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김용희의음식문화여행] 겨울밤에 생각하는 인생의 맛, 메밀묵

황온중 입력 2018.01.16. 21:15 수정 2018.01.16. 23:19

삶을 맛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맛일까.

땀과 눈물이 묻은 짠맛? 사랑스러운 달달한 맛? 아니면 고통스럽기만 한 쓴맛? 아니 신산한 삶이어서 신맛? 겨울철 한파로 창문가 바람소리만이 눈발과 함께 와서 잉잉거리며 우는 며칠간이다.

메밀묵은 '어떤 맛'이 나는 음식이 아니다.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맛이라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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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맛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맛일까. 땀과 눈물이 묻은 짠맛? 사랑스러운 달달한 맛? 아니면 고통스럽기만 한 쓴맛? 아니 신산한 삶이어서 신맛? 겨울철 한파로 창문가 바람소리만이 눈발과 함께 와서 잉잉거리며 우는 며칠간이다. 저토록 오랫동안 울어대는 바람은 어느 들녘과 어느 대양을 지나 여기에 당도한 것일까. 겨울은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겨울이 많은 러시아에서 철학과 사상이 발달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어둑하고 긴 겨울밤 바람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릴 적 정겹던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다. “찹쌀~떡~, 메밀~묵~.” 요즘이야 야식이 발달할 대로 발달돼 온갖 메뉴를 야식으로 시켜먹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야식이랄 게 딱히 없었다. 겨울밤은 입은 심심하고 할 일은 없다. 뭔가를 먹고는 싶은데 문풍지를 떨며 울고 있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자면 골목에서 어김없이 찹쌀떡, 메밀묵 장수의 목청 높은 소리가 들려온다.

메밀은 찬 성분으로 원래 여름철 음식이다. 그런데 겨울밤에 왜 야식꾼은 메밀묵을 외치며 골목을 누비고 다녔을까. 박목월 시 ‘적막한 식욕’은 그에 대한 이유를 알려주는 시다.

“모밀묵이 먹고 싶다/그 싱겁고 구수하고/못나고 소박하게 점잖은/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 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허전한 마음이/마음을 달래는/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메밀묵은 ‘어떤 맛’이 나는 음식이 아니다. ‘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無)맛’이다. 그만큼 싱겁고 구수하다. 어쩌면 인생이란 단맛도, 짠맛도, 쓴맛도, 신맛도 아닌 그냥 ‘무(無)맛’인지 모른다. 적막에 가까운 맛인지도.

하여 언젠가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날은 올 터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방에 그 누군가가 먼저 살았듯 내가 죽고 나면 또 누군가가 이 방에 살며 씻고 먹고 잠을 잘 것이다. 온 우주는 한없는 응원으로 일생을 다해 나를 위로해 주는 듯하지만 인간은 끊임없는 발걸음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삶의 법칙이다. 좌충우돌 삶과 일대 사투를 벌이며 격렬하게 살아가지만 삶의 마지막은 무(無)다.

삶이란 결국 무로 돌아가기 위한 악전고투다. 인생의 허전하고 쓸쓸한 적막을 닮아 있는 맛. 그것이 메밀묵의 맛이란 것을 시인은 어떻게 그렇게도 일찍 간파했을까. 시인은 저승 갈 때 이웃 양반을 알아보고 서로 불러 마지막 주막에서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누며 먹는 쓸쓸한 음식이라 노래한다.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맛이라 노래한다.

메밀묵은 심심하고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일생을 다하고 입 끝에 남는 마지막 적막한 맛. 겨울밤 야식꾼은 그 뜻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메밀묵을 그렇게 목청껏 외치고 다녔는지 모른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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