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로얄]지역갈등 끝판왕 벨기에..독일서 수입한 왕실이 해결사?

홍주희 2018. 1. 1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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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는 고유한 가치가 없는, 역사의 사고로 생긴 나라다”

국가에 대한 모독이 될 법한 이 발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벨기에의 이브 메테름 전 총리입니다. 총리 취임 전, 북부 플랑드르계 정당인 기독민주당 당수로 재임하던 2006년의 발언입니다. 당시 그는 “네델란드어를 배울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며 남부 왈롱 지역민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도 했죠.
2013년 7월 21일 필리프 벨기에 국왕이 즉위했다. 브뤼셀에 엤는 왕궁 발코니에서 국민에게 인사하는 벨기에 로열패밀리. 오른쪽은 이날 아들에게 양위한 알베르 2세 부부, 가운데는 필리프 국왕과 마틸디 왕비. 앞줄의 어린이들은 국왕 부부의 네 자녀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7월 21일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브뤼셀 생 미셸 성당으로 향하는 필리프 국왕 가족. 7월 21일은 초대 국왕인 레오폴드 1세의 즉위를 기념하는 벨기에의 국경일이다. 왼쪽부터 엘레오노레 공주, 가브리엘 왕자, 마틸다 왕비, 필리프 국왕, 엘리자베스 공주, 에마뉘엘 왕자. [ EPA=연합뉴스]
━ “벨기에를 통합하는 건 맥주·축구·국왕” 유력 정치인이 자신의 나라를 깎아내리고, 타지역민을 대놓고 비하할 만큼 벨기에의 국가 정체성과 소속감은 흐릿합니다. 내가 속한 지역이 훨씬 중요한 거죠. 지역색이 뚜렷하고, 그로 인한 지역 갈등도 첨예합니다. 벨기에라는 나라가 아주 느슨하게 결합된 공동체라는 뜻이고요.
벨기에 국기.
벨기에 인구(약 1130만 명)의 59%를 차지하는 플랑드르와 40%를 차지하는 왈롱은 사용하는 언어부터 다릅니다. 각각 네델란드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죠. 당연히 문화도 다릅니다. 경제력 차이도 큽니다. 잘 사는 플랑드르는 “가난한 왈롱이 우리의 세금을 쓴다”며 늘 불만이고, 아예 분리독립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2016년엔 민족주의 정당 새플랑드르연대(N-VA) 소속인 플랑드르 자치정부의 한 장관이 “10년 뒤엔 벨기에라는 나라가 없어지길 바라며,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밝혔을 정도니, 우리의 영호남 갈등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입니다.

이처럼 언제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를 하나로 묶어주는 게 있습니다. 메테름 전 총리도 언급했던, 맥주와 국가대표 축구팀 그리고 국왕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왕실은 어느 지역 출신이기에 벨기에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걸까요.

━ 신생 독립국 벨기에, 국왕을 찾아라
벨기에 왕실의 문장. [위키피디아]
벨기에는 1830년 네델란드에서 독립했습니다. 국가를 세우면서 입헌군주제를 선택했죠. 그리고는 왕이 될만한 인물을 물색합니다.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 드 보아네르,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 필립의 아들인 느무르 공작이 후보로 거론됐지만 성사되지 못합니다.

당시는 나폴레옹의 패배 뒤 대(對) 프랑스 전쟁을 이끌었던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영국 등 열강이 주도한 빈 체제가 수립됐을 때입니다. 프랑스의 팽창주의가 종식되고 마침내 힘의 균형을 되찾았는데, 프랑스 출신이 벨기에를 접수하는 건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등장한 후보가 독일의 공국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레오폴드였습니다. 앞서 독립한 그리스로부터도 왕의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불안정한 나라는 싫다”며 고사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벨기에의 제안은 받아들였고 1831년 7월 21일 레오폴드 1세로 즉위합니다. 이날은 벨기에의 국경일이 됐죠.
벨기에의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 독일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인 그는 신생독립국 벨기에의 제안을 받고 왕에 즉위했다. [위키피디아]
사실 레오폴드 1세는 작은 신생국가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벨기에 국왕 자리를 내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뒤이어 즉위한 레오폴드 2세가 콩코를 삼킨 것도 ‘작은 나라’ 컴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설이 있고요.

어쨌든 레오폴드 1세는 뛰어난 외교술로 벨기에의 독립을 지켰고, 아들인 레오폴드 2세에게 왕위를 무사히 넘겨 입헌군주제를 공고히 합니다.

━ 독일에서 수입한 왕가…姓도 ‘벨기에’로 바꿔
벨기에의 4번째 왕인 레오폴드 3세와 스웨덴 아스트리드 공주의 결혼사진. [위키피디아]
1969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 부부(왼쪽)를 만난 벨기에 5번째 왕인 보두앵 국왕과 파비올라 왕비.[위키피디아]
일종의 ‘독일 이민자’ 출신인 벨기에 로열패밀리는 수십년 간 ‘작센-코브르크-고타(Saxe-Coburg-Gotha)’라는 성(姓)을 사용하면서 뿌리를 지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이미지가 나빠지면서, 1920년 성을 ‘van Belgie’, ‘de Belgique’, ‘von Belgien’로 바꾸는데요, 각각 네델란드어·프랑스어·독일어로 ‘벨기에의(of Belgium)’를 뜻하는 말입니다. 벨기에의 공식 언어가 셋이라 성도 각각의 언어로 따로 둔 것이죠.

의도하지 않았지만, 독일계 가문을 왕가로 섭외한 것은 플랑드르와 왈롱 양쪽 모두에 공평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그나마 “왕이 벨기에를 통합해 준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테고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플랑드르에선 왈롱보다 왕실에 대한 호감도가 현저히 낮을 뿐 아니라, 왕실 따위 필요 없다는 여론도 높습니다. 분리독립에 방해가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현재의 필리프 국왕이 즉위할 때도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웃사이더’라며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물론 국왕은 이중언어 교육을 받았고, 네델란드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사용합니다. 다만 프랑스어를 더 편하게 사용할 뿐인데, 플랑드르 사람들은 그게 싫은 거죠.
벨기에 브뤼셀에 엤는 왕궁. [위키피디아]
━ 국왕의 불륜 폭로, 배후엔 분리독립파? 이처럼 플랑드르 사람들이 왕실을 싫어하다 보니 1999년 알베르 2세의 불륜 스캔들이 벨기에를 휩쓸었을 때, 그 배후에 플랑드르 정치인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발단은 당시 18세인 학생이 출간한 알베르 2세의 부인, 파올라 왕비의 자서전입니다. 물론 왕실이 공인한 자서전은 아닙니다. 책엔 알베르 2세가 1966년부터 18년간 시빌이라는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지속했고, 그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는 내용이 실렸죠. 존경받던 왕실에 핵폭탄이 떨어졌습니다. 마침 책이 출간된 시기도 문제였습니다. 노총각이었던 당시 필리프 왕세자가 약혼을 앞둔 시점이었죠.

책의 내용은 사실무근이 아니었는지 왕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해 크리스마스 대국민 담화에서 알베르 2세는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도 하죠. “약 30년 전 우리 부부도 위기를 겪었고, 오랜 시간 어려움을 극복한 뒤 깊은 이해와 사랑을 되찾았다” 벨기에 언론은 이 담화를 알베르 2세의 우회적인 불륜 인정으로 봤습니다.

알베르 2세의 혼외 딸이라고 주장하는 델피네 뵐(왼쪽). 딸과 함께 자신의 책에 사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와는 별개로 의문도 제기됐죠. ‘왕실의 경사를 앞두고 10대 학생이 국왕의 불륜이 담긴 책을 썼다?’ “책의 진짜 저자는 독립에 방해되는 왕실을 뒤흔들려는 플랑드르의 극우 인사”라는 주장이 나올만 했던 겁니다.

━ 친자확인 소송 직후 퇴위한 알베르 2세 시간이 흘러 잠잠해졌던 알베르 2세의 ‘과거사’는 2013년 6월 막장 드라마 급으로 재등장합니다.

책에 등장했던 혼외자, 델피네 뵐이 알베르 2세와의 친자관계를 증명하겠다며 DNA 검사와 왕실가족의 증언을 법원에 요청한 겁니다. 뵐은 “재산을 노리는 것 아니다. 딸로 인정받고 싶다”는 입장이었고, 벨기에 왕실은 “사생활이라 노코멘트”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알베르 2세와 파올라 왕비. [EPA=연합뉴스]
그리고 7월 알베르 2세는 아들에게 왕위를 넘긴다고 발표합니다.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물러난다”는 게 공식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스캔들로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죠.

당시 뵐이 제기한 소송은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국왕 신분이었던 알베르 2세의 면책 특권 때문에 DNA 검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왕이 바뀌고 알베르 2세가 더는 면책특권을 누릴 수 없게 되자 뵐은 소송을 다시 제기했는데요, 2017년 벨기에 법원은 DNA 검사 없이 “알베르 2세는 뵐의 법적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판결합니다. “생물학적 유대만이 부녀 관계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며 가족 구성원 사이의 통합 같은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뵐은 승복하지 않고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지난해 7월 31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페젠대일 전투 100주년 행사가 열린 벨기에 조네베커에 모인 영국과 벨기에의 로열 패밀리. 왼쪽부터 영국의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 필리프 벨기에 국왕, 찰스 영국 왕세자, 마틸다 벨기에 여왕, 윌리엄 영국 왕자,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EPA=연합뉴스]
다음 편에선 벨기에 왕실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레오폴드 2세(1835~1909)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콩고를 사유지로 만들어 자신의 놀이터이자, 상아와 다이아몬드가 가득한 보물상자로 여겼던 그는 벨기에의 ‘흑역사’입니다. 광대한 식민지를 가졌던 영국·프랑스조차 혀를 내두를만큼의 극악무도한 식민 지배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입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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