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이 만인과 싸운다'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

입력 2018. 2. 1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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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남편과 아내,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큰집과 작은집 등 명절 갈등 분출

명절은 갈등을 분출시키는 시기다. 온 가족이 모여 피우는 화기애애한 웃음꽃은 금방 시들고 만다. 남편과 아내 사이,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사이, 큰집과 작은집 사이 등 전선이 생길 만한 곳마다 분쟁은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전선은 이동한다. 직장인 남기훈씨(31)가 지난해 명절에 느낀 것도 묘하게 달라진 갈등의 구도였다. 같은 또래 사촌형제들의 자식 자랑으로 십수 년간 이어졌던 큰집과 작은집 사이의 경쟁이 어느새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대결로 바뀌었던 것이다.

고향에서 설 명절을 보낸 귀경객들이 서울역에 내려 발길을 옮기고 있다./김기남 기자

한국인 분쟁 비율 OECD 중 가장 높아

“발단은 신혼인 사촌동생이 (아내인) 제수씨한테 제사음식 만들지 말고 방에서 애만 보라고 한 것 때문이었죠. 근데 그 전부터 조짐이 보였죠. 어른들 말씀을 들을 때마다 단순한 세대 차이 수준을 넘어서 답답하다고 느끼게 되면서부터였으니까.” 명절마다 큰집인 남씨의 집으로 작은아버지 일가가 제사를 지내러 올 때마다 자식이 귀한 집안에서 한 살 터울인 남씨와 사촌동생은 어릴 때부터 곧잘 비교대상이 됐다. 반에서 몇 등을 했느니, 대학을 어디 갔느니 하는 자식 대결이 이어져 오면서 남씨와 사촌동생은 서로를 은연중에 경쟁상대로 인식해 왔다. 대학 학벌로 따지면 경쟁에서 앞섰던 남씨였지만 취직이 늦어지는 동안 명절마다 작은아버지의 반격을 받고 판정패를 당해 왔다. 사촌은 일찌감치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취직 못하는 죄인 입장에서 별다른 항변을 못하던 남씨에게 점차 우군이 되어준 것은 사촌동생이었다. 작은아버지에게 요즘 청년세대의 취업난을 모른다며 남씨의 편을 들었던 사촌동생에 맞서 의외로 남씨의 부모님이 남씨를 공격하는 양상까지 벌어졌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모두 ‘마냥 놀지 말고 눈높이를 낮춰라’고 하시니 ‘그럼 최저임금만 받는 일자리도 괜찮냐’고 답했는데, 오히려 ‘부모님 등골 휘는 걸 생각해서 그거라도 벌면서 취직 준비하라’고 하시니 할 말이 없었다”고 남씨는 말했다.

부모세대에게서 받은 게 있으니 자식세대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명절에 본격적으로 불거진 제사 준비를 둘러싼 갈등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사촌동생 제수는 따지고 보면 남씨 집안 사람도 아니고, 젖을 먹여야 할 갓난아기가 있었다. 남씨는 “어른들께서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으시면서도 ‘제사는 조상님들께 드리는 정성’이라며 투덜거리시니까 내가 ‘이 집에서 조상 덕 본 사람 누가 있느냐’고 했다”며 “엄마랑 작은어머니도 남씨 아니잖냐고 하니 대꾸가 없으셨다”고 말했다. 딱히 받은 것도 없는데 적잖은 품이 들어가는 제사가 번거로울 뿐인 자녀세대의 생각이 부모세대와 충돌했던 것이다.

남씨 집안의 경우를 보면 갈등의 주된 구도가 세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된 것처럼 보인다. 한국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세대 간 정치·사회 여론의 격차가 한 집안에서도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겪으며 살아온 세대들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남씨 집안을 넘어 한국 사회 전제로 보면 평균수명은 늘어나고 노인인구가 늘어나는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이러한 세대 간 갈등 역시 더욱 깊어질 여지도 엿보인다.

가족 구성원끼리도 경쟁과 견제의 대상

그러나 이렇게 ‘세대갈등’ 또는 ‘세대전쟁’으로 한국 사회의 주된 갈등구도를 파악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세대라는 변수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고 자신의 상황을 대입시키기도 좋기 때문에 자주 쓰이는 설명도구지만, 막상 세대갈등이 가리고 있는 다양한 현실의 갈등요인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펴는 대표적인 연구자가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다. 최근 펴낸 〈세대 게임〉이라는 책에서 전 교수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세대전쟁의 해법 찾기가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세대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전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남씨 집안에서 최근 벌어진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간의 갈등 이면에는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는 여러 뿌리 깊은 갈등요인이 있다. 제사 준비를 포함해 명절 일거리를 여성 위주로 맡게 되는 젠더 문제나 취직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교육을 받고 장기간의 구직활동을 벌여야 하는 일자리 문제 같은 것들이다. 여러 다른 사회문제를 보는 시각이 세대별로 차이를 보일 수는 있지만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지 않고 세대 간 갈등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앞뒤가 바뀌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대라는 용어를 써서 갈등에 이름을 붙이면 주목을 끈다. 전 교수는 그 이유로 간편하게 쓸 수 있고 여기저기 쉽게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꼽으면서도, 무엇보다 세대가 당사자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좋은 개념이라는 점을 언급한다. 세대를 구분 기준으로 삼으면 그 세대 구성원 전부를 손쉽게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을 수 있고, 다른 세대와의 차이를 부각시키기도 쉽다는 얘기다. 전 교수는 “그 덕에 세대는 일상에 깊이 뿌리 박은 최적의 정치언어 그리고 정치적 게임의 도구가 된다”며 “쉽고 빠르게 우리 편과 상대편을 갈라내어 지지자를 만들거나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내세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실제 세대 간 갈등의 현장에 있는 당사자 대신 이들이 다투는 ‘세대 게임’을 통해 누군가가 정치적 이득을 얻는 것이다.

문제는 명절마다 불거지는 갈등이 이미 일상의 곳곳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불협화음으로 압축되어 재발한다는 점에 있다. 법원까지 가는 소송이 아니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분쟁을 겪는 비율은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왔다. 올해 1월 발표된 OECD의 ‘2017 삶의 질(How’s life)’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지난 1년간 사회생활 중 각종 분쟁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34%로 조사대상 회원국 중 가장 높게 나타났다. 범죄에 따른 분쟁을 경험한 비율은 1%로 다른 회원국들보다 낮은 편이었지만, 특히 ‘사업과 고용’ 문제와 ‘이웃 및 주거환경’ 문제로 분쟁을 겪은 비율이 각각 10%, 6%로 다른 나라들보다 높아 한국 사회의 가장 주된 일상적 갈등요인으로 나타났다.

반면 위기에 처했을 때 지원 받을 수 있는 인간관계가 있는지를 묻는 응답에서는 전체의 75.9%만이 그렇다고 응답해 전체 회원국 가운데 꼴찌를 차지했다. 4명 중 1명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움이 되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이 전혀 없다고 답한 셈이다. 이러한 결과를 반영한 듯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 중 5.9점으로 역시 OECD에서 꼴찌였다. 일을 하는 직장에서나 일을 마치고 돌아가 생활하는 생활공간에서나 크고 작은 갈등과 다툼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많지만 이를 위한 사회적 지원은 받기 어려운 사회라는 점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간호사 이모씨(41)가 명절마다 겪는 갈등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업무 특성상 명절 연휴에도 교대근무를 위해 출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씨는 결혼 후 꾸준히 시댁과의 갈등을 경험해야 했다. 자영업자인 남편도 일 때문에 가게를 비우기가 어려워 명절마다 시댁을 찾아뵙기가 어렵다. 이씨는 설이나 추석 당일에 시간만 맞으면 시댁을 찾기 때문에 오히려 남편보다 더 자주 시부모님을 찾아뵙지만 핀잔을 듣는 것은 오로지 이씨의 몫이다. 이씨는 “더 서러운 건 해외여행 간다고 명절에 보지도 못한 적이 많은 시누이한테는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이라며 “일해서 번 돈으로 용돈을 드려야 잠깐 웃는 낯을 하시는데, 돈이 많아 여행 가는 사람은 아무 꾸중도 안 듣고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사람은 돈 갖다 바쳐야 넘어가는 게 납득이 안 간다”고 말했다.

이씨의 집안 내에서도 세대 간 갈등의 이면에 권력관계와 경쟁구도가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시집 온 며느리라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위치이기 때문에 이씨는 살아남기 위해 용돈을 드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있어야 했다. 개인이 경쟁력을 갖춰야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패배할 뿐인 각자도생의 삶의 모습이다. 이씨는 “남편이 사업을 하려고 시댁에서 도움을 받았다가 말아먹은 적이 있어서 괜히 남편이나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시부모님 앞에서 주눅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무한경쟁이 일상화된 능력주의 사회

가까운 가족 구성원들끼리도 경쟁 또는 견제의 대상이 될 정도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갈등이 만연해 있는 한국 사회의 특성이 만들어진 이유로 전문가들은 어릴 때부터 경쟁을 학습한 사회적 특성을 꼽는다. 세대갈등으로 가려진 뒷면에는 자본과 노동 간의 권력관계나 기득권층이 공고하게 쥐고 있는 정치권력 등 거시적인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일반 구성원들의 현실적 삶 속에서는 결국 각자도생의 경쟁사회라는 측면으로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전상진 교수는 “갈등은 모든 사회에 존재하게 마련이므로 여러 사회적 갈등들이 겹쳐 보이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는 세대갈등에다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되는 다른 경쟁사회와 같은 주요한 갈등이 겹쳐 보이게 되면 엉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말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세대갈등으로 사회적 갈등의 여러 다양한 면들을 퉁치는 것은 불합리하지만, 반대로 감춰진 갈등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는 부분에서 세대라는 도구를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특히 최근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움직임 등에 대해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능력주의’에 반하는 결과라며 반발 여론이 높았던 것은 눈에 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가 “세대투표와 세대갈등 등이 보여주듯 세대는 분명 사회 변화를 이끄는 동인이지만 같은 세대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이념 또는 계층에 따른 차이가 존재한다”며 세대의 유용성을 인정하면서도 “세대는 동시에 애매한 변수”라는 점을 언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능력주의에 따른 결과를 강하게 요구하는 청년세대의 모습은 세대 간 갈등의 논리나 그 자체로는 명확하지 않은 청년세대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분석하는 대신 문제의 핵심인 능력주의와 각자도생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더욱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년세대를 한 묶음으로 동일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사회에 막 진출하는 가장 젊은 세대가 반영하는 가치는 그동안 한국 사회가 만들어온 사회적 여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각자도생이라는 가장 중요한 갈등 원인의 하나를 청년세대가 앞선 세대보다도 더욱 적극적인 현실로 받아들인 것이 바로 능력주의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무한경쟁이 일상화된 능력주의 사회에서 공정한 규칙을 훼손하는 사건에 대해 가장 분노한 이들도 바로 이 청년세대”라며 “문제는 능력주의에 있다. 입시경쟁, 취업경쟁, 퇴출의 공포에 따른 생존경쟁은 능력주의의 살벌한 전쟁터를 이뤄 각자도생이라는 능력주의의 가장 어두운 그늘을 만든다”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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