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경제]<남한산성>-무기력한 조선왕조의 '머들링 스루'

2017. 11. 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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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아름다운 것만 있지 않다. 보기 싫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치욕의 역사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조선의 인조가 청태종(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은 ‘삼전도의 굴욕’도 그렇다.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은 바깥세상에 어두웠던 외교력, 자기를 지킬 수 없었던 나약한 국방력, 명분에 사로잡힌 이상론이 불러온 실패의 기록이다.

1636년 인조 14년 청의 대군이 조선에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며 압록강을 건넌다. 병자호란이다. 정묘호란(1627년)이 일어난 지 9년 만이다. 강화도로 채 피난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피한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은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며 화친(나라와 나라 사이 다툼이 없이 가까이 지냄)을 주장한다. 반면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은 굴욕을 당할 바에야 죽는 게 낫다며 척화(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함)를 주장한다. 때는 눈이 내리는 정월, 청군에 포위된 조선군은 추위와 굶주림과도 싸워야 했다.

청나라 황제를 자칭하는 칸 홍타이지는 중국에서 삼전도까지 와 인조의 항복을 요구한다. 인조는 격서를 써 성밖 의병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대장장이 날쇠가 격서를 들고 성밖으로 탈출하지만 근왕병들은 끝내 오지 않는다. 항전 47일 만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한다.

당시 조선은 전란의 후유증, 왕위 찬탈을 둘러싼 내분으로 엉망인 상태. 진흙탕 속에서 겨우겨우 왕조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른바 머들링 스루(muddling through)였다. 머들링 스루란 헤쳐나가기 힘든 진흙탕 속을 통과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경제용어다. 시간을 끌면서 힘겹게 나아가거나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 채 시간만 끄는 상황으로 보면 된다. 머들링 스루는 유로존이 그리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주요국의 재정문제로 촉발된 금융위기에 늑장대응을 하면서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는 현상을 빗대면서 사용됐다.

혁신을 찾지 못해 침체가 계속되며 서서히 성장동력을 잃어가는 경제상황을 ‘머들링 스루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최근 한국 경제가 딱 그런 꼴이다. 서서히 침체의 길로 가고 있지만 반도체 산업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먹을거리를 찾지 못한 채 성장잠재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머들링 스루는 의미가 확장돼 조직의 명확한 목표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현재 체제를 버텨가면서 직면한 문제를 우선 해결해 나가는 상황을 이르기도 한다.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는 조선왕조에 민심도 돌아섰다. 신분제도는 공고했고, 먹고살 길은 막막했다. 실용외교와 대동법을 내세워 사회개혁을 시도했던 광해군은 폐위됐다.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배곯지 않는 세상’이 되지 않는 한 조선이 청의 나라가 되든, 명의 나라가 되든 백성들에게는 똑같았다.

인조가 항복을 한 뒤 김상헌은 최명길에게 한탄한다.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이란 낡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비로소 열리는 것이오. 그대도, 나도, 그리고 우리가 세운 임금까지도.” 조선이 머들링 스루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조선은 끝내 개혁을 이루지 못한다. 조선은 영·정조시대를 거치며 잠시 기력을 회복하는가 싶더니 구한말 열강의 진흙탕에 빠져 몰락한다. ‘삼전도의 굴욕’을 머들링 스루에서 탈출하는 혁신의 기회로 삼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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