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역대 임금 초상화가 불타다.. 망연자실한 고종의 지시는?

배한철 2017. 12. 9.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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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영조 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30] 1900년(광무 4) 10월 한밤중에 경운궁(덕수궁)에 화재가 발생해 선원전이 소실됐다. 선원전은 역대 임금의 초상화, 즉 어진을 모셔두던 건물이다.

선원전이 불타면서 이곳에 있던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순조의 아들 효명세자, 헌종의 아버지), 헌종 등 7대의 영정이 함께 화마에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효종이 심양에서 입고 있던 홍전 및 마고자, 역대 임금들의 필적 등 옛 자취들이 모두 화재의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화재의 원인은 실화나 방화는 아니었다. 사고의 전말을 보고받은 고종황제는 화재가 발생했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온 신하들에게 "향을 올리지 않았고 또한 진전(眞殿, 어진을 모신 건물)에 어찌 잡스러운 사람이 왕래를 했겠느냐"라며 "갑자기 동북 변두리에서 불이 하늘로 치솟더니 삽시간에 불길이 전각에까지 번져서 끌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말로 미뤄 산불이나 민가에서 일어난 불이 바람을 타고 대궐로 번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면서 황제는 "마음 졸이며 당황하던 중에 매우 중요한 임금님의 영정을 미처 꺼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1901년 발간된 '영정모사도감의궤'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 의궤는 조선 최후의 영정모사도감의궤다. 조선 전기 어진들은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소실됐다. 임금이 떠난 서울도성에서는 약탈과 방화가 이어진다. 조선 중기 문신 이기는 "피란 가는 임금의 수레가 성문을 막 나섰고 왜적은 도성에 들어오기도 전에 성 안 사람들은 궐내에 다투어 들어가서 임금의 재물을 넣어두던 창고를 탈취했다. 그로도 모자라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 세 궁궐과 6부, 크고 작은 관청에 일시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 한 달이 넘도록 화재가 이어졌다"며 "백성들의 마음은 흉적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다"고 참담함을 전했다. 궁궐이 전소되고 그 안에 있던 세종대왕 등 조선 전기 임금들의 초상화도 전부 없어졌다.

다만, 태조 사당인 경주 집경전, 영흥 준원전, 전주 경기전에 보관한 태조 어진 3건과 세조 사당인 광릉 봉선사 봉선전에 봉안된 세조 어진 1건만 전해졌다.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 어진과 진전 제도의 정비가 본격화됐다. 왕실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조선은 어진을 실제 임금처럼 떠받들었다. 선대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의례를 지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군신 간의 위계질서를 재확인하려고 했다. 영·정조 대에 와서 매우 빈번하게 어진을 그린다. 영조 대에 도감을 둬 주기적으로 어진을 도사했으며 정조 대에도 규장각을 통해 어진을 그리게 했다.

고종은 선원전 화재 이후 도감(都監, 임시관아)을 설치해 선원전을 중건하고 영정을 모사(模寫)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도록 명했다.

고종은 "역대 임금들의 전해 내려오던 자취가 오늘에 이르러 모두 잿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오직 나의 덕이 부족하고 조상을 받들고 효성에 힘을 쏟지 못하여 이런 화재 사건이 있게 되었으니 망극하고 애통한 심정은 더욱 절실하다"면서 조칙을 통해 "영정을 이모하는 일과 건물을 중건하는 일은 매우 경건하고 중요한 일인 만큼 경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머뭇거리며 늑장을 부려서는 안 된다. 공사를 감독하는 여러 신하들은 절대로 안일하게 허송세월하지 말고 온 정성을 다해 공사를 감독하여 어서 빨리 완성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도감의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의정부 의정(정승) 윤용선이 맡았으며 영정모사는 1900년 12월 본격 착수됐다. 7대 임금의 영정 제작에는 소요비용 110만1960냥, 기간만 9개월이 넘는 유례없는 거대한 국가적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화원(왕실 화가)도 40명 넘게 동원됐다. 화원은 각기 역할이 다 달랐다. 그들의 역할은 주관(主管), 동참(同參), 수종(隨從)으로 나뉘었다. 주관화사는 비단에 선을 긋는 작업을 하며 그들이 형체를 그리고 나면 동참화사는 채색과정을 담당한다. 수종화사는 그 외의 잡일을 수행했다. 영정모사도감의궤에 참여했던 대표적 주관화사로는 박용기, 박용훈 형제와 조석진, 채용신을 들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영조 어진은 조석진과 채용신이 그린 것이다.

이와 함께 영정 제작 전 과정을 담은 기록물을 펴냈는데 이 책이 바로 영정모사도감의궤이다. 의궤는 여러 영정의궤 중에서 가장 정제된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진전중건과 함께 동시에 진행된 영정모사와 관련된 각종 의례와 절차, 그 과정에서 사용되었던 의장과 물품에 대한 내용을 모두 망라하고 있다. 조선왕조 어진 모사의 마지막 표준 지침서인 셈이다.

의궤는 총 7질을 발간해 규장각, 시강원, 선원전, 비서원, 의정부, 장례원, 강화사고에 각각 1질씩 나눠 보관했다. 이 가운데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총 4질,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총 2질을 갖고 있다. 강화사고본은 일본이 가져가 국내청에 보관하다가 2011년 되돌려줘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태조 어진을 그리기 위해 조정에서 관리들을 파견해 함경남도 준원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을 경운궁 흥덕전으로 모셔왔다. 그 과정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행렬은 호위단과 군악대를 갖춰 대규모로 꾸려졌고 또한 어진이 가는 도로와 교량을 정비했으며 길 위에는 황토를 깔았다. 이런 경우 과거에는 대개 하급 관리들이 경유지에서 음식과 술을 대접받아 민폐를 끼치는 가렴주구로 물의를 일으킨 사례가 빈번했다. 고종은 이 같은 행위를 철저하게 금지하고 특별히 모든 비용은 도감에서 수요를 파악해 내리도록 했다.

숙종과 순조 어진은 영희전에서, 영조는 냉천정에서, 정조와 문조, 헌종은 평락정에서 각각 가져와 그렸다. 영희전은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 등 6명의 어진을 모셨던 전각으로, 서울중부경찰서 자리에 있었다. 냉천정은 영조 어머니 숙빈 최씨 사당 내 건물이며 평락정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사당 내 건물이다. 어진이 도착할 때마다 황제가 친히 나가 극진한 예로 맞았다.

고종이 이처럼 역대 선조의 어진 제작에 공을 들인 이유는 뭘까. 고종은 3년 전인 1897년 10월 12일 황제대관식을 올리고 대한제국을 공식 선포했다. 하지만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였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일촉즉발로 치닫고 있었다. 이 와중에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모조리 화재로 소실된 것이었다. 화재사고 소식을 접한 고종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제외하고 이처럼 큰 사태가 없었다"고 망연자실했다.

고종은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일련의 상징화 작업을 모색하고 있었다. 영정모사는 그 어떤 상징화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가장 거대하면서도 매우 엄중한 절차를 밟아 영정모사를 진행했다. 화재로 불타 버린 기존 선원전 자리는 터가 협소하다며 1901년 7월 현 덕수궁 인근 영성문 안 서쪽 땅(옛 경기여고 터)에 새로운 선원전을 지었다. 완성된 어진은 이곳으로 모두 모셨다.

인조의 아버지 원종 어진(일부). 한국전쟁 때 발생한 화재로 일부가 훼손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세조 어진 초본(일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하지만 이 선원전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빈 건물이 된다. 어진들은 1907년 도성 내외로 흩어진 모든 어진을 한 곳에 보관하는 내용의 칙령에 의해 창덕궁 선원전으로 다시 옮겨지게 된 것이다. 고종이 마지막으로 모사한 7대 임금 어진과 함께 당시까지 남아있던 세조, 원종(인조의 아버지) 어진, 연잉군(영조의 왕자 시절) 초상 등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있던 어진들이 모두 창덕궁에 모였다.
창덕궁 선원전 어진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부산으로 피난가 동광동 소재 부산국악원 창고에 다른 조선왕실유물과 함께 보관됐다. 그러다가 1954년 성탄절 다음날인 12월 26일 발생한 대화재로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 불에 타버렸다. 잿더미 속에서 영조, 연잉군, 철종, 원종 어진만 겨우 수습했다. 망국의 어진이어서 그런지 그 운명이 참으로 얄궂다.
철종 어진(일부). 조선 어진 중 유일한 군복본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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