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박회수 초상'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화

박정호 2018. 1. 2.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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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 중국 사신 갔을 때 모습
서양인이 사실적으로 그린 반신상
고궁박물관 신민규 연구원 밝혀내
박회수 유화 초상. 작자 미상. 1833년. 52.8×70.4㎝.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얼굴 모습이 전반적으로 세밀하고 안정적이다. 자잘한 붓질을 반복해 피부감과 양감을 살렸다. 얼굴 외곽선에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색을 칠했고, 코끝과 이마, 눈동자는 비교적 밝게 처리했다. 굴곡지고 풍성한 옷 주름도 생생하지만 얼굴에 비해 필치가 소략하고 거친 편이다.

조선 후기 문신 박회수(朴晦壽·1786~1861)의 1833년 모습을 그린 유화 초상화다. ‘박회수 유화 초상’이 국내에 전해지는 유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사됐다. 가로 52.8㎝, 세로 70.4㎝ 크기다. 또 중국에서 제작된 조선 사신 초상화 가운데 서양인이 그린 유일한 작품으로 확인됐다. 종전에는 네덜란드 화가 휴버트 보스가 그린 ‘민상호 초상’(1898)이 가장 오랜 유화 초상으로 알려졌다. 신민규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원은 미술사 연구지 『미술자료』(국립중앙박물관 발행) 92호에 이 같은 내용을 주장한 논문을 발표했다.

박회수는 19세기 세도가문이었던 반남(潘南) 박씨 출신으로 조정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번 작품은 박회수가 중국 연행(燕行·사신의 일행으로 베이징에 가는 일)을 갔던 1833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실의 일상을 기록한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박회수는1846년 9월 헌종(憲宗) 어진(御眞·임금 초상화)를 평하는 자리에서 “신(臣)이 몇 해 전 연행 때 양인(洋人)에게 (초상) 한 본을 그리게 했습니다. 온전히 기름만 사용하여 그렸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기름기가 사라진 뒤에야 본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고 말했다.

박회수 초상은 현재 대전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후손들이 보관해온 작품으로, 2011년 대전박물관에 기탁됐다. 사모(紗帽·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 쓰던 모자)와 시복(時服·문무백관이 공무를 볼 때 입던 옷)을 착용하고 정면을 응시한 반신상이다. 표면에 약간의 오염물질이 묻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바탕은 종이이며, 채색 안료는 전체적으로 두께가 얇고 일정하다.

신민규 연구원은 “이 그림은 서양회화의 대표적 표현방식인 채색과 음영기법, 원근법을 극사실적으로 구사했다. 조선 후기에 유입된 유화 초상의 실증 자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이번 초상은 보존 방식도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초상화는 족자로 만들어 평소 궤 속에 넣어 보관한 반면 이번 작품은 족자로 만들지 않고 나무로 만든 보호곽(木龕)에 부착했다. 유화 안료가 떨어져 그림이 훼손되지 않도록 항상 퍼진 상태로 유지될 수 있게 했다. 보호곽 위쪽에는 고리를 만들고 끈을 매달아 족자처럼 벽에 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른 형태의 박회수 초상도 전해지고 있다. 1861년 그가 타계한 해에 이한철이 전통기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신 연구관은 “유화 속 인물은 중장년의 모습이고, 전통 초상은 노년 모습이기 때문에 두 인물의 생김새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 없지만 전체적 인상이나 수염이 자란 모습, 입 매무새가 닮았다”며 “유화 초상이 박회수 집안에 내려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림의 주인공을 박회수로 보는 데 무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 그림의 작가와 제작 장소를 알 수 없지만 19세기 전반 한국과 중국의 활발했던 문화교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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