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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세에 백제 한성 함락한 치밀한 장수왕의 노익장

임기환 입력 2018. 01. 2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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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37] 장수왕대의 역사에서 명장면 하나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백제 한성(漢城) 함락을 꼽지 않을 수 없다. 475년 9월, 장수왕은 직접 3만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하였다. 그때 백제왕은 개로왕이었다.

당시 백제 도성은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이 있었다. 오늘날 송파구 일대에 남아있는 백제시대 성곽 유적으로 보아 풍납토성이 곧 북성이고, 몽촌토성이 남성일 게다. 성곽의 입지와 내부 구조 등으로 보아 풍납토성, 즉 북성은 평상시 거주성이고, 몽촌토성인 남성은 피난성과 왕궁성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백제 개로왕은 남성으로 피신하였다. 고구려군은 먼저 북성을 공략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킨 후 남성을 공격했다. 개로왕은 남성이 함락 위기에 처하자 탈출을 시도했으나 고구려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때 개로왕은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이라는 고구려 장수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고구려로 망명한 백제 장수로서, 개로왕을 아차성으로 끌고가 처형했다. 일반적으로 적국의 왕을 포로로 하면 처형하기보다는 인질로 삼아 영토나 몸값을 요구하는 등 실리를 취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왕을 살해할 경우 상대국 왕실의 깊은 원한을 초래하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개로왕이 처형당한 것은 망명한 백제 장수들의 개인적인 원한이 그만큼 깊었다고도 볼 수 있다. 혹은 장수왕이 한성지역에서 백제 왕실을 싹을 잘라 백제 부흥의 의욕을 꺾어버리려는 의도로 개로왕의 처형을 방임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개로왕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고, 나라까지 멸망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동생 문주(文周)와 다수 귀족세력들이 남하하여 웅진(雄津)에서 다시 백제 왕실을 이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백제가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영화로운 500년 도읍지 한성 땅을 잃게 된 책임은 온전히 개로왕이 떠안아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백제 개로왕은 가장 무능한 군주이며 또 폭군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 도미전(都彌傳)에 전해지는 도미의 아름다운 부인을 빼앗으려는 패륜적인 이야기 때문에 폭군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간첩으로 파견한 승려 도림(道琳)의 계략에 빠져 대대적인 토목 역사를 일으킴으로써 국력을 피폐화시켰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즉 고구려 승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는 점을 이용해 신임을 얻은 뒤 성을 쌓고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을 축조하게 하고, 부왕(父王)의 무덤을 만들고, 또 강을 따라 대규모 성곽을 쌓게 하는 등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나라 창고를 텅비게 하고 백성들을 곤궁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도림을 간첩으로 보낸 장수왕의 뛰어난 지략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하지만 개로왕으로서는 겨우 바둑 등에 빠져서 소인배 노릇을 하는 적의 첩자를 등용하고 국력을 탕진한 어리석은 군주의 전형이 되는 수치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과연 개로왕은 그렇게 무능한 인물이었을까? 그러나 위 도림의 이야기를 잘 보면 오히려 개로왕이 결코 만만치 않은 능력을 갖고 있는 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한강변에 성곽을 쌓는 것은 고구려와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정세에서 당연히 수도 방어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선왕 무덤을 통해 강력한 왕권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 고대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왕권강화책의 하나이다. 성을 쌓고 궁궐을 수축한 것도 그럴 만한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이는 왕권 강화가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삼국사기'만이 아니라 중국 측 역사서 등 여러 역사 기록을 보면 개로왕대에는 동생 문주 등 왕실세력을 대거 등용하는 등 귀족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견고하고 거대한 풍납토성의 성벽. 나라는 지키는 힘은 거대한 성벽이 아님을 증거한다. /사진=문화재청

대외정책에서도 개로왕은 전왕들과는 달리 고구려에 대해 강경책을 구사하고 있었다. 재위 15년인 469년 8월에는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기록으로는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 광개토왕과 전투를 치른 이후 거의 7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고구려 공격이었다. 생각해 보시라. 백제와 고구려가 비록 적대 관계였다고 하더라도 군사적 충돌 없이 긴장된 평화로 70여 년을 지냈는데, 이를 깨뜨리는 군사행동을 그리 쉽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이는 개로왕이 나름 결단력을 갖고 있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개로왕은 고구려 공격 직후 10월에는 지금의 개성 부근으로 추정되는 청목령(靑木嶺)에 큰 목책을 설치하고,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였으며, 지금의 아차산성으로 비정되는 북한산성(北漢山城)에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아마도 고구려와 한판 승부가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472년에는 그동안 교섭이 없었던 북위(北魏)에 처음으로 국서(國書)를 보내 함께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북위를 이용해 고구려 군사력을 분산,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 전략이었다. 다만 그런 시도가 먹힐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오판이었다. 남조 송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로서는 고구려를 적대시할 수 없는 상황임은 지난 회에 충분히 언급한 바 있다. 오히려 개로왕의 이런 외교적 시도는 장수왕의 분노를 더욱 촉발하였을 뿐이다.

앞서 70여 년 만에 백제의 군사행동도 고구려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인데, 북위를 자극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려는 백제 개로왕의 시도는 장수왕으로서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위기감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장수왕은 백제에 대해 총공세를 벌일 것을 결단했다. 그리고 착실히 준비했다. 앞서 본 승려 도림 이야기는 백제에 대한 공격 준비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화이다. 이 도림 이야기를 마치 무능한 군주에 의해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백제를 장수왕이 가볍게 제압한 이야기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당시 백제는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아신왕이 당했던 수모가 언제적인 양 싶게 다시 국력을 회복하였고, 그 주역인 개로왕은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오히려 고구려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장수왕은 그런 백제를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섣부르게 공격했다가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이런 태도에서 북연을 놓고 북위 및 송과의 충돌에서 과감한 결단력을 보였던 모습과는 다른,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장수왕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도 있다.

475년 9월, 장수왕은 전쟁 준비를 끝내고 한성 공격에 나섰다. 당시 장수왕은 왕위에 오른지 63해가 되었고, 나이 81세 때였다. 노익장(老益壯)이란 말이 있지만, 그래도 여든의 나이에 군대를 이끌고 최대의 격전이 치러질 적의 수도 공격에 나섰다는 것은 장수왕이 한성(漢城) 공략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나 짐작케 한다. 그만큼 이 전쟁이 갖고 있는 의미도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장수왕이 동원한 군대는 3만명에 불과했다. 광개토왕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가 5만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적의 심장부 수도를 공격하기 위해 동원한 군사 수로서는 그리 많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정도의 군대를 동원해도 충분하다고 판단한 결과이니 장수왕이 당시 백제의 정황을 매우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치밀하게 준비해 왔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그동안 개로왕이 보였던 고구려에 대한 공세적 자세에 비해서는 백제 방어선이 너무 무기력했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탓이겠지만 청목령부터 한강까지 백제군의 저항 흔적이 별로 없다. 견고하고 거대한 북성(풍납토성)도 7일 만에 무너졌다. 개로왕은 살해당하고, 장수왕은 백제 왕실과 귀족 8000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개선했다. 500년 백제 도읍지는 고구려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백제는 더 이상 한성에서 나라를 유지할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공세로 장수왕은 백제를 궤멸시키고,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개로왕과 백제군이 무기력한 면도 있지만, 그만큼 장수왕과 고구려군의 공세가 치밀하고 강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은 승자보다는 패자의 모습에서 구하기 마련이다. 개로왕이 신라에 구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동생 문주를 보내면서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권력이란 가장 호화롭게 포장되고 과시될 때, 그 순간부터 아래로부터 무너지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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