로 인해 이익이 침해당하는 사람,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 시샘을 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못남을 증명할 의무라도 있는 듯 그 발화자를 박해하려 든다. 특히 그 발화에 담긴 메시지가 기존 질서와 관행을 뿌리째 전복할 수 있을 정도로 불온한 것일수록 박해의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때로는 독배가, 때로는 잘린 말대가리가 소포로 전달된다. 그리하여 발화자는 침묵한다. 그러나 끝내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비범한 사상가라면 발화가 아닌 침묵의 방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안다. 자신의 말뜻을 이해해줄 사람을 기다리며, 관점을 이동시킬 수 있는 예민한 독해자만 알아보도록, 자신의 진의를 텍스트 어딘가에 침묵의 형태로, 혹은 모호한 표현의 형태로 매설해 놓는 것이다. 후대의 누군가 그 텍스트 위를 지나가며 전두엽이 폭발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이 침묵을 매질(媒質)로 삼은 메시지는 그에 걸맞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독해자를 요청한다. 이것은 <논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논어>에서 공자는 말하거나 혹은 침묵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명시적으로 자신은 특정 사안에 대해 침묵하고자 함을 표명한다: “나는 말하지 않고자 한다.”(予欲無言, <논어> ‘양화’(陽貨) 편)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논어> 텍스트 전체는 발화한 것, 침묵한 것, 침묵하겠다고 발화한 것, 이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분류를 염두에 두고, 독해자는 의도된 침묵마저 읽어낼 자세를 가지고 <논어>를 탐사해 나가야 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으므로, 왜 특정 사안에 대해서 침묵했는지 그들에게 직접 물어볼 수 없다. 아마 살아 있다고 한들 자신이 공들여 지켜낸 침묵에 대해 설명해줄 리가 있을까. 자신들이 직조한 침묵과 요설의 간극을 즐기라고만 하지 않을까. 그래서 후대의 해석 작업은 더 어려워지고, 어려워진 만큼 흥미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서두에서 이야기한 학자는 아직 내 주변에 있으므로, 나는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왜 평생 배우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셨죠? 왜 사랑에 대해 침묵했나요? 어떤 박해가 두려웠나요? 고요히 술에 취해 있던 그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사랑은 너무 중요한 단어이기에 쉽게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서 침묵했다고.

김영민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 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영문 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이 연재물은 정밀 독해, 역사적 맥락, 정치이론을 결합하는 관점에서 <논어>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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