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불태운 것은 왜군이 아니라 조선 백성이었다

배한철 2017. 10. 10.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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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27] 1395년 완공돼 200년간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혼란기에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아직까지도 많은 국민은 서울을 점령한 왜병들이 경복궁을 불태운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선조 때 문신 이기는 우리 백성이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고 명백히 진술한다. 이기는 "피란 가는 임금의 수레가 성문을 막 나섰고 왜적은 도성에 들어오기도 전에 성안 사람들은 궐 내에 다투어 들어가서 임금의 재물을 넣어두던 창고를 탈취했다. 그로도 모자라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 세 궁궐과 6부, 크고 작은 관청에 일시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 한 달이 넘도록 화재가 이어졌다"며 "백성들의 마음은 흉적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다"고 참담함을 전했다.

이기가 쓴 '송와잡설'이 말하는 경복궁 방화의 주범은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다. 책은 기자조선에서 조선 선조 연간에 이르는 시기의 일 가운데 저자가 듣고 본 것을 총 130여 장에 걸쳐 차례 없이 뒤섞어서 기록한 시화잡록집이다.

경복궁 광화문 전경. 임진왜란 때 왜군이 방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 백성들이 불태웠다.
임금이 도망가고 없는 도성은 그야말로 엄격한 신분제에 억눌려 살아야만 했던 조선 백성의 해방구였다. 모두들 흉악무도한 왜군을 피해 피란을 갔을 것 같지만 서울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하급 관리였던 성세령, 성세강은 피란 가지 않고 왜군에게 항복했다. 성세령은 손녀를 왜장에게 줘 귀여움을 받은 덕에 그들이 살던 동네 전체가 편안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삼의사(의료기관 3곳)와 각 관청의 아천 등도 앞다퉈 왜병에 귀순했다. 심지어 이들이 무사한 것을 보고 피란을 갔던 종친들과 사족들 중에서도 다시 성안으로 들어간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시장은 평소처럼 열렸고 물자도 정상적으로 교역됐다. 백성들은 서울에 들어온 왜병들과 술판을 벌였고 서로 왕래하면서 도박을 하기까지 했다.
임진왜란 때는 장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천민들도 과거를 통해 장군이 됐다. 김응서도 천민 출신이었지만 전쟁에서 공을 세워 벼슬이 병마절도사에 이르렀으며 사후 우의정에 추증됐다.
임진왜란은 조선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을 통해 신분 상승의 기회를 거머쥔 것도 임진왜란의 이면이라 하겠다. 전쟁 때는 용기 있고 재주 많은 무인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마련이다.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간 후 관서와 황해도에서는 무장을 충원하기 위해 해마다 무과를 실시했다. 왜란 발발 이듬해 임금의 수레가 도성으로 돌아온 뒤부터 5년 동안 대과도 여러 차례 시행했는데 구술시험은커녕 화살 하나만 맞혀도 합격시켰다. 합격자를 발표한 날 짚신 차림에 어사화를 꽂고 합격증을 들고 가는 자가 허다했다. 왜란 이래로 과거를 통과한 이가 수만 명으로 그중에는 사족, 한량은 말할 것도 없고 서얼, 천인, 백정 따위도 참여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들은 글자 한 자도 모르는 자들이 많았고 더욱이 거의 모두가 활도 당기지 못했다. 저자는 "뽑은 사람이 많을수록 장수 재목은 더욱 모자랐다. 이들로 굳세고 사나운 적을 막으려고 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다고 할 것인가"라고 했다.

고려 왕씨는 용의 자손이어서 아무리 못난 자손과 먼 후손이라도 몸 어딘가에 반드시 비늘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는 우왕(1365~1389)을 공민왕의 혈통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누명을 덮어씌워 강릉으로 유배 보낸 뒤 사람을 보내 살해했다. 우왕은 자신의 왼쪽 어깨 위에 바둑돌만 한 비늘이 있었지만 항상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목숨을 잃던 날 사람들에게 비로소 어깨를 보여주면서 "내가 지금 비늘을 보여주지 않고 죽으면 내가 신씨 성이 아닌 줄 너희가 어찌 알겠느냐"고 꾸짖었다. 저자는 이 일이 비록 역사에는 기록돼 있지 않으나 강릉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 얘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세조의 핵심 공신인 홍윤성(1425~1475)은 성질이 사나워 사람들을 능멸했으며 제 성미에 맞지 않으면 아무나 예사로 죽였다. 세조가 그의 공을 높게 사 처벌하지 않자 더욱 기고만장해 조정에서도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임영대군(세종대왕의 넷째아들)의 아들 오성군 이주(1437~1490)도 한 성격하는 인물이었다. 그 역시 세종 때 궁중에서 자랐으며 세조에게도 친아들과 다름없는 총애를 받았다. 그런 오성군의 눈에 권세를 남용하는 홍윤성이 예쁘게 보일 리 만무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홍윤성이 수레를 몰아 대궐로 오는 것을 보고 멀찌감치 앞쪽에서 짚자리를 깔고 그 위에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홍윤성은 오성군을 보고 마지못해 수레에서 내려 손을 마주 잡고 인사했다. 홍윤성은 수레를 타지 못하고 한참을 걸어서 지나가는데 가죽신이 진흙 수렁에 빠지고 옷도 다 더러워졌다. 가슴을 졸이며 그 장면을 쳐다보던 사람들은 홍윤성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하는 것에 통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단종 무덤인 영월 장릉. 단종은 살해된 후 시신이 행방불명됐다. 지금의 단종릉은 가짜 무덤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면 영흥리에 단종릉(장릉)이 조성돼 있지만 사실 시체가 없는 가짜 무덤이다. 단종은 작은아버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 갔다.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들이 세조를 죽이려다 실패한 뒤 금부도사가 단종을 처형하기 위해 급파됐다. 단종은 매일 아침 대청에 나와 곤룡포를 입고 걸상에 걸터앉아 있어 사람들이 공경했다. 금부도사가 이를 보고는 겁을 내 감히 손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형 집행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상부의 질책이 있을 것을 우려해 긴 끈을 단종의 목에 묶고 창을 통해 잡아당겨 결국 목졸라 죽였다.

단종이 죽자 염습도 하지 않고 관도 없이 그냥 시체를 짚으로 덮어놓았다. 그런데 젊은 승려가 와서는 밤에 시체를 지고 도망쳐버렸다. 어떤 사람은 승려가 산골짜기에서 태워버렸다고 하고, 어떤 이는 강물에 던져버렸다고 했지만 김종직에 의하면 후자가 그럴 듯하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따라서 단종 무덤은 거짓으로 장사한 것일 뿐이다. "세조의 일당들이 지휘한 일로 단종의 혼은 지금도 의지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닐 것이니 진실로 애달프다"고 저자는 슬퍼했다.

사육신 중 한 사람인 하위지가 처형되고 나서 그 가족들도 다른 사육신 가족들처럼 연좌법이 적용돼 죽거나 노비가 됐다. 당시 하위지의 가족들은 하위지의 고향인 구미 선산에 있었다. 조정에서 금부도사가 내려오자 큰아들 하호는 땅에 엎드려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둘째아들 하박은 나이가 스무 살도 채 못되었는데도 두려워하는 빛이 전혀 없이 도사에게 "모친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하니 형 집행을 잠시만 늦춰달라"고 말하고는 모친 앞에 꿇어앉아 "아버님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자식으로서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천한종이 되더라도 개돼지 같은 행실은 하지 말게 하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두 번 절하고 나와 형과 함께 형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며 칭송했다.

세조의 편에 섰던 신숙주 가문은 번성했다. 신숙주의 둘째아들 신면은 젊은 나이에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1467년 이시애의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대청 위 작은 다락방으로 다급히 대피했다. 적군들이 관찰사를 찾지 못하고 돌아가려던 차에 한 아전이 신면이 숨은 곳을 알려줘 발각되고 죽임을 당했다. 신면이 피살됐을 때 다섯 살에 불과했던 그의 아들 신용개(1463~1519)는 할아버지 신숙주 슬하에서 컸다. 성장하면서 그는 꼭 아버지 원수를 갚으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함길도에 가서 아버지를 고발한 아전의 얼굴 모습과 성명을 자세히 파악해뒀다. 1488년 별시문과에 병과(3등급 중 3등급)로 급제해 정4품의 벼슬을 하고 있던 신용개는 그 아전이 서울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친구와 함께 도끼를 들고 아전이 묵고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친구를 시켜 불러낸 뒤 신용개는 뒤에서 도끼로 원수를 찍어 죽였다. 이 살인 사건은 목격자가 없어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신용개는 그 뒤 벼슬이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사서는 기품이 높고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했다고 사서는 기록한다.

성희안(1461~1513)은 박원종, 유순정과 함께 '중종반정의 3대장'으로 불렸다. 연산군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는 것을 훈계하다가 말단직으로 좌천됐다. 거사 후 1등 공신이 됐지만 공을 박원종과 유순정에게 양보했다. 벼슬이 병조판서, 좌·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큰 오점을 남겼다. 연산군의 후궁을 첩으로 달라고 해 데리고 살았던 것이다. 저자는 "섬기던 임금의 후궁을 첩으로 삼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성희안의 공이 작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지은 죄는 천지에 가득하다"고 비판했다.

중종대 권신인 김안로는 뇌물을 많이 받아 악명 높았다. 김안로가 정승에 있을 때 황침은 충청병사가 되어 인사치레로 참깨 20말을 보냈다. 그 후 임기를 마치고 새벽 일찍 김안로 집에 가서 인사를 청하는데 김안로는 대꾸조차 없었다. 황침은 들어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한 채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어야만 했다.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 임천손이 충청수사를 마치고 인사를 하러 왔다. 기별을 넣자 김안로가 바로 나타나 정답게 환한 얼굴로 반겼다. 반면 황침을 향해서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쌀쌀하게 대했다. 황침은 임천손에게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임천손은 "내가 수영에 있을 때 김 정승이 혼숫감을 요구하기에 큰 배를 만들어 혼수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을 구입해 가득 실어 배째로 보냈다"고 귀띔했다. 황침은 참깨 스무 말을 바다에 던졌으니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유난히 잔병치레가 잦았던 중종(1488~1544)은 왕이 되기 전부터 몸이 허약했다. 왕자(진성대군) 시절 서울 근처 고을에서 병 치료를 위해 요양을 했다. 시골 사람 하나가 거의 열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문 앞으로 지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던 중 그 사람은 비를 만나 중종이 요양 중인 집 안으로 들어왔다. 중종은 무슨 일로 그렇게 부지런히 오가는가 물었다. 그는 "이 고을에 사는 이조 서리가 나에게 훈도(정9품 벼슬)를 시켜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계속 가서 정성을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중종은 "내가 이조 참의(정3품)를 알고 있네. 이 편지를 그에게 주면 소원대로 자리를 얻을 것이니 다시는 고생을 안 해도 될걸세"라고 했다. 그는 편지는 받아갔으나 편지를 준 사람의 신분을 몰라 속으로는 "별 싱거운 사람 다 본다"고 중얼거렸다. 중종은 편지를 건넨 뒤 얼마 뒤 왕좌에 올랐다. 한참 뒤 벼슬을 받지 못한 시골 사람은 반신반의로 이조참의를 찾아가 편지를 전달했다. 편지에는 "이 사람이 말하는 바대로 시행하라"는 내용과 함께 진성대군의 수결(사인)이 적혀 있었다. 깜짝 놀란 이조참의는 대궐에 들어가 아뢰니 중종은 "내가 쓴 것이 맞는다"며 특명을 내려 원하는 벼슬을 줬다.

▶이기(1522~1600)=본관은 한산이며 호는 송와(松窩)이다.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을과(3등급 중 2등급)로 급제했다.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순화군 이보를 보필했다. 전쟁 중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정2품 지돈녕부사를 지내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말을 제대로 먹이지 못해 땅에 주저앉을 만큼 가난했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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