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약 갖고 오면.." 채팅앱서 성관계 미끼로 함정 수사

손현성 입력 2018. 1. 18. 04:45 수정 2018. 1. 2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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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리포트, 한국이 위험하다] <3>좀 이상해: 개운치 않은 수사와 재판

#1

경찰, 중독자 갈망 이용해 붙잡고

검거된 여성을 수사 미끼 동원도

“끊고 싶은 사람 또 죄 짓게” 지적

#2

수사기관은 실적주의 논란에 반박

“마약사건 특수성 고려한 합법적 수사

없던 범의를 유발한 것은 아니다”

마약하는 여성으로 가장해 마약과 함께 성관계를 하자고 유혹하는 경찰의 채팅 화면 캡처. 상대 마약 중독 남성은 약을 구해 갔다가 검거.

50대 초반 남성 한모씨. 2016년 10월 즉석만남 채팅앱을 켰다가 한 아이디에 꽂혔다. ‘차가운 술 좋아 여 34세’. ‘술’은 마약세계에서 ‘필로폰’으로 통하는 은어다. 채팅방 이름도 ‘지금 가지고 계신 분’. 이는 여성이 ‘술’을 들고 오는 남자와 성관계를 즐기겠다는 유혹의 메시지다. 채팅방으로 빨려 들어간 한씨에게 아이디의 여성은 호텔방 만남을 제안하고 ‘주입하자마자 애무해달라’는 등 성적 욕구를 한껏 자극하는 말을 쏟았다. 흥분한 한씨는 당시 필로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여러 경로로 어렵게 구해 서울 성북구 호텔에 갔다. 곧장 뒤따라온 사람은 경찰 수사관들. ‘마약류 소지죄로 체포.’ 애초 그런 여자란 없었다.

중독자 뇌질환 특성 이용한 ‘미끼 수사’

수사기관이 마약 중독자의 뇌 질환적 특성을 이용해 검거하는 수사기법은 실적주의 논란이 많다. 경찰이 직간접적으로 낯뜨거운 표현까지 써가며, 평소 마약 중독자의 ‘갈망’을 자극적으로 끄집어내는 함정수사로 투약자를 대거 잡는 방식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마약 중독자 뇌는 처음 접해본 쾌감을 고스란히 저장하고 지우지 않는다. 김영호 을지대 중독재활복지학과 교수는 “필로폰 투약자 90%가 성관계가 목적”이라고 말했다. 마약 중독자 김모(52)씨는 “전과 10범이 넘는 마약사범도 채팅의 위험을 뻔히 알면서도 쾌감 생각에 젖어 ‘괜찮겠지’하다가 걸려들 만큼 강력한 덫”이라 말했다.

앞서 마약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한씨는 치료가 필요한 처지였는데 병원 대신 구치소로 갔다. 1ㆍ2심에서 징역 10월형(다른 투약 건 포함)을 받은 한씨 측은 “죄를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참고 살던 중독자에게 자극을 던져 잡는 현 수사 관행의 문제를 판단 받고 싶다”며 상고해 대법원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약점 잡힌 여성 앞세워 무더기 실적

또 다른 논란은 수사기관이 약점 잡힌 여성 투약자를 미끼수사에 동원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여름 30대 초반의 갓난 아이 엄마 A씨는 서울 서초동 한 변호사 사무실을 봄에 이어 또 찾았다. “더는 못하겠어요.” 그녀는 울먹였다. A씨 사정은 이랬다. 그녀는 지난해 봄 투약을 하다 수사기관에 걸렸다. 죄는 인정하지만 아이가 있어 어떻게든 구속만을 피하고 싶던 A씨는 그 대가로 마약 중독 남성을 잡는 ‘작업’ 선봉에 섰다. 그녀는 현란한 마약계 은어를 구사하며 채팅앱에서 성적 유혹을 던져 한 명씩 끌어들였다. 없던 마약도 구해갈 만큼 남성들은 그녀가 하자는 대로 했고, 그렇게 그물망에 걸려들어 마약소지죄로 검거된 마약중독자만 20여명이다. 그녀는 “더 큰 죄책감에 사로잡혔다”고 털어놨다. 그녀는 현재 약물 외래치료를 받고 있다.

이런 식으로 수사기관은 실적을 쌓는다. 마약사범 변호 경험이 풍부한 곽준호 법률사무소 청 대표변호사는 “‘성관계’ 미끼를 물고 붙잡힌 투약자가 제가 아는 사례만 지난해 100여명”이라 했다.

수사기관은 마약사건의 특수성이 고려돼야 한다는 취지로 반박한다. 마약사건 담당 수사기관 관계자들은 “워낙 적발이 어려운 마약 공급선을 잡기 위해선 소지자나 투약자를 검거해 상선(우두머리)을 불도록 해야 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투약자 입장에서도 약을 끊으려면 마약을 교부ㆍ판매한 자를 실토해 접촉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합법적인 수사기법”이라고 반박한다.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든다. 판례는 함정수사를 ‘기회제공’과 ‘범의(犯意)유발’로 구분한다. 어차피 약을 할 의사가 있는 자에게 수사기관이 죄를 짓게 하고 잡는 기회제공형은 수사의 합법성이 인정된다. 하지만 죄 지을 생각이 없는데 유혹해 잡는 범의유발형은 위법이다. 서울경찰청 마약수사계 관계자는 “원래 소지하고 있던 투약자만 검거한다. 구해오라고 우리가 먼저 접촉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실상은 다르다는 반박도 만만찮다. 곽 변호사는 “‘소지하고 있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아느냐”며 “가만있던 자가 기억에 있던 쾌감에 못 이겨 약을 구해서 잡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수사기관에 걸린 중독자들은 대개 동종 전과가 있어 혐의를 다퉈봐야 형량에 득이 안돼 억울해도 법정에서 말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게 마약사건을 많이 다룬 변호사들의 전언이다. 박진실 법률사무소 진실 대표변호사는 “투약자를 잡아 상선을 친다는 기관 논리가 이해는 되지만 함정을 파는 식의 수사로 약을 끊고 싶은 투약자를 누범으로 만드는 것은 문제이자 국가적 실익도 없다”며 “투약자의 중독 출구를 조금이라도 넓혀주려면 지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환자 치료병원 압수수색 논란도

2016년 7월쯤 마약 중독자를 치료하는 수도권 지정병원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압수수색 영장을 보여주며, 한 환자의 소변 검사ㆍ치료ㆍ상담 기록을 받아갔다. 병원과 환자 가족은 패닉에 빠졌다.

의료ㆍ법조계 관계자에 따르면 그 환자 가족은 미국에서 약에 빠진 자식에게 약을 주곤 했던 외국인이 마약을 갖고 국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가 있으면 우리 애가 안전하지 못하다”며 수사기관에 알렸다. 그 마약 반입자는 실제 검거됐지만 가족의 안도도 잠시, 수사기관이 역으로 치료 중인 환자도 처벌하겠다며 의료기록을 다 받아갔다. 병원 의료진은 “환자도 벌금형을 받고 추방 위기에 놓였다”고 했다. 해당 병원장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이 제시돼 어쩔 수 없이 환자 기록을 내줬지만 상선을 먼저 잡은 뒤 하선도 잡겠다며 환자 개개인의 기록들을 다 가져간 일이 알려지면 환자들이 겁을 먹고 치료를 더 꺼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병원의 마약 환자 보고의무 법 조항이 삭제된 게 2000년 7월이나 그 취지에 배치되는 일이 더러 있다”며 “수사기관과 법원이 좀더 숙고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글 싣는 순서>

1 도돌이표: 절망과 참회의 악순환

2 상상 초월: 청정하지 않은 대한민국

3 좀 이상해: 개운치 않은 수사와 재판

4 마약 양성소: 전문가 키우는 교정시설

5 보름 합숙: 쉽지 않은 재활의 길

6 갈 곳이 없다: 취업과 치료 거부하는 사회

7 일본 가 보니: 민간이 주도하는 재활센터

8 재사회화: 극복하고 있어요 응원해 주세요

특별취재팀=강철원ㆍ안아람ㆍ손현성ㆍ김현빈ㆍ박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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