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31주기] "탁치니 억하고~"· "단 한순간도 사익을~" 등 희대의 거짓말은 무엇..

박태훈 2018. 1. 12.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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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열사 사망에 따른 정권 책임을 묻는 시위대. 박종철 열사 부인인 박정기씨의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라는 말은 모든 이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사진=박종철 기념관

21살은 가능성과 꿈이 무한대로 열려 있는 나이이다. 하지만 꿈 한번 제대로 피어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아까운 꽃이 있다.

박종철.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이던 그는 1987년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끔찍한 고춧가루 물고문 등을 받던 끝에 숨졌다.

당황한 정권은 이를 어떻게 수습할까 대책회의를 가진 끝에 희대의 거짓말, 3살 꼬마가 들어도 믿지 못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책상을 '탁'하고 내려치자 '억'하고 쓰러졌다"….

박종철 열사 사망 31년째를 맞아 희대의 거짓말, 거짓말로 들릴 수 밖에 없었던 거짓말을 모아 봤다.

▲ '탁'치니 '억'…1987년 1월 16일 강민창 치안본부장

1987년 1월 16일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쓰러졌다"라는 희대의 거짓말을 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3일 뒤인 19일 일부 경찰관이 금지한 고문을 해 박종철군이 숨졌다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진실을 숨긴 또 하자의 거짓말이었다. 사진=KBS 캡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경찰, 큰일 났어"라는 검찰 간부의 말을 듣고 파고들어 사건 다음날인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사회면 2단 기사를 내보내면서 알려졌다. 

서슬이 퍼렇던 독재정권 시절이었기에 신성호 기자는 그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잠을 청했다.

사건이 심찮치 않다고 느낀 정권은 이른바 대책회의를 거듭한 끝에 돌연사로 위장키로 모의했다.

1987년 1월 16일 경찰총수였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기자회견을 자청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말하던 강 본부장 자신도 뻔한 거짓말에 겸연쩍어 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영화 '1987'에서 강민창 본부장의 모습을 배우 우현씨가 맡아 열연했다.

너무 수준 낮은 거짓말에 여론이 들끓자 정권은 1월 19일 두명의 경찰관이 '물고문했다'고 발표하고 김종호 내무부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전격 경질하는 선에서 사건을 축소 은혜하려 했지만 국민들의 분노를 '탁'하고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정부는 여전히 수도에 있으며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했습니다"…1950년 6월 27일 이승만 정권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거짓말쟁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등 정부는 대전으로 몸을 옮겼지만 '정부는 서울을 끝까지 지키겠다'라는 방송을 해 많은 이들으로 하여금 피난갈 골든타임을 놓치게 했다. 

1950년 6월 27일 오후 1시 공보처가 특별방송을 통해 "의정부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였고, 상황이 좋아졌으므로 수원 천도 결정을 취소하였고, 정부는 여전히 수도에 있으며,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하였다, 국민은 국방군을 믿어야 한다"고 방송했다.

방송이 나갈 당시 이미 대전 밑으로 가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날 저녁 9시 대전 방송국에서 "동포 여러분(국민 여러분의 이승만식 표현) 안심하십시오"라는 특별 생방송을 했다.

이 방송은 이후 밤 11시까지 몇차례 되풀이 돼 피난짐을 꾸렸던 많은 이들이 다시 짐을 풀게 만들었다.

전의를 북돋우고 공포를 잠재우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해도 참 너무했던 거짓말이었다.

"반드시 적을 물리치고야 말겠다. 믿어달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 "은인자중하던 군은~,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복귀"…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5·16 쿠데타 성명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최고위원회 의장이 '임무를 마치면 군에 복귀한다'는 취지가 담긴 혁명공약을 뒤로 한 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3시 박정희 소장(당시 2군 부사령관)이 이끄는 쿠데타 세력은 서울에 입성한 직후 방송국을 장악, 새벽 5시 6대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은인자중 하던 군부는~"이라는 말로 시작된 혁명공약 중 마지막 부분은 "⑥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고 돼 있다.

정권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마음뿐이다라는 점을 강조, 민심을 얻으려 했지만 알만한 사람은 '거짓말'임을 금방 눈치 챘다.

거짓말이 미안했는지 박정희 장군은 1963년 8월 30일 5군단에서 열린 전역식에서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고 외쳤다. 

▲ "단 한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습니다"¨2016년 11월 29일 박근혜 3차 대국민 담화

2016년 11월 29일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라는 내용의 3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YTN 캡처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로 코너에 몰릴대로 몰렸던 2016년 하반기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최소한의 체면을 살릴 기회를 여러차례 놓치고 말았다.

해명을 내놓을 때마다 의혹은 더 깊어갔고 급기야 파면당한 첫 번째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해명의 결정판은 2016년 11월 28일 오후 2시30분 전국에 생중계방송된 '3차 대국민 담화'였다.

담화의 요지는 '모은 것을 내려놓고 국회의 처분에 따르겠다'라는 것이었지만 국민들이 기억하는 3차 담화는 "한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라는 말이다.

박근혜 그 자신은 '청렴'을 상징처럼 내걸고 그렇게 살아 왔다고 자부했기에 일부 국민은 "그래 최순실이 나쁘지, 박 전 대통령이 개인적 이익을 취했겠는가"라고 통크게 이해한 반면 상당수 국민은 거듭된 해명 등을 볼 때 "단 한번도, 단 한푼도"라며 의심을 했다.

이런 가운데 검찰은 국가정보원이 30억원에 이르는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상납했다며 관계자와 박 전 대통령을 재판에 넘겼다.

검찰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국정원 특활비로 측근들에게 격려금 명목으로 선심을 썼다. 또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의 개인적 용도(기치료, 의상 등)에도 특활비를 이용했다고 보고 있다.

국민의 돈으로 측근을 챙긴 것 자체가 사익추구라는게 검찰 판단이다.

살면서 단 한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만은 전국민앞에 맹세하진 말았어야 했다.

▲ "승객들은 자리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선실에서 대기하십시오"…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이준석 선장 등은 뺑소니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46분 세월호를 버리고 구명정에 옮겨 타고 있던 이준석 선장. 선내에서 9시50분까지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이 이어졌고 이준석 선장 등은 '나 몰라라'하며 도망쳤다. 사진=해양경찰청 제공

제주도 수학여행에 부푼 꿈을 안고 있던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등을 태운 세월호는 2014년 4월 16일 진도 맹골수도 부근에서 침몰, 304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세월호가 참담한 것은 가라 앉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방송 됐지만 탑승객 476명 중 생존자는 단 172명이 불과했기 때문이다.

대형참사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지적된 가운데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선원들의 거짓말이 결정적 노릇을 했다.

4월 16일 오전 8시51분 단원고 학생 고 최덕하군이 119에 최초 신고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지만 이준석 선장 등 선원들은 구조요청, 자체수습 등 우왕좌왕했고 9시3분 "승객들은 자리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이라는 선내방송을 내 보냈다.

이후 "움직이지 말고 선내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을 9시50분까지 무려 6차례나 내 보냈다.

단원고 학생과 승객들은 선원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뛰어 내려라, 탈출하라"고 했다면 그렇게나 많이 아까운 목숨이 희생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팽목항 선착장에 마련된 임시 진료소에서 치료와 함께 체온보호를 위해 나눠 준 담요를 걸치고 있는 이준석 선장. 자신이 세월호 선장임을 밝히지 않은 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으로 행세했다. 사진=SBS 캡처

이준석 선장은 내의만 있은 사복차림으로 9시46분 승객들을 버려두고 구명정에 올라탔다. 이후 팽목항에서 응급치료를 받았고 병원 침대에 누웠지만 "내가 죄많은 선장이다"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무기징역형을 받았지만 세월호가 한 거짓말에 따른 정당한 대가인지는 정말 알 수 없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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