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그저 할 일을 했을 뿐.." 세상을 바꾼 1987 주역들의 선택

신혜정 입력 2018. 1. 15. 04:46 수정 2018. 1. 1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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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당시 세상을 바꾼 주역들. 왼쪽부터 의사 오연상, 검사 최환, 교도관 안유 한재동.

‘그들의 선택이 세상을 바꾸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1987년 6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 포스터의 중심에 작게 쓰여진 이 문구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31년 전의 민주화 운동은 자신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한 이들이 만들어낸 역사였다는 얘기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영화 속 주인공들을 한국일보가 최근 만났다. 고(故) 박종철 열사의 시신을 처음으로 검안했던 내과의사 오연상(60)씨, 시신을 보존하고 부검을 명령했던 최환(74)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 사건이 축소ㆍ조작됐다는 사실을 교도소 밖으로 전한 교도관 안유(74)ㆍ한재동(71)씨. 그들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본 대로 얘기하자”… 내과의사 오연상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 검안의였던 오연상씨가 지난 4일 서울 흑석동 오연상내과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고은PD.

“그때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냥 얼버무렸다면 의사를 그만뒀거나 평생 괴로워하며 살았을 겁니다.” 31년 전 중앙대 용산병원 내과 전임강사였던 오연상씨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씨의 사망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목격한 상황을 다음날 찾아온 기자에게 알렸다. “바닥에 물이 아주 많았다. 욕조도 있었고. 인공호흡을 하느라 땅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가운 끝자락이 흙탕물에 다 젖었다.” 물고문을 암시하는 그의 말은 ‘심장쇼크사’라는 경찰의 발표와 전혀 달랐다. 사건의 진실을 규명할 첫 단서였다.

진실을 말하기까지 젊은 의사는 밤새워 고민했다. “경찰의 발표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물고문을 직접 보진 못한 상황이었으니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본 대로 얘기하자’였다.

이후 오씨는 검찰과 신길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고문 등 직접적인 고초를 당하진 않았지만 그를 괴롭힌 건 따로 있었다. 영화 속 대학생 ‘연희’의 대사처럼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는 시선이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 가족 생각은 안 하냐’ 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현재 서울 흑석동에서 내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자랑할만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고 했다. “의사로서의 양심을 버리지 않고 진실을 말한 것만큼은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열하는 유족 보며 고문 시비는 없애겠다 다짐”… 검사 최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담당 검사이자 부검을 지시했던 최환 변호사가 지난 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한설이PD.

1987년 1월 14일 밤. 서울중앙지검 최환 공안부장의 사무실에 들이닥친 경찰은 다짜고짜 ‘빨리 좀 처리해 달라’고 했다. 조사받던 학생이 심장쇼크사로 사망했는데, 부모가 오늘 안에 화장하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고문이 있었음을 직감했어요. 내일 이야기하자고 경찰을 돌려보냈죠.”

그의 태도는 경찰로선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당시 경찰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공안검찰과 늘 함께 일해온 사이였다. ‘우리 편이니 넘어가 주겠지’라고 여겼을 터였다. 그러나 최 검사의 생각은 달랐다. “매일 아침 지검으로 출근할 때 소복을 입고 오열하는 분들과 마주쳤어요. 왜 우리 아들, 우리 오빠를 고문하느냐는 항의가 많았죠. 그 때마다 내가 공안부장을 얼마나 할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고문 시비는 없애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출근한 최 검사는 부검을 지시했다. “밤새 동생 집에 피신했는데 집에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왔다고 하더라고요. 고문을 확신했죠.”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으로부터 ‘밤길 조심하라’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

“‘그깟 대학생 하나 죽은 것 갖고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어야 되겠냐’는 말이 제일 싫었습니다. 당시 정권의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었어요. 나중에 제가 먼저 떠난 그의 영혼을 만나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거잖아요.” 서울지검장이던 1995년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을 내란 및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시켰던 최 검사는 1999년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비둘기 역할, 사회에 작은 기여”… 교도관 안유ㆍ한재동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음을 세상에 알렸던 전 영등포교도소 교도관 안유(왼쪽), 한재동(오른쪽) 씨가 지난 5일 경기 안양시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고은 PD

1987년 2월19일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씨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던 대학생 사건에 책임을 지고 들어온 경찰 조한경ㆍ강진규씨의 면회를 참관하고 있었다. 특별면회로 찾아온 동료경찰은 두 사람을 회유하려 했다. ‘재판은 빨리 받도록 해주겠다’, ‘내년이면 특별사면으로 풀려날 거다.’ 조씨는 고문에 가담했던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의 이름을 말하며 반발했다. 안 계장은 손을 떨며 업무일지에 이들 이름을 적었다. 이 내용은 당시 교도소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에게 전해졌고, 당시 영등포교도소 철공담당 한재동씨와 전직 교도관 전병용씨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진실을 알리는 ‘비둘기’ 역할을 한 두 사람이었지만 안유ㆍ한재동 전 교도관의 당시 지향점은 많이 달랐다. 한씨는 이전부터 독재정권의 양심수를 위한 ‘비둘기’ 역할을 해왔다. 그는 “공무원은 정권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반면 안씨는 직분에 충실했던 공무원이었다. “교도소 질서 책임자였기 때문에 계구를 써가며 학생들을 진압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결정을 한 건 “내가 안 사실이 범죄였고, 독재정권이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이 비둘기였음을 당당히 밝혔던 한씨와 달리 안씨는 박종철 열사 25주기인 2012년에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해자의 편이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죠. 그저 사회에 작은 기여를 했다는 보람만 있을 뿐입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mailto: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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