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내부 착취구조 없애는 게 진짜 공영방송 정상화

입력 2018.01.08.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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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최근 2주 ‘방송계갑질119’ 채팅 참가자들 대화 1만 건 분석…
‘카메라 뒤 노동자’들의 갑질 폭로

‘방송계갑질119’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가장 자주 나온 단어 400개로 연결망 지도를 만들었다. 한 문단(메시지)에 들어 있던 단어끼리는 선으로 연결돼 있다. 함께 자주 나온 단어일수록 지도에서 거리가 가깝다. 전체 연결 수가 많은 단어는 크기도 크다. 400개 단어는 유사한 의미끼리 묶어주는 ‘보스뷰어’의 알고리즘에 따라 세 군집으로 나뉘었다.

‘방송계갑질119’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이하 채팅방)에선 주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을까. <한겨레21>은 지난해 12월20일부터 올해 1월2일까지 14일 동안 참가자들이 나눈 이야기 약 1만 건에서 명사를 추출해 분석했다. 그 결과 크게 세 가지 맥락이 등장했다. 첫째는 방송 스태프의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대한 불만, 둘째는 방송사-외주제작사-스태프의 위계질서 속에 착취가 재생산되는 구조, 셋째는 노조 결성 움직임이다.

분석 대상을 명사로 한정한 것은 채팅방에서 어떤 이슈가 주요 의제로 논의됐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파이썬’ 프로그램과 ‘날리지매트릭스’를 사용해 가장 자주 나온 명사 400개를 추출·정제·행렬화했다. 정교한 통계 알고리즘이 내장돼 있어 의미가 비슷한 단어들을 군집화(클러스터)하고 지도상에 그려주는 프로그램 ‘보스뷰어’도 활용했다.

물론 이번 분석은 한계가 많다. ‘방송계갑질119’에는 방송사 비정규직, 프리랜서, 외주제작사 직원, 독립PD, 방송작가 등이 들어와 글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익명 채팅방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구체적인 소속·직군·고용 형태를 확인할 순 없었다. 연령·성별 등 기본적인 통계 자료도 구하지 못했다. 소수 참여자가 발언의 다수를 차지해 대표성과 균질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공적 영역에서 제대로 발언 기회가 없었던 ‘카메라 뒤 노동자’ 수백 명이 모여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놓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이번 분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밤샘에 최저임금도 못 받아”

첫 번째 단어군집에는 방송 스태프들이 겪는 다양한 고충이 담겨 있었다. ‘돈, 페이, 월급’ 등 낮은 임금을 뜻하는 단어와 ‘잠, 밤샘, 시간, 알바’ 등 장시간 노동을 뜻하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몸, 건강, 마음, 눈물’ 등 신체·정신적 피로를 뜻하는 단어도 상위에 등장했다.

아이디 ‘연휴근무’가 남긴 글은 이를 요약해 보여준다. “7년차쯤 되는 PD와 작가도 실제 일하는 시간을 계산해보면 최저임금 안 될걸요? 실제 여러분 한 주에 몇 시간 일하십니까? 한 주에 하루 쉬면 그나마 다행이고 한 주에 2~3일은 기본으로 밤새우고.”

아이디 ‘구해줘’는 “드라마 보조작가 진짜 열악해요. 합숙하고 150만원 받기도 하도. 거기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잠자는 시간 빼고 깨어 있을 땐 무조건 일이고요. 자기 시간이란 게 없습니다ㅠ.ㅠ”라는 글을 남겼다.

방송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한탄하는 글 속에서도 낮은 연차의 조연출과 막내작가가 이중고를 겪고 있음을 드러내는 글도 있었다. 아이디 ‘변화가필요해’는 “법인카드 안 주고 조연출이나 막내작가 카드로 계산하게 한 다음 그 돈 안 돌려주고 떼먹는 회사들도 많습니다”라고 꼬집었다. 아이디 ‘김피뒤’는 “성추행 PD 처벌 못하나요? 성추행 후 그 제작사에서 아웃됐는데 또 다른 제작사에서 막내를 성추행해 막내작가가 그만뒀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방송사 진짜 적폐는 ‘스태프 착취’”

두 번째 단어군집에선 KBS, MBC, SBS, CJ E&M 등 주요 방송사에 대한 분노가 드러났다. 연결망에선 ‘방송사, 제작사, 갑질, 책임’ 등의 단어가 긴밀하게 결합돼 나타났다. 방송사가 외주제작사를 상대로 프로그램 제작비를 과도하게 깎아 방송 제작 환경을 열악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외주제작사에 근무하는 노동자로 추정되는 아이디 ‘너무한거아니니’는 “프로덕션(제작사)에 있는 입장에서 저희 페이가 올라가려면 회사에 남는 게 있어야 하는데… 없어서 요구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방송사 경영진뿐 아니라 정규직 기자와 PD들의 반성과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단어로는 ‘MBC, 파업, 정상화, 내부, 적폐’ 등이 연결돼 나타났다. MBC와 KBS 노조는 방송 공정성 회복과 적폐 청산을 기치로 내걸며 파업해왔다. 그런데 채팅방에선 경영진을 욕하기 앞서 자신들 내부에 쌓인 적폐부터 해결하라는 냉소적인 글이 다수 보였다.

아이디 ‘작가도노동자라고’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작가를 잘라버린 PD와 갑질하던 기자가 정의를 외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우스워 보였다”고 지적했다. 아이디 ‘abc’는 “파업했던 KBS, MBC 여러 사람들이 갑질을 한다면 그 사람 역시 저에게는 김재철(전 MBC 사장), 이현숙(방송 노동자에게 언어폭력을 가한 MBC의 CP)과 다름없다”는 의견을 남겼다.

최승호 신임 MBC 사장에 대해서도 기대 못지않게 날선 문제의식을 던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좌천당했던 사람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걸 정상화의 전부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방송 노동자들은 지상파 방송 안팎에서 착취당하는 비정규직 PD, 작가 등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게 진짜 정상화라고 주장했다. 아이디 ‘게으른 일개미’는 “MBC의 《시선집중》의 시선이 내부에도 머물고, 우리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 《PD수첩》이 내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이제 진짜 내부의 문제를 말할 때 MBC는 정상화될 것”이라고 적었다.

“노조를 만들자”

세 번째 단어군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노조’였다. 방송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아이디 ‘냥냥’은 “방송국 노조 있으면 뭐하나, 다들 정규직을 위한 활동이나 하고”라고 적었다. 방송국마다 노조가 있긴 하지만 비정규직과 프리랜서를 대변하는 노조는 최근 출범한 ‘방송작가노조’ 외에 마땅히 없는 현실을 지적한 말이다.

채팅방에선 노조를 만들자는 글이 다수 보였다. 아이디 ‘곰곰이’는 “노동권을 인정받고 4대 보험과 (표준근로)계약서 작성을 위해서는 노조 설립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아이디 ‘지원준’은 “PD, 작가, 촬영, 조명, 음향, 분장 등 방송 스태프가 총망라되는 산별노조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채팅방 분위기는 자신이 겪은 부당한 대우를 호소하고 그에 대해 도움을 구하는 상담에서 시작해 노조 설립 움직임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연결망에는 ‘(표준)근로계약서, 고용노동부, 방통위,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등의 단어가 긴밀하게 나타났다. 노조를 만들어 방송사와 직접 협상에 나서고, 법을 지키도록 정부 기구를 압박하자는 주장이 활발히 공유된 것이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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