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3년 키운 외손주들 떠난 날 샤워실서 혼자 펑펑 울었죠"

정석희 입력 2018.01.18. 03:09 수정 2018.01.1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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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행복입니다] 75세 할아버지의 육아 일기
'5분 대기조'처럼 아이들 뒷바라지
일한다고 살림 한번 안해본 내가 기저귀 갈고 밥 먹이며 아빠 노릇
힘들었지만 마음껏 사랑했던 시간.. 내 생애 다시 찾아온 봄날이었다

눈 뜬 지 두어 시간 지난 뒤 조용히 새벽 신문을 집어온다. 일흔다섯 노인의 아침이란 길고 적막한 법. 하지만 고요는 잠시뿐이다. 올해 아홉 살, 일곱 살 먹은 손자 두 녀석이 이불을 몸에 말고 깔깔거리는 소리, 아침밥 안 먹는다고 꾸중 듣다 또 킥킥대는 소리, 아는 영어·한자를 서로 견줘보느라 커지는 목소리…. 그 어린 것들의 쿵쾅대는 심장 소리로 온 집안이 가득 찬다.

우리 부부의 집이 어린아이 소리로 채워진 건 11년 전부터다. 장성한 4남매 모두 제자리 잡고 하나둘 결혼하니,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허전했다. "자유롭게 여행이나 다니자"고 했지만, 평생 자식 키우는 보람 말곤 몰랐던 우리가 그렇게 근사한 노인이 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잠 정석희씨가 첫 손주를 돌보기 시작할 무렵, 아이와 함께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할아버지도 손주도 세상 누구보다 편안한 모습이다. 정씨 부부는 지난 2006년부터 외손주 둘과 친손주 둘을 맡아 키워 왔다. /정석희씨 제공

걱정은 웬걸, 큰딸과 둘째 딸이 50일 간격으로 첫아들을 낳았다. 몸조리하러 친정에 온 딸들과 첫 손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헛헛하던 마음이 묘한 흥분으로 채워졌다. 주변에서 들은 대로 "우리 인생을 즐겨야지, 손자 안 봐줘"라고 호언장담했었지만, 막상 아기들은 너무 여리고 너무 예뻤다. 큰딸은 막 승진을 했고 작은딸은 박사 과정에 들어간 참이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일하는 여성의 육아에 대한 지원 기반과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못했다. 수심이 가득한 딸들에게 뒷일 생각 않고 "애 걱정 하지말고 너희들 할 일 해"라고 해버렸다.

예전에 나는 바깥일 한다며 아내에게 살림과 육아를 모두 떠맡긴, 그 시절 흔한 남편이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아기들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이고, 잘 때까지 안아 얼러야 했다. 어쩌면 그렇게 한꺼번에 배고프고, 밤낮을 바꿔 자는지! 고것들이 기어다니다 잡고 일어서기 시작하자 온 집안은 흉기가 됐다. 가구 모서리부터 문짝, 주방도구, 볼펜 한 자루까지 그대로 둬도 좋은 것이 없었다. 서로 꼬집고 물고 밀치는 일은 손 쓸 새 없이 벌어졌다. 아이 얼굴에 상처라도 생기면 제 어미들에게 미안해 죄인이 됐다.

우리 부부의 몸에선 늘 파스 냄새가 진동했다. 지인들은 우리 처지를 몹시 딱하게 여겼다. '나도 결국 늙어서 애나 보게 되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렇게 3년여 보내고 나니 큰딸 직장에 어린이집이 생기고, 둘째도 학위를 받고 한숨 돌리게 됐다. 손자들이 옷과 장난감, 숟가락까지 다 챙겨 제 집으로 떠나는 날, 나는 혼자 샤워실에 들어가 펑펑 울어버렸다. 처음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티 없는 교감을 나누면서 마음껏 사랑하고 헌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내 생애 파릇한 봄날이 스러지는 듯했다.

아이들을 보낸 뒤에도 한동안 제 부모들 일이 바쁠 때나 동생을 봤을 때, 갑자기 아플 때 뒷감당은 '5분 대기조'인 우리 몫이었다. 아직 어린 녀석들에겐 우리 품이 편안했고, 우리 집 앞 소아과 선생님을 봐야 안심이 됐다.

외손자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 한숨 돌리나 했더니, 이번엔 순탄한 줄 알았던 아들네가 뜻하지 않게 와르르 무너졌다. 아들이 인생에서 처음 맞닥뜨린 불운 속, 아무것도 모르는 네 살, 두 살 먹은 친손자들이 덩그러니 남았다. 게다가 큰놈은 발달장애 소견까지 있었다. 우리가 어미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겁이 났다. 그러나 나와 내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조건 사랑하고, 클 때까지 키워내는 일' 아니었나. 더 이상 재고 따지지 말자고 했다. 눈물을 삼키며 아이들을 안았다.

한없이 약해 보이던 친손자들은 단단하게 자라고 있다. 걱정이 컸던 큰아이는 초등학교에서 수학과 글쓰기, 축구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일 정도가 됐다. 우리 덕이 아니라 저희들이 이 세상에서 해내야 할 몫이 있기 때문이리라. 제 아비가 "할아버지, 할머니 고맙습니다" 인사를 시켜도 손사래를 친다. 이 아이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을 도리어 우리가 고맙게 여길 날도 올 것이다. 초등학교 5·6학년이 된 외손자들은 요즘도 우리를 만나면 와다다 달려와서 껴안고 볼에 뽀뽀한다. "너희들 여기서 살던 거 생각나?" 물으면 멋쩍게 웃는다. 내 작은 노고쯤 알아주지 않으면 어떠랴. '애 봐준 공 없다'고들 하지만, 손자들이 우리에게 준 사랑을 감히 그런 식으로 계산할 수 없다.

필자 정석희: 1943년 경남 진주생. 한일은행 퇴직 후 아내와 함께 외손자 둘을 3년 키웠고, 친손자 둘을 5년째 돌보고 있다. 수필집 '10년간의 하루 출가'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