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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독특한 '페미' 드라마를 보았나

입력 2018. 02. 04. 10:46 수정 2018. 02. 0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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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드라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스비에스)의 한 장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스비에스)는 출생의 비밀이나 불치병 등 막장드라마의 형식에 중년 여성의 성장과 여성연대의 함의를 담는다. 라라(도지원)는 신인배우 시절 감독과의 불륜으로 도나(정유미)를 낳고, 5년 뒤 재벌 2세 정 회장(박상민)과 결혼했다. 그러나 뒤늦게 혼전 출산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혼 25년 만에 이혼한다. 위자료마저 사기로 날린 라라는 단역배우라도 하기 위해 도나가 조감독으로 일하는 드라마 촬영장을 찾는다. 흔히 막장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은 극의 절정에서 터진다. 그러나 드라마는 시작과 함께 출생의 비밀을 터뜨린 뒤, 철부지 같던 중년의 라라가 성장하는 모습과 라라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는 도나와의 느린 화해를 담는다.

젊은 시절 라라는 미모의 주연배우였지만 연기력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단역배우가 된 라라는 절박하게 연기에 매달린다. 결국 “내가 네 엄마다”라며 오열하는 장면을 통해 ‘신 스틸러’로 등극한다. 도나와 해후했던 순간의 감정을 담은 연기 덕분이다. 이런 라라를 보고 정 회장은 애정을 되살리고, 조카뻘의 신 감독(연정훈)은 난생처음 사랑을 느낀다. 드라마는 이들의 삼각로맨스와 배우로 성공하는 라라를 그리는가 싶더니, 돌연 불치병 서사로 선회한다. 어쩌면 한심한 스토리처럼 보인다. 중년의 쇠락한 이혼녀가 재벌인 전남편과 연하의 총각에게 동시에 구애받으며 직업적으로도 성공한다는 ‘줌마렐라’ 판타지에, 죽음을 통해 두 남자의 영원한 사랑으로 남는다는 진부한 순애보로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라라에게 죽음 앞에서 의연하게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인간의 풍모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흔히 미혼모이자 이혼녀이고 불치병에 걸린 여인이라면, ‘비운의 여주인공’을 떠올린다. 특히 재벌 사모 출신의 배우라면, 히스테리적이거나 자기 연민에 빠진 모습을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라라는 ‘비운의 여주인공’보다, ‘쉰 살에 비로소 철이 든 인간’에 가깝다. 그는 회생 확률이 낮은 수술을 거부하며, “난 지금껏 운이 좋았던 사람이다. 재벌 사모도 해보았고, 도나와 함께 작품도 해보았다. 회생의 행운까지 바라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시간을 아껴 쓰고 싶다”며 새 배역에 몰입한다. 드라마는 배우로서의 성장과 인간으로서의 성숙을 나란히 배치한다. 기백 넘치는 정마담 역할에 몰입할수록 라라의 눈빛은 더욱 깊어진다. 라라는 신 감독의 순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 회장을 오랜 친구처럼 대한다.

그런 라라 옆에서 두 남자는 눈물을 흘리며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사랑과 죽음에 초연한 채 자기 길을 가는 여자와 그의 곁을 지키며 서로를 위로하는 두 남자의 구도는 낯설다. 심지어 신 감독은 라라에게 청혼한 뒤 거절당하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하려 한다. “라라씨를 만나 사랑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하는 순정의 화신이자, 결혼을 강요하는 가족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고자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려는 남자는 기이해 보인다. 그런데 지금껏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런 수동공격형의 피학적 인물로 그려졌던가.

젠더의 역전은 도나의 사랑에도 나타난다. 톱스타 설도현과 연하의 단역배우 김범우가 동시에 도나를 사랑한다. 더욱이 설도현은 도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고, 김범우는 가난한 고아에 심리적 외상을 지닌 인물이다. 그럼에도 도나는 자신이 조련한 배우 김범우를 선택한다. 잘난 남성에게 간택받아 구조되는 신데렐라나 ‘실장님’의 조력을 받는 ‘캔디렐라’의 구도가 아니라, 여성이 관계를 주도하고 남성을 조련하는 평강공주의 구도를 취하는 것이다.

도나는 남성과의 관계가 아니라, 직업적인 성취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씩씩한 여성이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이며, “여자 냄새 풀풀 풍기며 남자들의 보호나 받고 싶어 하는” 라라의 딸이라는 사실에 진저리를 친다. 라라를 남처럼 대하던 도나는 배우이자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라라를 보며 조금씩 마음이 열린다. 후반으로 갈수록 드라마는 라라와 도나의 삼각로맨스보다 모녀 관계의 회복에 공을 들인다. 모녀는 단지 혈육의 정으로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라라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고 신인배우이자 미혼모였던 라라의 입장을 도나가 이해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반목하기 쉬운 여성들 간의 적대가 해소되고, 서로의 삶을 이해함으로써 연대에 이르는 과정으로 읽힌다.

라라가 결혼 뒤 낳은 두 딸의 삶도 흥미롭다. 정 회장의 후계자이자 명예 남성으로 자란 큰딸 혜미는 결혼 직후 가부장제의 모순에 직면한다. 혜미는 이를 참지 않고 이혼함으로써, 남편과 시가를 파산시킨다. 막내 성아는 일찌감치 권위적인 아버지의 집을 나와 가난한 뮤지션으로 살아간다. 성아는 이혼한 라라가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자 모녀 관계 회복의 원군이 된다. 혜미와 성아가 흔한 재벌가 여성들에 비해 진취적으로 사는 것도 놀랍지만, 남보다 못한 관계였던 도나와 친자매로 마주하는 모습은 더욱 놀랍다. 드라마는 서사를 통해 말한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들을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남성 중심의 질서라고. 각자의 자리에서 그 질서에 맞서 싸우는 자매들에게 연대와 응원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브라보 유어 라이프.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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