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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신문은 내 친구] 후분양제가 뭐길래

이지용 입력 2017. 12. 27. 17:03 수정 2017. 12. 27.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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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기사 이렇게 읽어요 ◆

'미리 분양할 것인가, 집을 짓고 나서 분양할 것인가.'

최근 아파트 분양 방식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아파트를 비롯해 대부분 새 주택을 살 때 통상 2~3년 전 미리 "이 집을 사겠다"는 계약을 한 후 새집이 다 지어질 때까지 집값을 나눠 내는 게 보통입니다. 집값을 할부 형태로 미리 나눠 내고 완성되면 들어가 사는 방식을 '선(先)분양제'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소비자들과 정치권 일각에서 이 방식과 정반대인 '후(後)분양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소비자가 물건을 보고 고를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 선진국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이 불붙기 시작한 건 최근 한 건설사가 경기도 신도시에서 지었던 주택에 하자 보수 신청이 수만 건 접수되면서 부실 시공 논란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건설사의 부실공사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선분양제는 건설사에 유리한 제도인 반면 후분양제는 소비자에게 유리한 제도라는 주장에 소비자들이 고개를 끄떡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선분양제는 1977년에 도입됐는데, 당시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주택 수요는 폭발한 반면 국내에 집을 지을 건설사와 자본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당시 민간 기업도 돈이 너무나 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결국 정부는 '없는 제품'을 미리 파는 선분양제를 도입해 건설사가 미리 사업비용을 받아 제품을 만들면서 미리 팔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줬습니다. 도입 배경을 보면 선분양제는 건설사·시행사들에 유리한 제도라는 것은 '팩트(fact·사실)'에 가깝습니다.

물론 선분양제가 40년 가까이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소비자에게도 그만큼 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꺼번에 '목돈'으로 집값을 치를 능력이 부족했던 소비자 역시 할부 방식의 선분양제를 반겼습니다. 그 덕분에 주택공급은 빠르게 늘어났고 표면적으로 주택보급률도 100%를 넘게 됐습니다. 문제는 집값이 고공행진을 거듭하며 최소 수억 원, 많게는 수십억 원에 이르는 주택을 구입하면서 공사가 제대로 이뤄졌는지조차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에 소비자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건설사는 영업비밀을 이유로 아파트 건설원가를 세부항목까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습니다. 돈 낸 만큼 확실한 '품질'을 보장받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셈이죠. 게다가 최근 주택가격 안정이라는 요구에 따라 후분양제 도입이 더 큰 힘을 받고 있습니다. 선분양을 하면 향후 지어질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인 '분양권'이 생기게 됩니다.

문제는 대다수 아파트 당첨자들이 이런 분양권을 갖고 실제 해당 아파트에 입주하는 게 아니라 분양권을 팔아 시세차익을 챙기려는 가수요(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측될 경우 당장 필요가 없으면서도 일어나는 예상 수요)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투기 수요는 전반적인 집값을 올리는 '원흉'으로 지목되게 마련입니다. 후분양제 도입을 주장하는 측은 "후분양제에선 물건이 만들어진 다음 당시 시장가격과 아파트 층과 조망에 따라 집값이 결정되므로 결국 투기 수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문제는 시장경제에서 물건값이 '가수요' 등 한두 가지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물건값에는 무엇보다 공급량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데, 후분양제가 실시되면 아파트 지을 돈을 자체적으로 마련하지 못하는 건설사는 집을 지을 수 없어 결국 공급이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도 최근 정부가 짓는 공공주택에 먼저 시험적으로 도입해 효과를 지켜본 후 확대를 결정하겠다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집값이 불안한데 후분양제 전면 도입에 따라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 건설사들의 분양이 크게 줄게 되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수억 원짜리 물건을 보고 따지고 사는 건 분명 '비정상의 정상화'가 맞는데, 막상 정상화하자니 불똥이 겁나서 실행하기가 어려운 후분양제는 '판도라의 상자' 같기도 합니다.

[이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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