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은 진행형 혁명..세상 바꾸려면 일상에서 '광장' 펼쳐야"

2017. 10. 28.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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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촛불 1년 - 박진과 유재원의 대화
[한겨레]
“촛불은 부패한 권력을 시민들이 맨몸으로 쫓아낸 혁명이었다.” “돌 하나 안 던지고 권력자의 항복을 받은 건 역사상 최초이다.” 촛불집회 당시 사회를 맡았던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왼쪽)와 유재원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촛불혁명’의 의미를 되새겼다. 두 사람이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만나 활짝 웃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 ‘2016 촛불집회’가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독일 에버트재단이 “민주적 참여권의 평화적 행사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 신장을 들어 1천만 촛불시민들에게 올해의 인권상을 주기로 한 것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촛불혁명’으로 부르는 데는 아직 인색하다. 촛불집회 사회를 봤던 박진(46)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전문가인 유재원(67)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촛불 광장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대화는 지난 24일 오후 세종문화회관에서 했다.

“박근혜는 물러나라!” 그(박진)가 지난겨울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무대 위에서 외쳤다.

“박근혜는 물러나라!” 광장의 그(유재원)는 동료 시민들과 함께 소리를 보탰다.

지난겨울 촛불집회 주최자와 참가자로서 무대 위와 아래에 각각 있었던 두 사람은 24일 세종문화회관의 아담한 회의실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세종문화회관은 지난해 겨울 공연을 소화하면서도 화장실을 개방하는 등 촛불시민들과 호흡을 같이했다. 지난겨울의 사건을 한목소리로 ‘촛불혁명’이라고 규정한 두 사람은 “정치 개혁 등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촛불을 국회에서 다시 들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광장의 열기를 삶의 현장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정농단의 주인공인 ‘최순실’이란 이름을 최초로 보도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포문을 연 <한겨레> 2016년 9월20일치 1면.

“우리도 촛불 평화시위상 제정했으면”

―촛불시민이 올해 독일 에버트재단의 인권상을 받게 됐다.

유재원(유) “내가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상금(20만달러)에 시민들도 돈을 보태 기금을 마련해서 세계적인 촛불 평화시위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박진(박) “실제로 선생님이 받은 거다. 축하한다. 하하. 노동운동과 평화운동을 지지하셨던 분들의 유산으로 만든 상이어서 더 의미가 있다.”

―지난겨울의 촛불집회를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나?

“항쟁, 탄핵촛불, 촛불혁명, 촛불시민혁명 등등 다양하게 부르는데 나는 촛불시민혁명이라고 부른다.”

“나도 촛불혁명으로 부른다. 정치체제, 즉 정권이 넘어갔다는 점에서는 혁명이 맞다. 완벽한 혁명이 되려면 사상의 변화, 다시 말해 생각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부분은 아직 진행형이라고 본다면 미완성의 혁명이라고 본다.”

“대통령을 바꾼 것도 굉장히 중요하나, 더 중요한 것은 부패한 권력을 오로지 시민들이 맨몸으로 쫓아냈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을 아낄 필요가 없다.”

“돌 하나 안 던지고 권력자의 항복을 받은 것은 역사상 최초이고, 세계에서도 처음이다. 4·19, 전두환, 박근혜까지 우리는 세번씩이나 비폭력 평화적으로 권력을 무너뜨렸다. 간디가 왔다가 울고 갈 곳이 여기다. 그 뿌리를 생각해봤는데 기미독립선언(3·1운동) 할 때부터 그랬다. 그때도 총 하나 들지 않고 일본에 저항했다. 일부에서는 3·1운동을 실패라고 하지만, 나는 성공이라고 본다. 식민정책의 첫번째가 어문정책인데 일본은 1938년 이전까지는 조선어나 한글에 대해 시비를 못 걸었다.”

―대통령이 탄핵됐으니 촛불혁명은 성공한 건가?

“박근혜 퇴진이라는 단일한 목표로 봤을 때는 성공한 혁명이다. 물론 적폐 청산을 못 하는 현실을 보면서 이러려고 촛불 들었나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실패로 보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 이후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우리 사회의 완고하고 뿌리 깊은 기득권 세력들을 몇 개월의 촛불로 다 뒤집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조급하다. 87년 6월항쟁 때를 보자. 그때는 정권도 못 바꿨지만, 항쟁 이후 민주노조가 생기고 시민사회가 생기는 등 우리 사회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됐다. 이번에도 변화는 앞으로 적어도 30년은 계속될 것이다.”

“촛불혁명은 진행형인데 촛불로 정권 교체를 이룬 뒤에 국민들이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우려되는 면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새 정부도 적폐 청산은 열심히 하는데 정치적 개혁을 어떻게 하겠다는 아이디어나 비전을 확실하게 제시하지는 않는 것 같다.”

유재원 한국외대 명예교수
“돌 하나 안 던지고 항복받은 건
유사 이래 처음이자 세계 최초”
“권력 세번째 내쫓은 것도 유일
평화집회 뿌리는 3·1운동부터”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시민 맨몸으로 부패 권력 쫓아내
당당히 ‘촛불시민혁명’ 불려야”
“이러려고 촛불 들었나 실망 금물
사회변화 최소 30년간 지속될 것”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1997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지역운동을 하기 위해 경기도 수원에 있는 다산인권상담소(다산인권센터의 전신)에 들어갔다. 그는 20년 동안 다산인권센터에서 법률 상담과 인권운동 등을 해 왔다. 지난해 첫 촛불집회가 시작됐을 때는 활동가로서 모처럼의 안식년을 보내던 중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가는 시계였던 박근혜 정부는 인권운동가에게 잠시의 휴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국정농단의 결정적 증거인 ‘태블릿 피시’를 단독보도한 2016년 10월24일 제이티비시 ‘뉴스룸’의 한 장면.

“감옥 겁은 없는데 어디로 갈지 몰라 무서웠다”

―처음부터 촛불집회 사회를 맡았나?

“1, 2차 집회까지는 단순 참가자였다. 연일 터져나오는 뉴스를 보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집회에 갔는데 거기에 온 분들의 에너지가 밖으로 뻗쳐나가는 게 보이더라. 이것 크게 터지겠구나 하는 감이 왔다. 결정적으로 나를 움직인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퇴진행동이 구성되기 바로 직전에 시민사회 원로들이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서 했던 기자회견이었다. 그 사진을 보니 전부 어르신들만 있었다. 촛불은 이미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이 사진만 봤을 때는 시민들이 어버이연합과의 차이를 알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왔다. 더 다양한 얼굴로 만드는 게 촛불광장의 핵심이라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얘기했더니 그러면 네가 해야 한다고 해서 나오게 됐다.”

지난해 9월20일 최순실의 미르재단 및 케이(K)스포츠재단 관련 의혹에 대한 최초 보도(<한겨레>)에 이어 10월24일 최순실의 태블릿피시 보도()가 나오자, 당시 민중총궐기 투쟁본부와 백남기 투쟁본부는 10월29일 급하게 서울 청계광장에 무대를 만들었다. 이날 5만명(주최 쪽 추산)이 모였다.

―초반부터 ‘박근혜 하야’를 시민들이 외치는 등 국민의 분노가 높았는데, 대통령 퇴진이 될 거라고 예상했나?

“전혀 예상 못 했다. 늘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갯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구속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그런 연대기구의 공동상황실장으로 이름을 올릴 때는 감옥 갈 각오를 한다. 어디로 가는지 방향은 하나도 알 수 없는데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거대한 호랑이의 목줄을 잡고 따라가는 듯한 상황이 무서웠다.”

―탄핵 구호는 촛불집회에서는 비교적 늦게 나온 것 같다.

“내부 회의 때 탄핵 구호를 외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논쟁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탄핵은 국회를 거쳐 헌법재판소까지 가야 하는데 당시 시민들의 요구는 대통령의 즉각 퇴진이었다. 이런 열망을 제도권의 결정에 온전히 맡기는 게 맞느냐, 오히려 탄핵 반대를 외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탄핵 구호는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뒤에야 공식적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처음에는 하야를 외치더니 그다음 주부터는 물러나라로 바뀌더라. 하야는 권력자한테 인심을 쓰라는 요청인 데 비해 물러나라는 주권자로서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 면에서 언어 선택을 잘했다.”

“집단적 지혜였다. 우리는 스스로를 항쟁의 지도부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시민들의 요구를 잘 듣고 그것을 무대에서 정확하게 반영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듣고 끊임없이 토론했다. 운영위 회의에는 100명이 참가해서 6시간씩 했다. 한가지 결정하는 데만 보통 2시간이 걸렸다.”

―결론이 안 나면 다수결로 했나?

“아니다. 다수결로 하게 되면 그야말로 패권이 된다. 서로 상대방 얘기를 듣고 또 듣고, 제안하고 또 수정 제안해서 최대의 합의점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회의를 했다. 회의 진행도 매주 단체별로 돌아가면서 의장을 맡았다.”

“그런 식으로 토론하고 타협해 합의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민회가 운영되는 원칙이었다.”

그리스 아테네대학교에서 공부(언어학 박사)한 유재원 명예교수는 국내 그리스학의 대가이자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민중정치)에 대한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낸 책 <데모크라티아>에서 데모크라티아(영어 democracy)를 민주주의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라며, ‘데모스’(민중, 인민)와 ‘크라티아’(통치, 지배, 정치)의 의미를 살려 ‘민중정치’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2016년 12월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6차 촛불집회 모습. 이날 주최 쪽 추산으로 전국에서 232만명이 모여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경찰뿐 아니라 법원도 민심 읽더라”

―군대 동원 등을 우려하지는 않았나?

“민심이 이반한 상태였기에 군이 움직일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민심 이반은 심지어 경찰 태도에서도 느꼈다. 사람들은 우리가 갑자기 평화로운 집회를 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늘 평화로운 집회를 했다.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셨던 민중총궐기 때도 평화롭게 진행했다. 그때 차에 줄 감고 당기는 것이 다였는데 그게 어떻게 폭력집회냐, 기껏해야 기물 파손이지. 이번에 양상이 달랐던 건 공권력이 변했기 때문이다. 1차 집회 때 청계광장에서 집회하고 광화문으로 행진했을 때 신고된 집회의 행진이 아니었다. 막을 수 있었는데도 못 막더라. 그것 보면서 ‘아, 얘네들 막을 생각이 없구나’ 싶더라.”

“87년 6월항쟁 때도 군을 투입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절대로 군이 나올 수 없다고 봤다. 다만, 혹시 박근혜가 하야하면 어쩌나 걱정은 했다. 하야하면 민중이 만족하고 흩어질 수 있고, 그러면 아무것도 못 바꾸기 때문이다.”

“공권력이 시민을 두려워하면서 길을 열어주기 시작하자, 시민들은 더 나왔다. 퇴진행동이 발 빠르게 했던 것은 그것을 제도적으로 문제가 없도록 매주 가처분신청을 했던 점이다. 집회를 경찰이 불허하면 가처분신청 내서 번번이 이겼다. 법원도 민심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은 한번도 안 내준 것을 법원이 허락했다. 그렇게 되자, 시민들은 저기 가도 위험하지 않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돼 가족 단위로 나오고, 숫자가 늘어나니 공권력은 더 빠른 속도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주요 시설물 100미터 바깥에서는 어디든 집회가 가능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청와대 근처에서는 광화문 앞이 마지노선이었다. 촛불집회 때도 1·2차 때는 세종대왕 동상(청와대에서 1.3㎞ 밖)까지만 진출할 수 있었다. 3차 집회(11월12일) 때 사상 처음으로 내자동 로터리(900m 밖)까지의 행진이 허용됐으며, 이후 4차(500m 밖)와 5차(200m 밖)를 거쳐 마침내 12월3일 6차 집회 때는 청와대 100m 밖인 효자치안센터 앞에서의 집회도 허용됐다.

―3차 집회(11월12일)가 고비였던 것 같다. 그날 경복궁역 앞에서 일부가 경찰 차량에 올라가는 등 약간의 물리적 충돌 조짐이 있었다.

“그 현장에 있었는데 고비라고 할 수도 없다. 너무 싱겁게 끝났기 때문이다. 한두명이 경찰차에 올라가자, 거기 있던 시민들이 일제히 ‘내려와’ ‘내려와’를 외쳤고, 상황은 저절로 끝났다.”

“5개월 동안의 촛불집회 동안 유일하게 연행자가 발생한 게 그날이었다. 그날 퇴진행동에서는 시민들에게 ‘집회 신고는 12시까지입니다’만 반복해서 알려드렸다. 대신 마지막 시민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우리도 현장에 같이 있기로 했다. 당시 시민들의 기세가 남달라서 집회가 끝난 뒤에 해산하라 마라 할 수가 없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때의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 광우병 집회 때는 주최 쪽이 경찰한테 혼나는 것보다 시민한테 혼난 일이 더 많았다고 하더라. ‘왜 진격하지 않고, 가두리 집회만 하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민들의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그날 새벽 5시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시민 10여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아, 이제 매주 새벽 5시에 끝나겠구나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행된 시민들이 경찰서에 간 변호사들에게 ‘아니, 집회가 종료됐으면 끝났다고 얘기를 해줘야지 왜 얘기를 안 해줘서 경찰에 잡히게 만드느냐’고 하더라는 거다. 그제야 2008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집회부터는 욕먹을 각오를 하고 ‘오늘 집회는 여기서 마무리합니다’라고 종료선언을 했다. 그랬더니 군더더기 없이 모두 벌떡 일어서서 쓰레기를 줍고 집으로 돌아가더라. 그렇게 해서 23차까지 갔다.”

시민이 처음부터 촛불혁명 주도
멈칫대던 정치권도 ‘탄핵’ 수용
비폭력 기조도 시민들이 선도
주최, ‘집회 합법화’ 판만 깔아

“정치권이 개혁 걸림돌 양상
국회서 촛불 또 들어야 할 판”
“반상회 등 일상에서 목소리 내야
‘대통령 잘하겠지’ 맘 놔선 안 돼”

―2008년과 촛불 양상은 비슷했는데 그때와 달리 이번에 성공한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보나?

“그때는 정권 초기였고, 이번에는 정권 말기였다는 객관적 조건 차이가 크다고 본다. 물론 주체적인 면에서는 2008년의 경험이 없었으면 지난해 촛불이 성공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본다. 거슬러 올라가면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의 촛불부터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길거리 응원이 없었으면 아마 지난해 촛불도 없었을지 모른다. 길거리 응원을 통해 사람들이 광장의 힘을 알았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본다.”

2016년 12월9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자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이 일제히 기뻐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일제 소등 때 전율 느꼈다”

두 사람 모두 스물세 차례의 집회 가운데 6차 집회(12월3일)가 절정이었다고 기억했다. 6차 집회를 앞두고 정국은 요동쳤다. 코너에 몰린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일종의 승부수를 던졌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 등 당시 야3당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기로 하는 등 탄핵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자, 그는 11월29일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내용의 제3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야3당은 이 제안에 대체로 부정적이었지만, 탄핵안 가결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새누리당의 비상시국회의 소속 의원들은 ‘2017년 4월까지 사퇴 시한을 명시할 것’을 청와대에 요구하는 등 흔들렸다.

“박근혜 담화로 새누리당의 비박계나 야당이 흔들흔들했는데 그날 광화문에 160여만명 등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파인 232만명이 모였다.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어디로 가려고 이러나 싶어 공포를 느낄 지경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정치권도 공포를 느꼈다. 결국 9일 탄핵안이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됐다. 3일 집회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진 한계를 직접민주주의로 돌파한 일대 사건의 날이었다고 본다. 그날의 판세를 헌법재판소도 뒤집지 못할 것이라고 봤다.”

“그즈음 국민의당 박지원씨가 타협적인 발언을 했다. 그래서 나도 정치인들이 장난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3일 집회에 다 나가자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많이 했다. 그날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갈 수가 없어서 포기할 정도였다. 일본에서 온 지인이 그 장면을 보고는 문화 충격을 받더라.”

―촛불 물결이나 소등 장면 등도 장관이었다. 누구 아이디어였나?

“파도타기는 워낙 촛불의 상징적인 의미여서 처음부터 했다. 이번에 처음 등장한 것은 소등이었다. 집회에 오는 이뿐 아니라 참가하지 못한 사람도 참가할 수 있는 퍼포먼스가 필요하다고 보고 소등 아이디어를 내가 먼저 냈다고 생각했는데, 얘기를 해 보니 그 아이디어를 먼저 냈다는 사람들이 여럿이더라. 하하. 아마 비슷한 생각들을 동시에 했던 것 같다. 무대 위에서 소등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면서 ‘3, 2, 1, 소등’ 하면 일순간에 쫙 어두워지는데 온몸에 전율이 오더라.”

“정말 그 장면은 장엄하고 감동이었다. 87년 항쟁 당시 약정된 시간에 모든 차들이 빵빵빵 하면서 클랙슨 소리를 냈을 때 ‘아, 전두환이 끝났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소등은 그때보다 훨씬 강렬했다. 광화문 주변의 빌딩들도 참여하지 않았나. 실수라고 핑계댔지만, 미국 대사관도 불을 꺼줬다.”

―사회자로서 특별히 신경 쓴 것은 뭔가?

“윤희숙씨는 또랑또랑한 말투였고, 김덕진씨는 유려한 진행이 특징이었다. 거기에 비해 나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굉장히 독특하다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 나는 사회자가 할 일은 참석한 분들의 얘기를 받아서 그날의 분노와 감정을 잘 조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신경 쓴 것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동지 여러분’ 등 선동적인 이른바 운동권 사투리를 안 쓰려고 노력했다. 대신 평이한 말을 사용하려고 애썼는데 그때 자주 했던 말이 ‘괜찮습니까’, ‘괜찮으세요’였다. 그 때문에 내 별명이 ‘괜찮으세요 아줌마’였다. 하하.”

―2008년에는 중앙무대가 없었던 데 비해 이번에는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행사가 이뤄졌다. 주최자로서 어깨가 더 무거웠을 것 같다.

“이번 일은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어떤 검증대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민사회운동이 너무 나서지도, 너무 뒤처지지도 않고 시민들보다 반발 앞에서 먼저 만드는 역할을 보여줘야 한다고 봤다. 우리가 과도하지는 않은지, 뒤처지지는 않는지, 잘못하는 것은 없는지 해서 잠을 잘 못 잤다. 그렇게 몇달을 보냈더니 민주주의 훈련을 나 스스로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제일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다면?

“너무 많았는데 그중 하나는 눈이 와서 그랬는지 바닥에 얼음이 잔뜩 꼈던 날이었다. 보통 무대팀은 아침 일찍부터 일하는데 한 시민이 앉아서 얼음을 긁고 있었다. 그래서 무대팀이 다가가서 ‘이래 봐야 소용없다. 이렇게 넓은데 어떻게 그걸 다 하겠느냐’고 말렸더니 그분이 말하길 ‘이렇게 하면 한 사람만이라도 더 앉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우리 무대팀도 모두 따라서 바닥을 긁어야 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앉을 수 있도록 시민이 다른 시민을 배려하는 모습에 정말로 감동했다.”

2017년 3월10일 오전 서울시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을 읽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제도 개혁 정치권에 맡겨선 안 돼”

―촛불혁명이 진행형이라면 남은 과제는 뭔가?

“혁명이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이뤄지려면 국민이 바라는 체제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는 사법부 개혁이 가장 중요하다. 제왕적 권력을 막으려면 완전한 사법 독립이 이뤄져야 한다.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을 대통령이 임명하지 말고, 판사와 검사들이 각각 뽑고, 배심원 제도도 도입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불의에 저항해 무너뜨리는 데까지는 열심인데 그다음의 제도 개혁은 정치인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선 안 된다.”

“맞다.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려서 정권 교체가 됐다면 그 정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주목해야 한다. 투표하는 권리에서 그치면 안 된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크다 보니까 정권 교체도 작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도 변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지금 보듯이 정치권 적폐가 다시 발목을 잡게 된다. 저는 개혁의 우선순위는 정치개혁이라고 본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나 18세 선거권 같은 구체적 성과를 따내지 못하면 앞으로도 정치에 발목 잡히면서 촛불의 성과들이 유야무야될지도 모른다.”

―사법개혁이나 정치개혁은 결국 정치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 탄핵 이후 정치를 보면 광장의 요구가 국회에서 대부분 비토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민들이 무력감을 느끼는 지점이기도 하다.

“지난해 총선은 공천 때부터 매우 왜곡됐다. 촛불을 통해 이쪽 행정권력은 바로잡았는데 저쪽 입법 쪽은 바로잡지 않아서 지금 절름발이 신세다. 소환제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으니 답답하다. 국회로 촛불을 들고 가야 한다는 얘기가 맞는 것 같다. 국회의원들 지역 사무실을 찾아가서 국민의 요구를 직접 전달해야 한다.”

2017년 5월10일 취임식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앞을 지나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지금대로라면 정말 국회 앞에서 촛불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다. 물론 대규모 집회만이 정답은 아니다. 광장의 열기를 이제는 내 삶으로 가져가는 게 중요하다. 세상 바꾸려는 생각을 우리가 가진다면 반상회도 나가고, 학교 운영위도 나가고, 이렇게 다양한 삶의 공간에 나가서 거기서 정말 정치하는 사람들이 무시 못하는 목소리를 길러내야 한다. 우리 대통령이 잘하겠지 하면서 다시 한번 대의하는 방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 정치적으로 각성된 시민들이 끊임없이 일상의 광장을 펼쳐야 민주정부도 힘을 받을 수 있고, 대통령도 잘할 수 있다.”

인터뷰에 앞서 두 사람은 광화문광장 앞에 섰다. 길 건너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는 국가정보원의 불법사찰 공개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내놔라 시민행동), 인근 세종로공원에서는 성노동의 비범죄화 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성노동자들의 집회가 한창이었다. 광장에는 산책하는 시민, 청와대 쪽 북악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교복 입은 학생들로 붐볐다.

“그동안 힘들고 외로울 때도 있었는데 촛불광장이 답을 줬다. 기다리면 사람들이 와서 승리를 준다는 사실, 즉 민중의 힘을 책이 아니라 광장에서 봤다. 사회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박진)

“그리스 사람들도 촛불혁명의 힘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곤 한다. 나는 촛불집회에 와 봐야 안다고 대답한다. 그동안 겪고 배운 것을 책으로 써서 민중정치 발전에 기여하려고 한다.”(유재원)

광화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두 사람의 눈가에는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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