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건도 서라벌 동궁 수세식 변기 썼다

강호원 2017. 10. 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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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건도 서라벌 수세식 변기 썼다 - <화려한 신라문화 안팎> / 경주 동궁에 수십 일 머문 왕건 /동궁에서 발견된 수세식 변기 /문화 극성의 기반은 '부유한 신라'/서라벌에 넘친 사치품.. '사치와의 전쟁' 벌여

1200년 전 신라의 수세식 화장실이 발굴됐다. 경주 동궁(東宮) 지역에서 나왔다. 화강암으로 만든 변기는 지금의 좌식 수세식 변기와 똑같다. 일을 본 뒤에는 물을 부어 오물을 땅속 경사진 도수로로 흘려보냈다고 한다. 대발견이다. 통일신라 문화가 얼마나 극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문화는 어떠했을까.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금관. 어느 나라 왕관보다 화려하다. 수세식 화장실은 당시의 화려한 문화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작은 증거일 뿐이다.

◆ 수세식 변기를 쓴 서라벌 귀족

수세식 변기를 쓴 주인공은 누구일까. 왕족들이 주로 썼을 것은 두말 할 나위없다. 왕족만 썼을까. 귀족들도 썼을 가능성이 크다. 왜 그럴까. 통일신라 시대는 순수한 왕족만의 혈통인 성골의 맥이 끊어지고, 진골이 왕족을 이루는 귀족사회였던 만큼 왕과 진골 귀족의 차이는 크지 않다.

동궁의 수세식 변기를 썼을 또 한 사람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5년(서기 931년)의 일이다. 왕건은 기병 50기를 거느리고 신라의 왕경(王京)인 서라벌로 갔다. 경순왕은 왕건을 맞아 큰 잔치를 벌였다. 잔치를 연 곳은 동궁의 임해전이다. 수세식 변기가 발견된 곳이다.

그때 역사의 한 장면. 주연이 무르익자 경순왕은 펑펑 울었다. 좌우 신하치고 목메어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왕건도 울었다. 왜 울었을까. 천년 사직이 문을 닫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전 왕경을 급습한 후백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와 비첩들을 겁탈까지 했으니 그로 인한 설움이 터졌을 터다. 왕건은 그곳에서 수십 일을 머물렀다.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 부가 쌓인 통일신라

수세식 화장실까지 만든 신라. 그 저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경제적인 부를 축적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삼국사기 곳곳에는 신라에 쌓인 부를 말해 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헌강왕 6년, 880년 9월의 일이다. 왕이 월상루에 올랐다. 사면을 바라보니 민가가 즐비하고 가락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왕이 물었다. “지금 민간에서는 집을 짚으로 잇지 않고 기와로 덮고, 밥은 나무를 때지 않고 숯으로 짓는다고 하니 사실이냐.” 시중인 민공(敏恭)은 이렇게 답했다. “신도 그런 줄 아옵니다.”

기와집이 즐비한 서라벌. 숯으로 밥을 지어 먹은 사람은 누구일까. 일반 서인(庶人)이 그랬을 리는 만무하다. 왕이 묻는 말에 신하가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자면 서라벌에 살았던 신라의 귀족은 숯으로 밥을 지어 먹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부유한 신라를 방증하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2년 뒤인 헌강왕 8년 4월의 일이다. 일본 국왕은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明珠·야명주) 10개를 바쳤다. 통일신라 이전만 해도 그런 일은 없었다. 왜구는 수시로 신라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때는 달랐다.

황금 300냥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이때로부터 10년 전인 경문왕 9년, 869년 당에 사신을 보낸 신라는 부금(麩金) 100냥을 예물로 바쳤다. 부금은 금가루다. 사신의 예물로 황금 300냥을 보낸 일본, 부금 100냥을 보낸 신라. 상대를 가변게 여겨지 않는 정도는 금의 양에서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신라가 강성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그렇게 많은 황금을 갖다 바칠 리는 만무하다.

◆ 강성한 신라를 말해주는 장보고

그즈음 신라는 당·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했다. 장보고가 활약한 때는 일본이 황금을 바친 직전 시대다.

흥덕왕 3년, 828년 4월 삼국사기의 기록. “청해대사 궁복은 당의 서주(徐州·중국 강소성 지역)에 건너가 소장(小將)으로 있었다. 후에 귀국에 왕에게 아뢰어 병졸 1만명으로써 청해(완도)에 진(鎭)을 열어 지켰다.”

궁복(弓福)은 장보고의 이름이다. 한자 이름 장보고(張保皐)의 ‘장’은 원래 이름인 궁(弓)을 표시한 것이며, ‘보고’ 앞 자인 ‘보’와 뒤의 자 ‘고’의 ‘ㄱ’을 합쳐 ‘복’을 표기한 것이라고도 한다. 역사학자 이병도도 그렇게 설명한다. 장보고는 이두식 한자다. 그런 까닭에 장보고라고 쓰고 궁복으로 읽었을 수 있다고 한다.

장보고의 명성은 일본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청해진을 연 지 10년 뒤인 838년, 일본의 치쿠젠(筑前·축전) 태자는 당으로 가는 일본 승려 원인(圓仁)에게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원인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편지는 장보고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주목되는 것은 1만 수군이다. 전쟁의 시기를 제외하면 고대시대에 이렇게 많은 수군이 한 곳에 집결해 있던 예는 드물다. 이들이 활동을 하자면 수백 척의 함선이 청해진을 근거로 활동했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청해진 수군은 어떻게 구축될 수 있었을까. 신라의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청해진 세력이 있었기에 신라에는 더 많은 부가 쌓였을 것은 아닐까. 일본이 황금 300냥을 갖다 바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 신라에 넘친 외래 사치품

화려한 서라벌에 관한 기록은 또 있다. 흥덕왕 9년, 834년의 일이다. 왕은 이런 하교를 내렸다.

“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는 존비가 있어 명칭과 법식이 같지 않고 의복이 같지 않다. 그런데 풍속이 점점 각박해져 백성은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진귀한 외래품만 숭상하고 토산품을 야비한 것으로 여겨 싫어하니, 예절은 참람해지고 풍속은 무너지기에 이르렀다.”

사치가 얼마나 심했기에 이런 하교를 내린 걸까. 그즈음 골품에 따라 옷과 수레, 집을 제한하는 제도를 보면 사치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진골 여인의 옷은… 금은실과 공작꼬리(孔雀尾), 비취모(翡翠毛)의 사용을 금한다. 빗은 슬슬전(瑟瑟鈿)과 대모(玳瑁)의 사용을 금한다.”

공작과 비취는 동남아에 사는 새다. 비취는 캄보디아에 많은 물총새다. 슬슬은 신·구당서에 나오는 석국(石國)으로, 중앙아시아 타시켄트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슬슬전은 타시켄트 지역에서 나는 벽옥(碧玉)으로 만든 빗이다. 이들 외래 사치품을 금한 것은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그만큼 많은 사람이 사용했다는 뜻이다.

수레는 어땠을까.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진골이 사용하는 수레 재목으로는 자단(紫檀), 침향(沈香)을 쓰는 것을 금하고, 금은과 옥으로 장식하는 것도 금한다.”

자단과 침향은 자바, 수마트라, 스리랑카 등지에서 나는 재목이다. 흔한 소나무를 쓰지 않고, 남방에서 나는 나무를 들여와 수레를 만든 것이다. 수레를 금은과 옥으로 장식했으니 사치가 얼마나 극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진골만 사치를 부린 것도 아니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진골뿐아니라 6두품, 5두품, 심지어 4두품에도 세세한 금지 품목이 나열되어 있다. 그렇다고 검소한 생활로 돌아갔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통일신라 후기로 접어들면서 왕권은 약해졌다. 귀족 세력이 툭하면 왕을 바꿨다. 귀족의 힘이 왕권을 능가했으니 왕명이 통할 리 만무하다.

사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있어야 사치도 가능하다. 서라벌에 넘친 사치 풍조는 신라에 부가 쌓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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