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효순·미선이 '억울한 죽음' 5가지 기록
한국 두 여중생 주한미군 궤도차량 압사사고 관련
15년전 오늘 미 대통령 5개월 만에 간접 유감 표명
[한겨레]
“이번 비극적 사건에 대한 자신의 슬픔과 유감을 전달해 줄 것과 함께 앞으로 비슷한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한국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해… (중략)”
오늘로부터 정확히 15년 전인 2002년 11월27일,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주한 미군 궤도차량에 의해 한국의 두 여중생이 압사 사고를 당한 지 5개월이 훌쩍 지난 시점의 ‘유감 표명’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슬픔’과 ‘유감’을 사망 여중생 가족과 한국민, 한국 정부에 전달해 달라고 했습니다. 재발 방지를 위한 한국 당국과의 협력도 잊지 않겠다고 덧붙였습니다.
늦게나마 이뤄진 부시 대통령의 유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단체들의 시국선언과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연일 이어졌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저도 생전 처음 길거리에서 들었던 촛불로 기억합니다. 도로 갓길에서 미군 궤도 차량에 완전히 압사당해 뇌수까지 모두 흘러나온 여중생들의 처참한 사고 현장 사진은,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SOFA(한·미 행정협정)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이들의 죽음을 책임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답답함만 커졌습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SOFA 개정”을 외치며 촛불을 드는 일뿐이었습니다. 국민은 분노했지만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끝내 억울한 죽음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주한 미군 궤도차량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의 다섯 가지 기록을 다시 짚었습니다.
1. 2002년 6월13일, 사건 당일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비극적 사고
한·일 월드컵 열기로 뜨겁던 2002년 6월13일, 당시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신효순과 심미선 두 학생은 경기도 양주군(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 갓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훈련을 위해 이동 중이던 미군 장갑차가 이들을 치고 압사시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고 발생 지역은 인도가 따로 없는 편도 1차선의 좁은 도로였습니다. 그런 탓에 주민들은 평소 갓길을 인도 삼아 통행해 왔습니다. 유가족은 사고 차량의 너비가 도로 폭보다 넓었던 점과 마주 오던 차량과의 무리한 교차통과를 시도한 점 등을 이유로 들어 미군 쪽의 과실을 주장했습니다. 사고 당일 미 8군 사령관은 유감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고의 진상 규명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우발적 사고임을 강조하며 누구도 책임질 만한 과실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2. 2002년 6월 19일, 한·미 합동조사 결과 발표
-“악의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사고가 발생한 지 6일 만에 발표한 ‘한·미 합동조사’ 결과에서 미군 당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한민국 경찰 , 대한민국 범죄수사대 및 미 육군 안전부서와 더불어 우리는 본 사고를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 본 조사를 통해 수집된 모든 증거에 근거해 우리는 이번 사고가 고의적이거나 악의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 우리는 본 사건이 비극적인 사고라고 확신합니다 .”
미군 쪽은 “결코 고의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 사고”임을 강조했습니다. 차량 구조상 운전병 오른쪽 시야에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관제병이 학생들을 발견해 운전병에게 이를 알리려 했지만 통신 장애로 제때 전달되지 못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마주 오던 장갑차와의 무리한 교차통과 시도라던 유가족의 지적에 대해서도 전면 부인했습니다. 사고 차량은 8~16㎞의 속도로 중앙선을 넘지 않고 직진 중이었으며, 마주 오던 장갑차와는 교차 통과하지 않고 1m 떨어진 지점에서 정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군의 주장대로 8~16㎞의 느린 속도로 운행했다면, 제동장치 작동 시 보통 그 자리에서 정지하게 됩니다. 궤도차량의 경우 마찰계수가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고 현장의 모습은 미군의 주장과는 달랐습니다. 갓길 주변에는 사고 차량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궤도를 틀면서 생긴 것으로 보이는 자국들이 선명했습니다.
명색만 합동조사였던 미군의 이 같은 일방적 결론은 한국 경찰의 자체 조사 결과와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사고 당시 궤도차량은 마주 오던 장갑차와 교차 통행을 하게 됐으며 이 때문에 정상 차로에서 약간 우측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며 “선임 탑승자가 운전자에게 사람이 있다고 고함을 쳤으나, 무선통신을 하던 운전자가 이를 알아듣지 못해 사고가 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미군이 주장한 사고 차량 속도의 경우 현장 브리핑 때는 16~24㎞라고 했다가 한·미 합동조사 결과 발표 때는 8~16㎞로 줄었습니다. 훈련 사실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주민들에게 사전 통보했다고 했다가 마을 이장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반박하자 죄송하다며 말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특히 미군 쪽은 피해 학생 두 명이 일렬로 누운 채 두개골이 다 깨질 정도로 밟고 지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속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3. 2002년 8월7일, 미국 피의자에 대한 강력한 법적 보호장치
-미군, 한국 정부의 형사재판권 포기 요청 공식 거부
유가족은 6월28일 사고 차량 운전병과 관제병, 미2 사단장 등 미군 책임자 6명을 과실치사 혐의로 검찰에 고소합니다. 이에 미군과는 별도로 한국 검찰도 자체 조사를 벌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미군 쪽은 신변 위협을 이유로 들며 검찰 소환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법무부는 7월10일 미군 쪽에 재판권 포기 요청서를 보냅니다.
그 이유는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때문이었습니다. 2001년 일부 개정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군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일본과 맺은 SOFA에 견주면 불평등한 협정이었습니다. 특히 형사재판권 행사와 관련한 조항이 대표적 독소 조항으로 꼽혀왔습니다.
SOFA 22 조 3 항 미군이나 군속 , 그 가족이 미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거나 공무중 범죄를 저질렀을 때는 미국이 , 비공무중에 한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한국이 1 차적 형사재판권을 갖도록 한다 . 또한 상대국의 재판권 포기 요청이 있을 때 1 차적 재판권을 갖는 국가는 이를 호의적으로 고려한다 .
SOFA 22 조 5 항 1 차 재판권이 한국에 있는 범죄의 피의자가 한국의 수중에 있다면 미군 당국이 요청할 때 ‘ 인도해야 하고 ’, 미군 당국의 수중에 있을 때 한국이 요청하면 ‘ 호의적으로 고려한다 ’
그런데 그동안 이 ‘호의’를 보여온 쪽은 한국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호의’는 미군 범죄자를 감싸는 데 악용됐습니다. 아울러 한국은 확정 판결이 나기 전에는 피의자를 구금할 수 없어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위험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사고가 공무 중에 일어난 사고이고, 이제껏 미국이 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전례가 없다”라며 재판권 포기를 거부합니다.
4. 2002년 11월22일, 운전병·관제병 무죄 평결
동두천시 미 2사단 캠프 케이시 내 미 군사법정에서 11월 18일부터 22일까지 사고 차량 운전병과 관제병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렸습니다. 미군 쪽의 소극적인 태도에 사건의 진상조차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진행된 재판이었습니다. 게다가 재판장에서부터 배심원까지 모두 현역 미군으로만 구성된 재판이었습니다. 배심원단은 기소된 사고 차량 운전병과 관제병 2명 모두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습니다. 찰스 켐벨 주한 미 8군 사령관은 무죄 평결 뒤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재판은 최대한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됐으며, 한국의 시민단체와 정부 관계자, 언론 등에 재판 과정을 공개했다"라고 말했습니다.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은 이렇게 마무리됐고, 이들 두 미군은 무죄 평결을 받은 지 5일 만에 한국을 떠나버렸습니다.
5. 2005년 6월10일, 사고 운전병의 진술 존재 확인
-“두 여중생 볼 수 있었으며, 운전병과 관제병 사이에 통신 장애가 없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은 사건 발생 3년이 지난 2005년 6월10일 기자회견을 열어 ‘주한 미군 궤도차량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 수사 결과를 검찰이 왜곡 발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2005년 5월 대법원 판결로 공개된 ‘주한 미군 궤도차량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 수사기록에 의하면, 주한미군 당국의 거짓과 은폐 그리고 한국 검찰의 담합으로 사건의 진실이 조작되었다는 것이었는데요.
평통사는 “의정부지청이 2002년 9월3일 미 2사단에 통보한 ‘수사 결과에 따른 법률적 검토 의견’에 ‘피해 여중생들을 충분히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전병이 오른쪽 주의 의무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른쪽 갓길을 교행 중이던 피해 여중생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 사고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라며 “당시 검찰은 운전병이 두 여중생을 볼 수 있었다는 근거를 확보하고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검찰은 출발 직전 통신이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사고 직전까지 운전병과 관제병이 통신을 했다는 진술을 통해 장비에 이상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고도 사실과 다르게 발표했다”라고 밝혔습니다.
꿈을 채 펼치기도 전, 비극적이고 억울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신효순 심미선 두 학생의 명복을 빕니다.
참고문헌
<한겨레 > 2002년 6월 14일 , 6월 20일 , 7월 11일 , 8월 8일 , 11월 25일 2005년 7월 2일 치
<한겨레 21> 416호, 417호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공식누리집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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