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어떤 침묵이란 말인가

2017. 10. 2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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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③ 침묵과 생략, 비틀기

17세기 영국 철학자 존 로크. 로크는 <통치에 관한 두 논고>에서 영국 전래의 헌정질서에 따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논변을 전혀 펼치지 않았다. 로크가 그런 관행에 대해 철저히 ‘침묵’함을 통해 그 관행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키피디아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 죽겠다고 칭얼댈 때, 진정 배고파 죽을 지경인 사람은 조용히 널브러져 있다. 배고프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말을 할 정도의 기력은 남아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고 광광댈 때, 진정한 염세주의자는 이미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고 푸념하는 사람은, 푸념할 만큼은 세상에 대해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침묵을 선언할 때, 진짜 침묵하는 사람은 침묵하겠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있다. 침묵을 선언하는 사람은, 선언하는 만큼 침묵하지 않는 셈이다. 공자는 <논어> ‘양화’(陽貨)편에서 자신은 특정 사안에 대해 침묵하겠다고 선언한다. “나는 말하지 않고자 한다.”(予欲無言) 진정 아예 침묵하고 싶었다면, 공자는 침묵하겠다는 의사표명 같은 건 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공자가 침묵하겠다는 내색조차 없이 아예 침묵해버린 사안이 있을는지 모른다. <논어>가 제법 긴 글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글의 흐름과 리듬을 탐색하다가 어느 부분에서인가 공자가 침묵하거나 말을 삼가고 있는 기미를 알아차릴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어> 텍스트는 대개 간결한 언명이나 대화로 분절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가 다짜고짜 침묵한 사안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고 있었던 사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 당시 관행이 되다시피 흔해져버린 발화의 주제와 방식을 알아야, 누군가 그에 대해 각별히 침묵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관행을 알기 위해서는 목전에 놓인 텍스트를 넘어 보다 넓은 콘텍스트로 나아가야 한다.

누구의 해석이 옳든
텍스트의 의미는 그 텍스트의 저자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다 어떤 텍스트가 저자의 입과 손을 떠나
공적인 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의미는 정치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20대 초에 자신이 속한 가족과 교회, 국가를 버리고 이질적 문화들이 뒤섞여 있던 트리에스테(현재 이탈리아 북동부의 소도시)로 망명한 뒤, 스위스 취리히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는 등 평생 해외를 떠돌며 국제주의자 또는 무정부주의자의 삶을 살았다. 1915년 취리히 체류 시절의 제임스 조이스. 위키피디아

침묵을 통해 관행을 무시한 로크

리오 스트라우스의 혹독한 비판자였던 퀜틴 스키너에 따르면, 존 로크의 명저 <통치에 관한 두 논고>(Two treatises of government)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로크가 영국 전래의 헌정질서에 따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논변을 전혀 펼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로크의 그러한 “침묵”을 이해하려면 당시 사람들은 어떤 주장을 펼칠 때 전래의 헌정질서에 호소하는 관행을 따르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로크가 그런 관행에 대해 철저히 “침묵”함을 통해 그 관행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로크의 침묵을 이해하려면, 로크의 해당 저작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당대의 언어적 콘텍스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콘텍스트에 기반한 이러한 독해는, 침묵뿐 아니라 침묵에 가까운 “생략”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퀜틴 스키너는 에드워드 모건(E. M.) 포스터의 소설 <인도로 가는 길>을 예로 든다. <인도로 가는 길>은 “Weybridge, 1923”라는 간명한 두 단어로 끝난다. 이 두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복잡한 문법이 필요하지는 않다. 포스터는 그저 <인도로 가는 길>을 1923년에 (런던 교외에 있는) 웨이브리지라는 곳에서 탈고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Weybridge, 1923”의 보다 깊은 의미는 당대의 관행을 함께 고려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이를테면, <인도로 가는 길>보다 불과 2년 전에 발표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마지막 페이지를 보라. 그곳에 나와 있는 “Trieste-Zürich-Paris 1914-1921”이라는 언명은 제임스 조이스가 트리에스테, 취리히, 파리를 떠도는 유목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에 걸맞게 국제주의자 혹은 무정부주의자였음을 상징한다. 실로, 제임스 조이스는 20대 초에 자신이 속한 가족, 교회, 국가를 버리고, 이질적 문화들이 뒤섞여 있던 (현재 이탈리아 북동부) 소도시 트리에스테로 망명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취리히로 옮겼고, 다시 파리로 이사하며, 그렇게 평생 해외를 떠돈다. 그리고 1914~1921년이라는 긴 기간은 그가 작품을 쓰는 데 바친 막대한 시간, 에너지, 고뇌를 상징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Trieste-Zürich-Paris 1914-1921”이라는 언명은, 제임스 조이스가 오랫동안 고뇌를 짊어진 채 다채로운 이방을 헤매어 다니지 않았으면 <율리시스>와 같은 걸작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이미지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을 무렵, 포스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웨이브리지라는 지명, 그리고 간단히 1923이라는 숫자만 적는다. 이러한 고의적인 “생략”은, 이른바 유목적 수선스러움에 대한 경멸, 그리고 고향을 떠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조소를 담았다고 해석될 수 있다.

영국의 소설가 에드워드 모건(E. M.) 포스터. 사진은 포스터가 1954년 레이던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모습. 위키피디아

에둘러 표현해 기존 질서에 균열낼 수도

이러한 퀜틴 스키너의 주장을 보다 잘 음미하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서 유사한 예를 생각해 보자. 이 사회에서 유행 중인 자기계발서 제목은 대체로 문장의 형태에 가까운 긴 제목을 달고, 거기에 달콤한 부제를 덧붙이는 관행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다시 일어서려는 그대에게>,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어른아이에게> 등등. 이러한 관행이 지배적일 때, 누군가 부제를 생략한 채, 다만 “끙”이라는 한 글자로 책 제목을 지었다고 상상해보자. 그저 신음 소리로서의 “끙”. 이 장엄한(?) “끙”은 관행이 된 수선스럽고 달콤한 제목들에 대한 경멸, 그런 베스트셀러를 내지 못하는 초라한 자신에 대한 조소, 그리고 자기계발 해봤자 소용없다는 고백을 동시에 담을 수도 있는 대안적인 제목인 것이다.

이처럼 관행을 따르되, 그 관행의 틀 안에서 침묵하거나 변화를 꾀하는 이들은 엄청나게 전복적인 진리를 알고 있어서, 혹은 그 침묵을 알아줄 미래의 명민한 독자를 기다려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존의 관행과 권위에 정면으로 대결해봐야 소기의 성과도 거두기 어렵고,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크다고 판단한다. 오히려 대체로 관행을 따르면서, 그 안에서 관행을 비틀어야, 자신의 메시지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권위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민감한 부분에서 침묵하거나, 생략하거나, 관행을 비트는 방식으로 에둘러 자신이 가진 이견을 표출한다.

그들이 에둘러 표현한다고 해서,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들 방식은 심각한 정치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송편의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다들 알다시피, 추석이 되면 송편에 대한 이념투쟁이 격화된다. 송편이 먹고 싶다! 일 년 동안 송편을 찾지 않다가 갑자기 송편이 없으면 큰일 날 것처럼 구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송편을 타도하라! 그에 맞서 송편 자체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혁명가들이 나타난다. 송편이 그렇게 좋은 음식이면 평소에 김치와 함께 먹으란 말이야! 하고 외친다. 명절노동에 지친 이들은 송편을 타도하기 위해서 추석에 송편 대신 공공연하게 치즈케이크를 먹고 그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그리고 꿀송편 중독자 대 콩송편 중독자들의 해묵은 전쟁이 발발한다. 꿀송편을 기대하다가 콩송편을 씹은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은 작심하고 콩송편을 비난한다. 콩송편, 그건 맛도 아니여! 그렇다고 해서 콩송편 중독자들이 자신의 입맛을 반성할 리가 있겠는가. 그들은 꿀송편 중독자들의 유아적인 입맛을 비웃으며 더욱더 우쭐할 뿐이다. 아무리 꿀송편이 진리라고 한들, 상대는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콩송편의 문제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바로 이때, 보다 효과적으로 명절음식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기존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보다는, 관행을 인정하면서 우회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는 온건개혁파가 등장한다. 그들은 송편 자체에 대한 비판이나 콩송편에 대한 명예훼손은 자제하고 침묵한다. 그 대신, 자유주의의 기치하에, 송편에 고기를 넣자고 제안한다. 서로 싸우지 말고 콩송편도, 꿀송편도, 깨송편도 다 인정해줍시다. 그러는 김에 송편에 고기도 넣어봅시다. 관행과 정면충돌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 정도 다양성은 허용된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고기송편이 기존 질서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난 것으로 드러난다. 고기송편으로 인해, (고기)송편과 (고기)만두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만 것이다. 급기야는 사람들은 송편과 만두를 혼동하기 시작하고, 결국 송편이라는 범주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스> 초판 표지. <율리시스>의 마지막 페이지엔 “Trieste-Z?rich-Paris 1914-1921”이라는 언명이 나와 있다. 위키피디아
에드워드 모건(E. 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 초판 표지. 이 작품은 “Weybridge, 1923”라는 두 단어로 끝나는데, 이는 지은이가 유목적 수선스러움에 대한 경멸, 그리고 고향을 떠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조소를 담은 고의적인 ‘생략’으로 볼 수 있다. 위키피디아

침묵이나 생략의 전복적 성격

이처럼 자유주의가 가진 전복적 성격이 드러나면, 보수파는 고기송편을 법적으로 금지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고기 맛에 이성을 잃은 이들은 고기송편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처럼 송편 소를 두고 갈등이 지나치게 고조되어 전운이 감돌 때, 누군가 제안한다. 송편에 무엇을 넣느냐 가지고 전쟁을 하느니, 아예 송편에 아무것도 넣지 않는 게 어떻소. 싸우느니, 콩이든 깨든 꿀이든 고기든 다 넣지 맙시다. 이리하여 텅 빈 송편. 우리는 이것을 송편의 침묵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침묵하는 송편이 가진 전복적인 성격은, 그것이 속이 빈 공갈떡과 구별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급기야 사람들은 침묵하는 송편과 공갈떡을 구별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송편이라는 범주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이처럼 관행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신, 관행을 비틀거나 전용하거나 침묵하거나 생략하는 행위에 동반되는 정치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해당 텍스트를 넘어 보다 넓은 콘텍스트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일견 단순한 침묵이나 생략으로 보이는 것들이 갖는 전복적인 성격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볼멘소리로 이렇게 대꾸할 수도 있다. 난 관행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냥 졸려서 침묵했을 뿐이에요. 내 침묵이나 생략을 너무 과도하게 해석하지 말아주세요. 과연, 얼마나 많은 영화감독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를 과잉 해석해내는 평론가들을 비웃어댔던가. 감독들은 장면 전환을 위해 영화에 터널 장면을 종종 집어넣는다. 그러면 평론가들은 그 터널을 성기의 비유라고 해석한다. 기다렸다는 듯, 감독들은 아니 그건 그냥 콘크리트 터널일 뿐인데, 라고 비웃는다.

누구의 해석이 옳든, 텍스트의 의미는 그 텍스트의 저자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다. 어떤 텍스트가 저자의 입과 손을 떠나 공적인 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의미는 정치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저자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든, 어떤 것에 대한 침묵이 다른 것에 대한 발화로 해석되기도 하고, 다른 것에 대한 발화가 어떤 것에 대한 침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엄혹한 나치즘의 시대를 살았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세상에 널린 끔찍한 짓에 대한 침묵이므로 거의 죄악이라면
그 시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김영민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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