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겨레

친족성폭행·혼인취소..한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약탈 14년'

입력 2018. 01. 20. 10:06 수정 2018. 01. 2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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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어떤 귀향

[한겨레]

남편으로부터 혼인 취소를 당한 베트남 결혼이주여성 푸엉(가명)의 고향 마을. 하노이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7시간을 달려야 닿는 북부 산악지대의 가난한 소수민족 마을이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제공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13년 1월25일. 한국인 시아버지의 베트남 며느리 성폭행 사건이 경찰에 접수됩니다. 형사재판 도중 한국인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아내에게 혼인 취소 소송을 청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이 13살 때 베트남에서 ‘약탈혼’을 당해 14살에 아이를 출산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10년 사이 베트남과 한국에서 아동성폭행과 친족성폭행 피해를 입은 뒤 한국 남편으로부터 혼인 취소까지 당한 이 여성의 출국은 ‘돌아갈 곳 없는 곳으로의 귀향’이었습니다. 그의 울퉁불퉁한 길에 박힌 이주, 가족, 결혼, 출산, 국가라는 돌부리들을 더듬었습니다.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 소수민족 여성
13살 때 아동성폭행 빳버혼으로 출산
22살 때 새삶 꿈꾸며 한국 남성과 결혼
결혼생활 6개월만에 시부에게 성폭행
10년 새 2차례 가장 끔찍한 폭행 피해 성폭행 재판중 남편이 푸엉에게 소송
출산 사실 안 알렸다며 혼인취소 청구
친족성폭행 원고에서 사기결혼 피고로
‘가족’ 찾아온 결혼이주 여성을 두고
‘가족’ 안에서 벌어진 폭행과 소송전

평화로워 보이는 한 마을이 있다.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의 가난한 소수민족 마을로 2017년 8월 한 여성이 돌아왔다. 그의 귀향은 지난 14년 동안 그가 겪은 끔찍한 드라마의 결말이었다. 아동성폭행(13살)-출산(14살)-국제결혼(22살)-친족성폭행(23살)-한국인 시아버지·남편과의 법정 싸움(23~27살)…. 그 잔혹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무엇이 현실이고 허구인지 착각하게 된다. 이제 겨우 20대 후반이 된 여성 한 명에게 일어났으리라곤 믿기지 않는 일들이 지난 시간 그를 따라다니며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베트남→한국→베트남으로 이어지는 그의 경로 위에서 인간 본성의 바닥과 그 바닥을 외면하며 지탱되는 결혼·출산·가족·국가의 바닥이 보인다. 그의 한국 생활 5년 중 4년5개월을 차지한 소송들은 이주여성의 인권과 성폭행 피해에 따른 출산의 법적 책임, 국제결혼 산업의 인종주의적 메커니즘, 그렇게 뒷받침되는 국가 재생산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의 가치’를 잃고 고향을 떠난 그가 한국에서 다시 ‘여자의 가치’를 잃고 ‘반품되듯’ 돌아왔다. 그의 길을 뒤쫓으며 14년을 재구성했다. *기본 사실은 법원 판결문의 ‘범죄 사실’과 ‘인정 사실’을 토대로 썼다. 판결문에 언급되지 않은 내용 중 주장이 충돌하는 부분은 구분해 표기했다. 한국인 시부의 친족성폭행 1·2·3심 판결문, 남편의 혼인 취소 소송 1·2·3심과 파기환송심 판결문, 해당 여성의 항소·상고·재상고 이유서, 국제결혼피해센터 의견서,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 아동성폭력으로 인한 출산 경험과 혼인 취소 사건 지원사례 백서>(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논문 ‘Beyond the Brokers: Local Marriage Migration Industries of Rural Vietnam’(다니엘 벨랑제) 등을 참고했다.

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제공

짓밟히고 일어서려다 또 밟혔는데 법원마저…

사람은 반품될 수 있는 상품이 아니었다.

2017년 8월 푸엉(1990년생·가명)이 반품되듯 베트남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노이에서 5시간을 달려온 자동차가 산악지대로 진입했다. 차량이 들어갈 수 없는 길을 오토바이로 2시간을 더 파고들어야 ㅁ마을에 닿았다. ㄹ성 ㅂ현의 고향집은 떠날 때처럼 깊은 산속에 묻혀 있었다.

2700여㎞. 전라북도 김제의 ‘그 집’에서 베트남 북부 깊은 산골짜기까지의 거리. 반듯하게 그은 두 집 사이의 직선이 푸엉의 발밑에선 굽고 휘고 울퉁불퉁해졌다. 14년 전 푸엉이 ㅁ마을을 떠난 것은 원한 일이 아니었다. 4년 전 김제 집을 나올 때도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다. 베트남으로의 귀국도 피하고 싶었으나 피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떠난 고향으로 그는 어쩔 수 없어 돌아왔다.

결혼생활 6개월 만에 시부의 성폭행

2013년 1월25일. 전북 김제에서 푸엉(당시 23살)이 시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했다. 일주일 전(1월18일) 시부 ㅊ(1954년생)은 커피를 가져다주는 며느리 푸엉의 손을 잡아당겨 넘어뜨렸다. 남편도 시어머니도 집에 없었다. 푸엉이 ㅊ의 손을 뿌리치고 자기 방으로 피했다. ㅊ이 따라 들어가 푸엉을 눕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성폭행했다. 베트남어로 “하지 말라”며 저항하는 며느리에게 시부는 한 단어씩 끊어 말했다.

“엄마(아내), ㄱ(아들) 집에 없다” “괜찮다” “돈”….

ㅊ은 방에 있던 과도를 가리켰다. 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댔다. 푸엉은 1월21일 한국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해 “무섭다. 다음에 또 그러면 어떡하냐”고 했다. 1월24일 ㅊ은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는 푸엉의 손을 잡아당겨 무릎에 앉혔다. 힘(키 181㎝에 몸무게 96㎏)으로 제압한 뒤 몸을 만지고 입을 맞추며 강제 추행했다. 푸엉이 집밖으로 도망갔다. 다음날 ㅊ은 “성당에 가자”며 푸엉을 트럭에 태운 뒤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했다. 폭행 전 푸엉은 화장실에서 친구에게 전화해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어로 “안 돼” 소리치는 푸엉에게 시부는 일주일 전처럼 한마디씩 말했다.

“괜찮다” “돈” “베트남 엄마” “동생, 학교”….

경찰이 ㅊ을 체포했을 때 어깨와 목에서 손톱으로 긁힌 흔적이 확인됐다. 푸엉은 경찰을 통해 전북이주여성인권센터가 운영하는 쉼터로 인도됐다. 결혼 생활 6개월 무렵이었다.

“합의하에 했다.”

법원의 혼인 취소 판결 뒤 2017년 6월22일 고향으로 귀국한 푸엉(가명)의 최근 사진. 푸엉 제공

2013년 3월 형사 재판정에서 ‘한국의 가족’은 푸엉이 시아버지를 유혹했다고 주장했다. ㅊ은 강간이 아니라고 했다. “(푸엉이) 돈이 필요해 성관계 요구에 응했다”고 했고, “성행위를 적극적으로 도왔다”고도 했다. 시어머니와 변호인도 “모텔주인이 구조 요청 소리를 듣지 못했고 손톱 자국도 몸 앞이 아니라 뒤쪽에 있다”며 ‘상간’을 주장했다. 재판부는 ㅊ에게 징역 7년(친족 관계에 의한 강간)을 선고(2013년 5월30일)했다.

“한국말이 서툴고 마땅히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는 외국인 며느리를 집과 모텔에서 수회 강간하거나 강제 추행한 것으로… 피고가 범행을 부인하면서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피해자와 합의하거나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도 전혀 기울이고 있지 않다.”

ㅊ의 항소(11월5일)와 상고(2014년 1월29일)도 모두 기각했다.

붉은 선.

항소심 재판 도중 가해와 피해 관계가 역전되는 일이 벌어졌다. ㅊ이 푸엉을 성폭행하던 중 배에서 ‘임신선’(임산부 배에 피부 혈관이 터져 생기는 선)을 봤다고 했다. 구치소에서 ㅊ의 이야기를 들은 변호인이 시모에게 전했다. 시모가 베트남 현지인을 고용해 푸엉의 행적 추적을 의뢰했다. 현지인이 마을 사람으로부터 ‘확인서’를 받아왔다.

“(푸엉이) 베트남에서 남자와 결혼해서 살았고 이유는 모르지만 남자는 자살했다.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지금 누구와 사는지 모른다.”

ㅊ 쪽은 이 내용을 ‘푸엉의 성폭행 피해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는 근거로 활용했다. 푸엉은 항소심 증인신문에서 출산 사실을 부인(이후 “아버지 처벌 약해질까봐 그랬다”고 밝힘)했다. 푸엉은 위증죄로 역고소(검찰에서 기소유예) 당했다.

2013년 8월28일 남편 ㄱ(1975년생)이 푸엉을 상대로 출산 사실을 숨겼다며 혼인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남편과 시모는 “국적 취득과 돈을 목적으로 사기 결혼을 했다”고 주장했다. “불러들일 남자가 있다”는 의심도 제기했다.

‘가족’ 간 소송이 물고 물렸다. 시부를 상대로 원고였던 푸엉이 남편을 상대로 피고가 됐다. ‘친족성폭행의 피해자’가 ‘사기결혼의 가해자’로 뒤바뀌어 기나긴 법정 싸움 속으로 빨려들었다. ㅊ과 시모는 이혼했다. 한국에서 가족이라고 믿었던 것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푸엉은 10년 전 베트남에서 ‘강제 가족’이 돼야 했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빳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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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나이에 아동 약탈혼

‘빳’(밧)은 ‘잡다’를 뜻했고 ‘버’는 ‘아내’를 의미했다. 베트남어 빳버는 ‘끄업(강탈하다)버’ ‘깝버’ ‘빳꼭버’ 등으로도 불렸다. 아동기 여성을 납치·강간한 뒤 혼인 관계를 맺는 소수민족의 풍습(베트남 형법과 가족법이 ‘불법’으로 규정)이었다.

“S시 산속 길에서 남자 두세 명에게 끌려간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끄업버’ 시즌이 왔다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K학교의 교사들은 …여학생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면 그 학생이 ‘끄업’으로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메이는) 초등학교 4학년 언니가 한겨울 추운 날에 남자 3명에게 질질 끌려가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언니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베트남 언론 <띠엔퐁> 2013년 4월12일 기사 ‘끄업버 시즌: 숲속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비명 소리’)

2003년 푸엉(당시 13살)은 이웃 마을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의 고향인 베트남 ㄹ성은 중국과 국경을 맞댄 가난한 산지였다. 20여개의 소수민족(킨족, 몽족, 따이족, 타이족, 자오족 등)이 주민 60% 이상을 차지했다. 푸엉은 따이족이었다. 그가 친구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이장이 악기를 두드려 사람들을 모았다. 한 남자(당시 22살·따이족)가 푸엉을 지목하자 마을 사람 20여명이 그를 에워쌌다. 푸엉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사람들은 그를 남자의 집에 내려두고 사라졌다. 푸엉은 강제로 끌려간 남자의 집에서 사흘간 성폭행을 당했다. 사흘 뒤 남자는 ㅁ마을로 푸엉의 부모를 찾아가 혼인 허락을 구했다.

“남자가 나와 성관계를 했으니 같이 살아야 한다고 통보했다. 내 눈의 멍자국을 보고 어머니가 울었다. 남자의 집으로 가서 살 수밖에 없었다. 남자를 따라가지 않으면 마을에 안 좋은 소문이 나고 나와 결혼할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산에서 나무를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남자는 그 돈으로 술을 사 마셨다. 돈을 못 가져 오면 폭행했다.”(푸엉 재판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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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8개월째 푸엉은 남자의 폭력을 피해(푸엉 주장) ㅁ마을로 돌아왔다. 푸엉의 부모는 ‘부정 탄다’며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푸엉은 근처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 집에서 2004년(당시 14살) 아들을 낳았다. 출산 직후 남자의 부모가 찾아와 아들을 데려갔다. 푸엉은 마을을 떠나 타지 식당과 공장 등에서 일했다. 남자도 아들도 친부모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남자는 ㅁ마을의 움막에서 2005년 8월 사망한 채 발견됐다.

그렇게 푸엉의 ‘과거’가 한국 법정으로 소환됐다. 한국에서 친족성폭행을 당한 푸엉은 베트남에서 아동성폭행을 당했다. 성폭력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폭력들을 겪은 그와의 결혼을 취소하겠다며 남편이 법정에 섰다.

결혼. 빳버는 아니었지만 사랑도 아니었다.

2012년 푸엉(당시 22살)은 봉제공장을 다니는 친구로부터 ‘한 언니’를 소개받았다. 그 언니는 하노이에서 식당을 하며 국제결혼을 중개했다.

1990년대 초부터 베트남 여성들의 국제결혼이 급증했다. 가난한 삶을 벗어나는 통로로서 국제결혼은 이주노동의 대안이었다. 송출 비용이 많이 들고 고용허가를 받기 까다로운 이주노동보다 국제결혼의 장벽이 낮았다.

남부의 껀터와 북부의 하이퐁이 거점 도시였다. 껀터(호찌민으로부터 남서쪽으로 185㎞)는 1990년대 ‘대만행 결혼이주’의 관문이었다. 대만인들은 껀터에 진출해 사업을 했고, 베트남 여성들은 껀터를 중심으로 결혼이주를 떠났다. 대만인과 결혼한 여성들의 인권 문제가 보고된 2000년대부턴 한국(현재 국제결혼 상대국 1위)이 ‘남편 국가’로 대만을 대체했다. 2000년대 중후반 대만이 영리목적의 결혼중개를 규제한 탓도 작용했다. 한국 결혼중개업자들이 베이스캠프로 활용한 하이퐁(하노이로부터 동쪽으로 120㎞)은 2000년대 이후 베트남 ‘신부 수출’의 전진 기지가 됐다. 2005~2012년 남부에서 여성들의 국제결혼 비율이 10% 안팎일 때 북부는 32~41%를 기록했다.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에서 민간 결혼중개업은 공식적으로 불법(‘여성연맹’만 합법 운영)이었으나 실제로는 외화벌이 수단으로 묵인됐다. 브로커들이 뛰어들면서 결혼중개업도 산업화했다. 맞선, 행정·서류 대행, 헤어·메이크업, 언어교육, 관광 등의 영역을 포괄하는 ‘풀패키지 사업’으로 규모를 키웠다. 여성들의 국제결혼으로 신부를 구하기 어려워진 베트남 남성들은 소수민족 여성들을 찾아 혼인했다.

성폭력 피해자에서 사기결혼 가해자로

“아직도 남존여비 사상이 자리 잡고 있으며 30~40년 전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졌던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남편을 존중하고 가정을 생각하는 여필종부형(우즈베키스탄)…. 결혼하면 남편과 자식을 위하여 헌신하며 대가족 사회의 전통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이 없으며(필리핀)…. 1960~70년대 우리들의 어머니상으로서 한 남편만을 섬기는 순수한 분들(네팔)….”

한국의 결혼중개업체 ㅎ사는 ‘국가별 신부들의 장점’을 누리집(현재)에 광고했다. 각국 여성들의 사진이 한국 남자들의 컴퓨터에서 ‘쇼핑몰 상품’처럼 전시됐다. 푸엉 등 베트남 신부들의 장점도 ‘소비자들’(국내 국제결혼 피해는 한국소비자원에서 접수)에게 소개됐다.

“정서와 가치관이 남편에게 순종하고 웃어른을 공경하고… 한번 시집가면 일부종사한다는 우리 어머님 세대의 전통적인 가치관….”

한국 남성들은 누리집에 올랐거나 업체에서 제시하는 사진을 보고 신부 후보를 골랐다. 베트남에서 여성들은 중개인이 마련한 집단 숙소에서 관리·통제되며 한국에서의 ‘선택’을 기다렸다. “중개인의 집안일을 하며 식모처럼 살았다”는 여성들도 있었다. 맞선은 다수 여성 대 소수 남성의 구도로 진행됐다. 여성들이 선을 보이면 남성들이 마음에 드는 여성들을 선택했다. 여성 쪽에선 거절하기 쉽지 않았다. 맞선에 실패하면 다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푸엉도 ‘중개업자 언니’의 집에서 5일 동안 머물면서 맞선 볼 날까지 대기했다.

대법관·가정법원장 출신과 공감·민변
대규모 공익변호인단 꾸려 푸엉 변론
남편 쪽도 지법 부장판사 출신 선임
국제결혼피해센터 의견서 내며 지원
이주-인권-결혼 둘러싼 상징적 사건 1·2심 혼인취소와 위자료 지급 판결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하며 극적 반전
파기환송심 혼인취소로 결국 귀국
더 이상 ‘우리끼리’ 재생산 힘든 한국
‘쓸모’없다고 돌려보내지는 여성들

전북 김제의 ㄱ(당시 37살)은 옆집에 사는 통일교 목사로부터 국제결혼을 권유받았다. 2012년 2월21일 ㄱ은 어머니·중개인과 하노이 부근에서 맞선으로 푸엉을 만났다. 국제결혼은 만남과 결혼이 속성으로 진행됐다. 베트남 당국의 단속을 피하고 남성의 비용(900만~1200만원)을 최소화하기 위해 출국부터 맞선·결혼·합방·여행·입국이 보통 5일 일정으로 설계됐다. 결혼 자체가 목적이므로 마음을 나눌 틈 없이 결혼부터 했다. ㄱ과 푸엉도 맞선 당일(ㄱ쪽 진술) 또는 이틀 뒤(푸엉 진술) 결혼식을 올렸다. ㄱ은 2012년 4월9일 김제에서 푸엉과의 혼인을 신고했다. 푸엉은 그해 7월28일 한국에 입국해 부부 생활을 시작했다.

부부. 처음 만난 당일에도 맺을 수 있는 관계였고, 4년 동안 지난하게 소송할 수도 있는 관계였다.

2014년 6월24일 혼인 취소 소송 1심 선고가 내려졌다. 5쪽짜리 판결문의 판단은 간단했다. “사실혼 전력과 출산 전력 등은 혼인 의사 결정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 할 것인데 피고는 원고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원고가 사실을 알았더라면 피고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혼인 취소와 남편에게 위자료 800만원 지급. 출산에 이른 과정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선고 결과가 언론에 보도됐다. 푸엉을 도와온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등이 기자회견을 하고 토론회를 열었다. 항소심을 준비하며 공익인권법재단 공감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공익변론으로 결합했다. 남편 쪽에서는 ㅊ의 재판을 맡았던 지방법원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지역 변호사회장 역임)가 아들 소송도 수임했다. 국제결혼 한 남성들의 모임인 ‘국제결혼피해센터’가 재판을 방청하며 ㄱ을 지원(“남편 쪽에서 연락해 도움 요청”)했다.

푸엉의 재판은 이주여성의 인권과 성폭행 피해에 따른 출산의 법적 책임, 국제결혼 산업의 인종주의적 메커니즘과 그렇게 만들어지는 속성 가족, ‘신부 소비국’으로서 한국의 실태 등을 둘러싼 상징적 ‘사건’이 됐다. 푸엉이 통과해온 시간엔 가난과 이주, 가족-재생산-국가라는 거대 주제들까지 매달려 있었다. 항소심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푸엉(가명)의 고향집 방 안.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제공

① 결혼 과정에서 푸엉은 출산 사실을 정말 알리지 않았나.

푸엉은 “맞선 당일 베트남 중개업자에게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아이 일을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진술했다. “중개업자가 ‘괜찮다. 서로 좋아하면 된다’고 해서 남편 쪽에 알린 줄 알았다”고도 했다. 중개업자가 실제 말했는지와 통역이 한국어로 전달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소수민족인 푸엉은 베트남 공용어를 읽고 쓰지 못했다. 서류 내용을 확인했다 하더라도 의미를 해독할 수 없었다. 남편 쪽은 “출산 사실을 들은 바 없다”고 했다. 중개인이 전달한 ‘혼인상황확인서’에는 ‘혼인신고 안 했음’ ‘독신’ 등이 기재(빳버는 불법이므로 혼인신고가 불가능)돼 있었다.

‘속성 결혼’의 피해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돌아갔다. 만남부터 결혼식을 올리는 하루이틀 사이는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여성가족부 ‘2015년 국제결혼 중개업체 이용자 및 피해자 조사연구’에서 ‘중개업체가 배우자 정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제공했다’고 답한 남성은 64.4%였다. ‘배우자의 정보를 조작해서 제공했다’고 답한 여성도 61.1%였다. 결혼 성사가 목표인 브로커들이 필수 사실을 전하지 않거나 거짓 서류를 제공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푸엉 쪽은 결혼 과정에서 “남편의 지적장애(장애판정은 받지 않음) 사실도 전달받지 못했다”고 했다. ㅊ은 ㄱ의 계부였다. 미국에서 10년간 친부와 살던 ㄱ은 결혼 한 해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ㄱ과 계부는 1년밖에 같이 살지 않았다. 고물상을 운영했던 계부는 ㄱ이 일을 제대로 돕지 못할 때 의붓아들을 때렸고 푸엉이 말렸다.

푸엉(가명)의 고향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장면.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제공

“너무 지쳤고 악몽을 많이 꿨다”

② 푸엉의 출산 사실 미고지 여부가 아동성폭행이란 출산 과정을 무시할 만큼 결혼 취소 사유가 되나.

출산을 숨긴 여성이 혼인 취소 선고를 받은 국내 판례들이 있었다. 푸엉처럼 성폭력(특히 아동성폭력)에 따른 출산 사실 미고지를 이유로 혼인 취소 소송이 제기된 사례는 없었다. 시부의 성폭력으로 촉발된 사태의 책임을 베트남에서조차 범죄인 약탈혼의 피해자에게 물을 순 없다고 변호인들은 주장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에서처럼 혼인 취소 판결(2015년 1월9일)이 내려졌다. “미성년자로서 납치·강간을 당했다는 사정만으로 출산 경력을 혼인 상대방에게 고지할 의무를 면한다고 볼 수 없다.” 푸엉이 약탈혼 피해자임을 인정(위자료 300만원)한 점은 1심과 달랐다. 푸엉이 성병을 옮겼다는 남편 쪽의 주장(고물상에서 일한 남편이 옴 진드기로 얻은 피부병으로 확인)은 “증거 없다”고 배척했다.

법원 판결은 푸엉의 체류자격(F6 결혼비자)과 직결됐다. 결혼이주 여성의 체류엔 남편의 보증이 절대적이었다. 혼인이 취소되면 체류자격을 잃었다. 푸엉을 돕는 사람들은 “가정 파탄의 책임을 푸엉에게 돌려 한국에서 쫓아내겠다는 뜻”으로 소송 의도를 해석했다. 푸엉의 비자는 2014년 12월 만료(소송을 이유로 임시 연장)됐다.

푸엉은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겐 찾아갈 고향이 없었다. 빳버로 임신해 ㅁ마을로 돌아갔을 때 부모조차 받아들이지 않던 일을 그는 잊지 못했다. 결혼 관계가 정리된 이주여성들이 편견과 빈곤 속으로 복귀하는 대신 ‘불법체류자’로 국내를 떠도는 경우가 있었다. 이혼 뒤 공장과 식당 등에서 미등록으로 일하던 베트남 여성 ㅇ이 2014년 12월 버스 기사에게 살해당했다. 전 대법관(천경송)과 전 서울가정법원장(김용균), 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전주혜) 등이 푸엉의 상고심에 합류했다.

2016년 2월18일 대법원에서 반전이 있었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아동성폭력범죄 등의 피해를 당해 임신하고 출산까지 하였으나… 단순히 출산 경력을 고지하지 않았다고 하여 혼인 취소 사유에 해당한다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 사건이 파기환송됐다. 언론들은 판결 내용을 전하며 전향적인 마무리(푸엉의 체류 연장 및 귀화)를 예상했다.

어긋난 예상이었다. 파기환송심은 사실 확인 싸움으로 전개됐다. 쟁점 ②를 두고 1·2심과 판단을 달리한 대법원의 논리에 맞서 남편 쪽은 쟁점을 추가했다. ③ 그러니까 과연 아동성폭행이 맞나.

남편 쪽(국제결혼피해센터 회원)은 약탈혼이 아님을 입증하겠다며 베트남으로 건너갔다. 푸엉을 빳버 한 남자 집과 푸엉의 고향집을 찾아가 영상을 찍어 증거로 제출했다. 영상을 근거로 남편 쪽은 고유의 풍습인 빳버를 약탈혼으로 보는 시각은 악의적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푸엉이 이웃 마을에 놀러간 것은 ‘시집’(남자의 집) 방문 목적이었으며 강간이 아닌 사랑으로 맺어진 정식 혼인이었다고 했다. 국제결혼피해센터도 강간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의 날조·조작이라는 의견서를 냈다. 푸엉의 집에서 본 2007년생 여자아이는 푸엉의 딸(호적상 동생)이며 빳버혼 상대 남자도 자살이 아니라 푸엉이 죽였다고 했다.

푸엉 쪽도 반박 자료를 만들기 위해 베트남으로 출국했다. 푸엉도 동행했다. 14살 때 떠난 뒤 처음 밟는 고향이었다. ㅂ현에 도착한 그는 함께 간 베트남 출신 여성 활동가에게 말했다.

“빳버 조심해요.”

고향 집에서 촬영해 온 영상에서 푸엉의 어머니가 말했다.

“남자 마음에 들면 그냥 납치해 버려요. 울든지 말든지 여기선 그래요. 잡혀간 딸이 남자 폭력을 피해 도망 왔을 때 목과 얼굴에 심한 멍이 있었어요. 남자 부모가 아이를 데려간 뒤 딸이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어요.”

사촌 올케도 영상에서 말했다.

“남자가 푸엉을 데려갔을 때 도와주지 못했어요. ‘여자로서의 가치’를 잃었으니까요.”

국제결혼피해센터는 이 영상들이 조작됐다고 했다.

푸엉(가명)의 혼인 취소 소송 항소심 3차 변론이 열린 2014년 11월17일 전주지방법원 앞에서 이주여성인권단체 등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제공

10개월 동안 6회의 변론을 거쳐 파기환송심 선고(2017년 1월23일)가 내려졌다. 재판부는 푸엉과 ㄱ의 혼인을 취소(위자료 300만원)했다. 빳버(13살) 사실은 인정했으나 출산 시점(14살)을 들어 성폭력이 아니라 혼인생활에 따른 임신으로 판단했다. “출산 경력과 경위가 원고에게 알려진다 하더라도 피고의 명예나 사생활 비밀이 침해된다고 보이지 않는다.” 국제결혼피해센터 등이 제기한 조작·살해 의혹들은 증거자료로도 언급되지 않았다.

변호인단은 반발했다. 납치·감금·강간에서 시작됐다 하더라도 수개월간 동거하다 임신했다면 성폭력과 무관한 출산이란 판결이었다. 2017년 3월13일 대법원에 재상고 이유서를 제출했으나 기각(5월16일)됐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목소리가 결혼이주 여성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한 여성의 인생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성에게 짓밟히고 일어서려다 또 밟혔다. 어떻게 법원마저 그를 처벌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나.”(베트남 이주여성 ㄹ)

소송으로 연장되던 비자가 2017년 7월 만료될 예정이었다. 소송을 계속하면 체류는 이어갈 수 있었다. 푸엉은 “그동안 너무 지쳤고 악몽을 많이 꿨다”며 출국을 택했다.

끝나지 않을 잔혹서사

파기환송심 결과는 언론에도 나지 않았다. 대법원 선고 때까지 언론이 주목하던 푸엉은 그 관심이 완전히 가라앉은 2017년 6월22일 조용히 베트남행 비행기에 올랐다. 2012년 한 남자로부터 ‘선택받아’ 온 한국에서 푸엉은 5년 만에 베트남으로 돌려보내졌다. 5년 중 4년5개월을 쉼터에서 살며 소송으로 보냈다. 그 시간은 2003년 한 남자로부터 ‘지목받아’ 끌려간 뒤 푸엉이 잃어버린 시간과 다르지 않았다.

2014년 11월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푸엉(가명)의 혼인 취소가 부당함을 호소하는 탄원 서명(2469명)을 제출하고 있다. 한국여성인권센터 제공

베트남 여성 푸엉은 ‘세련된 글로벌 가족’뿐 아니라 ‘품어야 할 다문화 가족’으로도 한국에 남을 수 없었다.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푸엉들’은 출산율을 끌어올릴 때만 ‘귀중한 자원’이 됐다. ‘2017년 한국인 가정의 출산율이 1.03명으로 전망될 때 다문화가정 출산율은 3.0명을 훌쩍 넘는다’(유종근, 2017년 9월18일 <국민일보> ‘다문화 정책으로 저출산 극복을’)는 ‘발견’ 속에서 그들의 몸은 한국 여성들이 꺼리는 출산의 대안으로 부상했다. 그 ‘기능’에서 이탈한 여성들은 한국에 머물지 못하고 ‘반품’됐다. 한국 가정이 더 이상 한국인끼리만으론 재생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국을 지탱하면서도 한국 밖으로 쫓겨나는 그들의 현실과 공존했다. 가난의 탈출구를 찾아 온 이주여성과 주류에서 배제된 한국 남성들의 ‘속성 결합’을 국가가 방조·지원하며 재생산을 도모하는 한 ‘푸엉의 잔혹서사’는 끝없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에 도착한 푸엉은 한동안 남부 호찌민 인근에 머물렀다. ‘가치를 잃은 여자’가 돌아가 숨을 집이 고향엔 없었다. 출국 전 그는 “소송이 잘돼서 한국에서 살 수 있다면 돈을 벌어 미싱을 사고 싶다”고 했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들을 잘라내고 앞뒤 시간을 이어 붙여 삶을 다시 짜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2016년 6월30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후원행사에서 푸엉이 종이를 들고 한국말로 더듬더듬 읽었다.

“2심 재판까지 지고 나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1년은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판결 날짜가 잡힌 뒤 고열에 시달렸는데 너무 불안해서 병원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6월 중순 파기환송심 제출 증거를 모으러 간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에 울지 않으려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습니다. 소송에서 꼭 이겨서 당당하게 다시 고향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귀국 몇 달 뒤 푸엉은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2016년의 다짐’을 이루지 못한 채 ㅁ마을로 돌아갔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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