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적폐 따까리".. 동료 판사 욕하는 판사들

조백건 기자 2018. 1. 9.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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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 뒤 익명게시판에 욕설·막말 도배
"행정처 개XX, 은따 시키자" 익명에 숨은 판사들 민낯
판사 게시판에 "청산의 대상" 등 PC 개봉 동의안한 법관들 맹공격
자제하자는 의견에도 집단린치
법조 원로들 "품격도 버리고.. 자질 의심케하는 사법초유 사태"

'양승태(전 대법원장) 적폐 종자 따까리들아' '니들의 쓰레기 같은 억지, 트집 잡기는 공해 짓거리야'…. 최근 판사들만 이용하는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이다. 김명수 대법원장 지시로 작년 11월 법원행정처에 판사 뒷조사 문건이 있다는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된 이후 판사들이 주로 행정처 출신 동료 판사를 향해 반말과 욕설을 담은 비난 글을 다수 올리고 있다. 아무리 익명 게시판이라 해도 판사들이 편을 나눠 동료 판사에게 이런 막말과 악담을 퍼붓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판사들 사이에선 "믿기 어려운 상황"이란 말이 나온다.

이 게시판에 올라온 글은 행정처에서 근무했던 판사들을 공격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김 대법원장이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재조사하라고 만든 법원 추가조사위원회는 지난달 판사 뒷조사 문건이 들어 있다는 의혹을 받은 행정처 컴퓨터 4대를 당사자 동의 없이 가져갔다. 이후 이 컴퓨터를 쓴 전·현직 행정처 판사 4명에게 삭제된 컴퓨터 파일까지 복원해 조사할 수 있게 동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해당 판사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추가조사위는 최근 강제로 컴퓨터를 개봉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판사가 행정처 판사 등을 향해 '적폐 새X들' '행정처 개XX' 같은 비난 글을 게시판에 올린 것이다.

법조계에선 "법복(法服)에 덮인 판사들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회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판사들이 패를 갈라 동료 판사를 적대시하며 갈등을 키우는 '밑바닥'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본지 통화에서 "법원에 큰일이 났다. 판사들이 스스로 품격과 자존심을 버린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중순 판사 익명 게시판엔 '동료들이라 어지간하면 품위를 지키려 했건만 참 더럽게도 물고 늘어진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삭제된 행정처 컴퓨터 파일까지 모두 복원해 강제 조사하려는 법원 추가조사위의 방침에 동의하지 않은 행정처 판사들을 비난하는 글이었다.

이 같은 영장 없는 강제 조사에 대해서는 법원 내에서도 헌법상 프라이버시권 침해, 형법상 비밀 침해 소지가 크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 속) 사적 정보를 핑계로 영장주의, 비밀 침해 어쩌고 찌질거리는 꼴이라니. 니들 판사 맞니? 니들이랑 엮이는 게 진심 부끄럽다 새X들아'라고 했다. 이어 '개억지 부리니까, 양승태, 임종헌(전 행정처 차장), 박병대(전 대법관) 뭐 이런 인간들한테 충성한 거 뿌듯하고 잠 잘 오니? 사법부에 똥 뿌리는 인간들아'라고 적었다. 이 글 밑에는 'ㅋㅋㅋ 내 말이' '사이다!'(속 시원하다는 인터넷 은어) 같은 댓글이 달렸다.

/이철원 기자

비슷한 시기 이 게시판에는 '법비(法匪·법을 악용하는 도적 무리) 청산!'이라는 제목의 글도 실렸다. 한 판사는 이 글에서 '법원 바깥의 법비 김기춘, 우병우는 이제 구치소에 있습니다만, 법원 내부의 법비들은 저항을 계속하고 있네요'라며 '그렇게들 영장주의 강조하시니, 진짜 검찰에 수사 의뢰해야 될 거 같네요'라고 썼다. 동료 판사를 도적에 비유한 것이다.

이후에도 일부 판사의 막말 비난은 계속됐다. 한 판사는 '행정처로 불러주신 분들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감읍해서는 충성을 맹세하고 빛나는 미래로 깔린 탄탄대로를 즐기며 엘리트로서 자부심에 넘치다가, 하던 구린 짓들이 통째로 발각돼 욕먹는데 입 닫고 억지 부리는 게 지금 니들 꼴'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조폭으로 변해버린 판사 나부랭이들아. 면전에서 침 맞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라'고 썼다.

일부 판사는 '동료 판사에 대한 막말은 자제하자'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가 집단 린치에 가까운 공격을 받았다. '너 혹시 처음부터 양씨(양승태 전 대법원장) 행정처 쉴드 치던(방어하던) 걔니? 니 패거리들은 사법부 안에서 영원히 은따(은근한 왕따)당하며 기피될 어둠의 집단으로 전락할 거란 거나 똑똑히 알아두렴' '너가 쓴 글이 쓰레기 냄새 난다' '당신이 (행정처 출신이 아니고) 냉정한 중립자라면 행정처 개XX라고 해보시지?'라는 글이 뒤따랐다.

이런 판사들의 행태에 대해 법조계 원로들은 우려를 나타냈다. 대법관 출신의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재판을 하는 판사들은 자기 생각이 있더라도 표현을 절제해야 한다"며 "그러지 않으면 법원 내 갈등을 조장하게 되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불안해한다"고 했다.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는 "법관들이 동료 법관에게 악플을 단다는 건 법관의 기본 자질을 의심케 하는 사법 사상 초유의 사태"라며 "국민이 이런 판사들에게 재판받고 싶어 하겠나. 판사들 스스로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있다"고 했다. 김현 대한변호사협회장은 "판사들이 공개적으로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고 했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은 지난해 초 행정처 간부가 법관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추진하던 '대법원장 권한 분산' 관련 세미나를 축소하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에서 비롯됐다. 이 연구회 소속 이탄희 판사가 당시 이 문제를 조사한 법원 진상조사위에서 "행정처 컴퓨터에 판사들을 뒷조사한, 비밀번호 걸린 파일이 있다고 들었다"고 진술하면서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진상조사위는 지난해 4월 이 의혹을 사실무근이라고 결론 내렸다. 일단 사법부에서 일단락 지은 것이다. 그러나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은 재조사를 강하게 요구했고, 김 대법원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법원 추가조사위원 6명 중 4명이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으로 꾸려져 편향성 논란까지 불거졌다. 김 대법원장도 이 연구회 1·2대 회장을 지냈다. 추가조사위는 전·현직 행정처 판사 동의 없이 판사들 컴퓨터를 강제 개봉해 논란을 키웠다. 영장 없는 압수수색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 의혹과 관련해 양 전 대법원장은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김 대법원장은 재조사 과정의 위법 시비로 검찰에 고발돼 있다. 전·현직 대법원장이 한꺼번에 검찰 수사 대상이 된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법원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검찰을 끌어들인 꼴이다. 법원으로선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데도 일부 판사들이 자중하기는커녕 완장 찬 듯 동료 판사들을 향해 막말을 퍼붓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법원장 출신 한 변호사는 "법원으로선 참담한 상황"이라며 "결국 재조사를 결정한 김 대법원장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고 이 사태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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