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김영민 칼럼] 노예가 되지 않는 법

김영민 입력 2018.01.21. 16:35 수정 2018.01.2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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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선택 전에 거치는 숙의 과정은

그 선택과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정당성을 납득한 구성원은 자유인 돼

보통 사람들은 인류 문명의 위기나 지구 환경오염같은 거대한 명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 명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다면, 향후 어떻게 밥을 먹고 살아야 할지 도대체 알 수 없다. 다른 직장을 찾아가서, “인류 문명에 환멸을 느껴 직장을 그만두고 왔습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하면, “우리가 찾던 인재군. 마침 인류 문명의 위기로 번민하는 일꾼을 찾고 있었다네” 라며 반겨 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다니다 보면 누구나 가끔 확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나. 이게 다 뭐 하자는 짓이지, 하는 생각이 뺑소니차처럼 자신을 치고 달아날 때가 있지 않나. 상대적으로 편한 직장에서 “꿀을 빨고” 있다고 해서 그 뺑소니차가 비켜 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 수단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 때면, 자신을 제약하는 권위를 납득할 수 없을 때면, 다시 말해 자신이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라는 느낌이 들 때면, 누구나 그 난폭한 뺑소니차에 치일 수 있다.

내 직장의 지난번 대학 총장 선출 과정에서는, 이사회가 상위 후보를 제치고 하위 후보를 총장으로 선택하는 바람에 학내외가 시끄러웠다. 그 결정에 찬성하는 이들은, 이사회가 하위의 후보를 선택할 권리가 정관에 명시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실로 그렇다. 이사회가 규정된 바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사회는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다른 한편, 그 선택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 선택은 다수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았기에 학내 민주화 정신을 훼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말 반민주적인 선택을 뒷받침하는 규정이 존재했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가 나오기 이전에 해당 규정의 개혁을 외쳤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 선택의 시점에서 정말 결여되어 있던 것은, 민주화 정신이라기 보다는 이사회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한편의 글, 논리적이고 유려하여 다수를 납득시킬 수 있는 한편의 글이 아니었을까. 정당화를 위한 숙의 없이, 그 숙의를 담은 발표문 하나 없이 새 총장을 선출하려 할 때, 이사들은 다소곳이 앉아 있기 보다는 테이블을 당수로 쪼개며, “정당화 과정 없이 학교의 권위를 창출할 수 있는 겁니까!”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목젖을 뽑아 줄넘기를 한 다음에, 창문을 온몸으로 받아 깨면서 밖으로 뛰쳐나와야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야말로 규정상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학생들이 행정관을 점거한 채로 일상은 지속되었다. 기대했던 한편의 글 대신 졸업식, 입학식 등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연설문이 날아오곤 하였다. 그것을 읽은 학생들은 부지런히 첨삭지도를 해서 보내주곤 하였다. “연설문에서 이 문장은 비문이고요, 그 다음 문장은 4차 산업혁명, 대학 이념, 새 캠퍼스 건설을 연결시키려고 하는데, 비문은 아니지만 논리가 나빠요, 운운.” 그때서야 나는 새삼 직장을 다니는 보람을 느끼며, 답장을 쓰곤 하였다. “학교 행정 본부의 권위에 비판적인 것은 좋지만, 너무 거친 비판이군요. 왜 세세한 논증 과정 없이 그 연설문의 내용이 나쁘다는 결론으로 비약하는 거죠? 내용이 나쁘려면 일단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내용이 없는 글을 가지고 내용이 나쁘다고 비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운운.”

이성을 함양하고자 하는 교육기관이라면, 중요한 선택을 하거나 권위를 창출할 때 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숙의 과정은 그 선택과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정당성을 잘 표현된 글을 통해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을 때, 구성원들은 비로소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다. 영화 ‘빅 칠’의 주인공에 따르면, 정당화는 섹스보다 중요하다. 단 하루도 안 할 수 없으므로. 대학의 이념에 걸맞게, 올해의 총장 선출은 자유인이 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되기를 바란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