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과 외교의 천재 장수왕이 한국에 주는 교훈

임기환 2018. 2. 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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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38] 장수왕이 북연 문제를 둘러싸고 북위와 송에 대해 강경과 온건, 또는 양면책을 적절하게 구사하였음을 전회에서 살펴보았다. 재위 초기에 얻었던 이런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장수왕은 재위 전 시기에 걸쳐 득의의 외교 전략을 전개하였다.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동북아 균형외교' 전략이다. 그동안 등거리 외교라고 불러왔는데, 동북아 역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고구려 중심의 국제 질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균형외교'라는 개념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균형외교 전략은 동북아에서는 장수왕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며, 이후 고구려 외교전략의 기본축이 되었다. 근자에 우리나라에서 거론되는 동북아 균형외교론이나 동북아 균형자론의 선구적 형태로 보아도 좋겠다.

장수왕이 재위하고 있던 5세기의 국제정세를 보면,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에 북위(北魏)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양자강 남쪽에는 한족 왕조인 동진(東晉, 317∼420), 송(宋, 420∼479), 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이 양분되어 있는 소위 남북조시대였다. 여기에 북위 북쪽에는 유목국가인 유연(柔然)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서역에는 토욕혼(吐谷渾)이 나름 강국의 면모를 보였다. 그외에 고구려의 주변에는 백제, 신라, 왜 등 많은 나라가 있었으나, 그 세력이 약해 국제무대에서 그리 중요한 존재들은 아니었다.

당시 이들 나라 중 가장 세력이 큰 나라는 북위였다. 하지만 북위는 남조 국가나 북방의 유연 등 어느 나라도 쉽게 정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남조와 북방 유연 두나라가 서로 손을 잡고 북위를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북위가 유연을 공격하면 뒤에서 남조가 북위를 협공하고, 다시 북위가 남조를 정벌하면 유연이 뒤에서 위협했다. 그래서 강력한 힘을 가진 북위로서도 남북 양쪽의 강적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장수왕은 이런 대륙의 정세를 일찍 간파했으며, 중국의 분열과 대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외교전략을 구사하였다.

장수왕은 즉위 직후 413년 동진에 사절을 파견하여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하였으며, 동진의 뒤를 이은 송·남제와도 지속적으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였다. 그렇다고 북위를 적대국으로 돌린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북위와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물론 5세기 초반 아직 동아시의 국제질서가 안정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북위나 송과 우호적인 관계만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갈등과 충돌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전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435년에서 438년까지 북연(北燕) 및 북연왕 풍홍(馮弘) 문제 처리를 둘러싸고 장수왕은 북위 및 송과 각각 군사적인 충돌까지 감수하는 큰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 과정을 보면 장수왕은 북위와 송 양국에 대해서 상당한 긴장감 높은 모험을 시도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장수왕의 의도대로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북위와 송의 대립이라는 중국 정세가 배경이 되었다.

그 뒤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안정되어 가면서 장수왕은 무엇보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위와의 외교에 일단 주력하게 된다. 462년에 북위와의 교섭을 재개한 후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이루어진 교섭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남북조와 주변 여러 국가 사이에 맺는 어느 교섭 관계보다 그 밀도가 높고 우호적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양국 사이에 때때로 갈등과 충돌의 계기들이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472년에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북위에 청병 요청했을 때에도 그러하였고, 466년경에 장수왕의 딸을 현조(顯祖)의 후궁으로 맞이하겠다는 북위의 제의를 고구려가 거부하면서 갈등이 증폭되기도 하였다. 또 장수왕이 남제와 통교하고 있음에 대해 북위가 불만을 자주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예들은 장수왕이 당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는 국제질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최강대국 북위와도 당당하게 맞서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장수왕은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연(柔然)과도 교섭을 가져, 479년에는 흥안령산맥 일대에 거주하던 지두우(地豆于)족의 분할 점령을 꾀하였고, 지두우 남쪽 시라무렌강 유역의 거란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눈강 일대의 실위(室韋)에 철을 수출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장수왕대의 고구려는 북위·남조·유연 등과 균형 외교전략을 구사하면서 독자의 세력권을 유지한 것이다. 사실 각각의 세력으로 따지자면 고구려가 이 세 나라보다는 열세에 있었다. 하지만 이들 세 나라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여서 동방의 고구려와 동맹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동아시아의 4강대국 중에서 북위와 남조 유연, 이 세 나라는 서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는 등 적대적 관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지만, 고구려는 200년 가까이 이들과 전쟁 한 번 없이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고구려는 동방에서 자신의 독자적 세력권을 유지하고, 그에 걸맞은 독자의 천하관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혹자들은 고구려가 중국대륙 방향으로 진출하지 않은 것을 자꾸 아쉬워하는데, 만약 그랬다면 고구려는 중국의 전쟁 무대에 휩쓸려 들어가 국가의 존망이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당시 국제 정세에서 장수왕은 가장 적절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고 보겠다.

이러한 장수왕의 탁월한 외교 전략 결과 높아진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은 『남제서(南齊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잘 보여준다. 즉 북위에서 사신의 관저를 두었는데, 남제의 관저를 제일 큰 것으로 하고 고구려의 관저가 그 다음이었다고 하였다. 또 489년에는 북위가 사신들의 모임(元會)에서 남제의 사신을 고구려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으므로 남제 사신이 북위 조정에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를 통해서 동북아시아 국제세계에서 고구려의 위상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장수왕대 고구려는 중국 및 북아시아의 여러 세력과 다각적인 균형외교를 통하여 중국 세력이나 북방 세력들이 동방지역으로 뻗어오는 것을 막고 만주와 한반도를 무대로 고구려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평양의 전동명왕릉(1941년 조사) :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장수왕(長壽王)은 그 왕호에서 금방 알 수 있듯이, 98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재위기간만도 79년이다. 그런데 '장수(長壽)'라는 왕호는 단지 長壽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長壽에 걸맞게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장수는 왕호로 내세울 만한 長壽가 아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長壽'를 왕호로 삼은 것은 바로 부왕의 '광개토'와 버금가는 훈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러 세력들이 얽히고 얽혀서 전개되는 다원적인 동북아 국제정세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흐름을 읽고 다양한 전략으로 적절하게 대응하는 외교력을 발휘했던 노련한 군주였다.

413년에 즉위하여 491년에 사망하기까지 79년간이나 고구려를 통치하였던 장수왕. 그의 재위 기간에 북위는 5명의 황제가 바뀌었고, 중국 남조는 동진(東晋)에서 송(宋)으로, 다시 남제(南齊)로 왕조가 세 번이나 교체되었다. 그런 변동의 한 세기를 온전히 한몸으로 넉넉히 감당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長壽'란 왕호가 선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5세기는 바로 장수왕의 시대였다.

491년 장수왕은 9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북위 효문제(孝文帝)는 상복을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 나아가 애도를 표했다. 북위 황제가 외국 군주의 사망에 이런 예를 행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연장자로서 그에 걸맞는 어른 역할을 했던 장수왕에 대한 존경의 뜻을 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쯤 되면 '균형외교'의 틀을 넘어서 고구려 '중심외교'를 펼쳤다고 평가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장수왕의 안목과 전략이 한층 아쉬운 오늘날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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