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20년, 끝나지 않은 고통](상)"퇴직금 다 털어 자영업 뛰어들었지만, 버틸 수가 없었다"

임아영 기자 2017. 11. 1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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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눈물의 비디오’ 그후…

외환위기 당시 ‘눈물의 비디오’는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구조조정의 일상화를 보여주는 신호탄이었다. 화면에서 한 직원이 1998년 2월 문을 닫게 된 제일은행 테헤란지점 앞에서 은행 간판을 바라보고 있다(오른쪽 사진). 제일은행이 서울지역 지점장 부인을 대상으로 개최한 행사에서 이 비디오를 본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왼쪽). 경향신문 자료사진

명예퇴직을 앞둔 15년차 여행원은 비디오 속에서 눈물을 쏟았다. “남은 사람들이 잘해서 예전의 제일은행으로 살려내주길 바랍니다.” 자신은 회사를 나가야 하는 입장이면서도 남은 사람들을 응원했다. 1997년 영업점 통폐합을 앞둔 제일은행 테헤란로지점 직원들이 마지막까지 부실기업 업무를 처리하는 일상을 담은 8분짜리 비디오의 원제는 ‘내일을 기다리며’였다. 외신들도 이 비디오를 보도할 정도로 외환위기의 상징이었다. 비디오 속 사람들처럼 당시 제일은행을 나가야 했던 사람들은 지난 20년을 어떻게 살았을까.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던 은행이 망했고 평생직장은 사라졌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첫번째 세대. 외환위기는 정년이 보장되던 시대에서 정년은커녕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시대로 전환되는 기점이었다.

“아들이 취업 준비할 때 그러더라고요. 절대 아버지처럼 회사에서 밀려나고 싶지 않다고.” 1970년 제일은행에 입행했던 이수철씨(64·가명)는 40대 중반이던 때에 명예퇴직을 당했다. 외환위기 때 중·고생이던 자식들은 이제 30대가 됐다.

이씨는 1998년 1월 명예퇴직했다. 1997년 1월, 11월 명예퇴직이 있었고 더 이상의 감원은 없다고 한 뒤였다. 동서랑 사우나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험도 없이 계약을 했지만 분양도 안되자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소송을 걸었다. 10개월인가 재판에 매달려 이겼고 다행히 퇴직금은 건졌다. 뭐라도 해야 하니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했다. 1년 정도 공부했는데 잘 안됐다. 이씨는 “일이 없을 때가 제일 괴로웠다”고 말했다.

우연히 복사집에 들렀다가 이 일은 할 수 있겠다 싶어 2003년 6개월 동안 무급으로 일을 배워 복사기 하나로 복사집을 시작했다. 영업이 힘들었지만 명함을 일일이 돌리면서 거래처가 늘어났다. 그는 “나를 봐서인지 큰아들이 어떻게든 삼성에 들어가겠다고 악을 쓰고 준비하더라고. 가슴이 쓰렸다”고 말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부터 하향세였다. 결국 올해 3월 복사집도 그만뒀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우리 가족을 먹여살린 기계였는데 ‘이제 그만할 때가 됐나’ 싶어 2주 동안 잠이 오질 않았다”고 말했다.

제일은행에서 같이 명퇴했던 남동생은 퇴직 후 1년 동안 음식점을 했지만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씨는 “주방일 할 줄 모르면 음식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들 자영업에 뛰어드니 간판집만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남동생은 주식 투자를 하며 지내다 4년 전 심장마비로 죽었다.

퇴직금 하나로 자영업에 뛰어들던 시절이었다. 1970년 제일은행에 입행한 윤은수씨(64·가명)도 1999년 퇴직금으로 ‘이바돔 감자탕집’을 열었다. 장사가 잘되나 싶더니 6개월 뒤에 30m 거리에 감자탕집이 생겼다. 3개월이 또 지나자 500m 거리에 ‘이바돔’에서 또 지점을 냈다. 1년 반쯤 버티다 포기했다. 이후 채권추심업체에 계약직으로 다니며 아이들을 길렀다. 그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면서 돈을 버는 구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미래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제일은행에서 1998년에 명퇴한 김덕재씨(64·가명)는 “우리는 여기서 55세에 정년퇴직하고, 퇴직 전에 애들 다 결혼시킨다고 했었어요. 지점장도 하고 퇴직금도 받으면 노후가 보장되는 삶이라고 계산하고 살았는데 모든 게 무너졌죠.”

제일은행은 부실채권을 감당하지 못해 1997년 말 경영개선명령을 받았다. 이후 은행 정상화 방안에 따라 해외매각이 결정됐고 1997년 1월 1조5000억원, 7월 4조20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자구 노력으로 1997년, 1998년 대규모 명예퇴직을 받았다. ‘눈물의 비디오’에서 한 행원은 “제일은행이란 이름은 지금까지 나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줬고 회사를 나간 후에도 그러리라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1999년 5000억원에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리지캐피털은 5년 후 1조1500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기며 제일은행을 되팔았다.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명퇴 직전 본점 심사부에서 일했던 이수만씨(64·가명)는 외환위기 전 작성했던 서류가 잊히지 않는다. 모 그룹 회장이 행장실을 다녀간 뒤 1억달러를 대출해주라는 서류가 내려왔다. “당연히 대출해주면 안된다는 것을 모두들 알았다. 기업 회장이 왔다 가면 대출이 일사천리로 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관료들은 ‘펀더멘털’이 탄탄하다며 안심하라고 했지만 결국 사기였다. 관료들은 안이했고 재벌들은 배짱을 부렸다. 결국 피해를 본 건 우리 같은 평범한 직장인들이었다.” 이씨는 “지금은 과연 달라졌는가”라고 물었다.

이수만씨는 1998년 10월 명예퇴직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내를 설득했지만 지금은 후회가 된다. “그때 더 버텼다면 어땠을까. <미생>이라는 만화에서 그랬죠. 회사는 정글이지만 밖은 지옥이라고.” 이씨는 “은행원들은 그래도 퇴직금도 받았잖아요. 일반 기업 사람은 퇴직금은커녕 몇 달치 월급도 못 받은 경우가 허다했어요.” 한때 실업자 165만명에 실업률이 7.6%까지 치솟고 자살, 노숙인, 가정 해체 소식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때였다.

20년이 지났지만 나아졌을까. 이수철씨는 “지금이 더 위기”라고 말했다. “지금은 일자리가 없잖아요. 외환위기 때부터 비정규직이 확 늘었는데 상황이 나아지면 빨리 없앴어야 했는데 정치권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질질 끌다가 이렇게 됐어요. 같은 일을 하고도 임금을 적게 받는 비정규직이 이렇게 늘어서야…. 결국 젊은 세대들에게 피해가 된 거예요.”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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