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바보' 김주혁을 추억함.. 20년지기 소속사 대표 단독 인터뷰

김지수 대중문화전문기자 2018. 2.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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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안팎에서 만인의 형이자 동생으로 위계 없이 살았던, 故김주혁
영화 ‘흥부'에서 고아와 빈자를 돌보는 일상의 혁명가로 열연
20년 함께 한 나무 엑터스 김종도 대표 “그는 바보같을 정도로 남 배려했던 사람"

한국의 휴 그랜트로 불렸던 故김주혁. 영화 ‘공조'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지 불과 이틀 뒤인 2017년 10월 30일, 불의로 사고로 저 세상으로 떠났다./사진 제공=나무 엑터스.

처음 본 사람처럼 스크린 속의 김주혁을 쳐다보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흥부'를 보면서 김주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한평생 꿈을 꾸며 살았던 영화 속 조혁이라는 인물과 생전의 김주혁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김주혁은 영화 ‘흥부'에서 소설 ‘흥부'의 모델로, 악덕 정치인이었던 형의 반대편에서 고아와 빈자들을 돌보는 일상의 혁명가로 열연했다.

영화가 끝나면 형수의 나무 주걱이 싸대기를 칠 때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찰지게 얻어맞는 김주혁의 웃는 낯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흥부'로 분한 정우 옆에서 “꿈꾸는 자들이 모이면 세상이 조금 달라지지 않겠냐” 나직이 읊조리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윙윙거린다.

아, 빈자의 볼때기에 붙은 저 흰 쌀밥처럼, 튀지 않는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삶을 찰지게 여과했던 한 배우가 우리 곁에 없다니...

접신한 것 같은 메소드 연기로 관객을 몰아친 적 없고, 엽기적인 캐릭터의 압력으로 평론가들의 혼을 뺀 적 없는 김주혁. 오로라 같은 후광을 뿜는 대신 그저 ‘1박 2일'의 ‘구탱이형'처럼 필요한 자리에 재지 않고 몸을 보탰던 살가운 옆집 형. 배려가 느껴지는 정확한 연기로 영화에서 튀어나가려는 상대 배역의 돌출된 원심력을 미세한 구심력으로 치환해 붙들어주던 이가 그였다.

특별히 여배우들의 캐릭터가 돋보이는 페미니즘 스타일의 영화에 김주혁이 보여주는 헌신적 균형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40대의 어떤 남자 배우도 김주혁만큼 매끄럽고 일상적인 생활 연기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관통하지 못했다.

‘아내가 결혼했다'와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 ‘싱글즈'와 ‘청연'의 장진영, ‘홍반장'의 엄정화, ‘방자전'의 조여정,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의 전도연에 이르기까지. 김주혁은 여자와 불같은 사랑에 빠지기보다 한 여자의 인생을 존중해주는 방식(혹은 한 여배우의 커리어를 존중해주는 방식)으로 멜로 역사에 궤적을 남겼다.

유일하게 그가 멜로의 중심에 섰던 영화는 소심한 남자의 로맨스를 그린 ‘광식이 동생 광태'였다. 그는 그 영화에서 최호섭의 노래 ‘세월이 가면'을 불렀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그가 부른 투박한 노래의 한 구절이 그를 추억하는 마음과 어찌 그리 같을까.

1998년 sbs 공채 8기 탤런트로 시작한 김주혁은 초기 아이스타에 소속되었던 짧은 기간을 빼면 배우 생활의 전부를 나무 엑터스 김종도 대표와 함께했다. 그 세월이 20년이다. 유준상, 김강우, 문근영, 신세경 등이 소속된 나무 엑터스는 배우 전문 매니지먼트 회사로 1997년 김종도 대표가 설립했다.

김주혁과 동고동락했던 김종도는 김주혁을 ‘바보처럼 착했고, 폐 끼치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던 친구'로 술회했다. “자기를 보낸 슬픔으로 세상에 짐을 더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이 친구를 즐겁게 오래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주혁 씨와 가장 오래 함께했지요?

“올해가 꼭 20주년이 되는 해였어요. 작년에 사고 이틀 전에 더서울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 받았잖아요. 그때 수상 소감에서 “형! 내년에 꼭 20주년 파티하자"란 말을 까먹었다고 주혁이가 아쉬워했어요. 미리 20년 주년 선물로 내 손목시계도 사서 채워줬거든(웃음).”

김종도가 정교한 디자인의 검은색 위블로(Hublot) 손목시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시계가 유품이 돼버렸다'고 탄식하며. 시계를 3개월여 전으로 돌려보면, 그는 인생에서 가장 믿었던 파트너이자 동생이었던 김주혁을 작년 가을, 충남 서산에 있는 그의 가족 납골당에 안치하고 돌아왔다.

쌀쌀했지만 가을 햇살이 유독 눈부신 날이었다. 주혁의 아버지인 김무생 선생과 어머니 김의숙 여사에 이어 김종도가 치르는 세 번째 장례였다. “아버지도 가시기 전에, 주혁이를 부탁한다고 했고, 어머니도 그러셨어요. 당신들의 아들을 2년 만에 그 품으로 보내드리려니… 참 인생이 무상하더군요. 부모상 다 치르고 ‘형! 나 이제 고아야!’하며 쓸쓸하게 웃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김주혁은 2남 중 둘째였지만, 투병 중인 형이 있어 가족의 대소사를 챙기는 건 그의 몫이었다. 한마디로 어깨가 무거운 ‘막둥이’였다.

20년 지기 동료이자 친구인 나무 엑터스 김종도 대표와 김주혁.

-정우성만큼 청춘스타였던 적도 없고, 이정재만큼 야성적인 매력을 풍긴 적도 없는데, 뒤늦게 그의 존재감이 가슴에 육박해서 들어옵니다. 물 같고 공기 같았던, 아주 소중한 사람이 갔다는 느낌입니다.

“주혁이 성격이 그랬어요. 끼가 많았던 친구인데, 끼 부리는 걸 부끄러워했어요. 연기도 그래요. 자기 걸 최고로 하려는 배우가 아니었어요. 뒤에서 충분히 준비한 뒤에 상대방의 연기를 보고 그것에 잘 맞는 반응을 자기 연기로 택한 놈이었어요. 그러다 최근에 조금씩 욕심이 생긴 모양이야. 요즘 연기가 너무 재미있다고, 이젠 내 성격대로 한번 해보고 싶다고, 신이 나서 말했거든.”

-좋아했던 감독이 있었나요?

“봉준호 감독을 참 좋아했어요. 주혁이는 그동안 신인 감독들과 일을 많이 했어요. 그 친구도 이름난 감독들하고 왜 안 하고 싶었겠어요. 오랫동안 애태우며 기다렸죠. 봉준호 감독이 상가에 와서 그러더군요. “주혁 씨 사진들을 모두 모아놓고 다음 작품의 인물에 매칭 중이었다”고. ‘공조'의 윤제균 감독도 주혁이를 참 아꼈어요. 사람 됨됨이가 좋아 평생 주혁이랑 가겠다고 했지요.”

-배우로서 제2의 전성기가 시작되던 즈음이라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주혁이가 40대 중반의 아주 중요한 시기에 ‘1박 2일'로 1년 8개월을 보냈어요. 6개월 됐을 때 제가 나오라고 했더니 “형! 지금 내가 나가면 여기 무너져" 하면서 버티더라고. 나중에는 제가 PD를 찾아가서 “주혁이를 사랑하면 풀어달라"고 사정했어요. 그때 다시 영화 하면서 “우리 3년 만에 다시 흔들자" 했는데, 1년 6개월 만에 조연상 받았죠. 드라마 ‘아르곤'에서도 언론인으로 열연했고, 차기작도 줄줄이 대기 중이었어요.”

-사인은 더 밝혀진 게 있습니까?

“없어요. 완전히 미스터리야. 쇼크사라니? 그 친구는 지병도 없어요. 게다가 가장 컨디션이 좋을 시간에 운동하러 가다가 왜 거기에 처박혔는지(한숨)... 블랙박스 사운드가 꺼져 있어서 영상만으론 추측이 안 돼요. 용접기로 문을 뜯어내고 구출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제가 병원 도착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둔 뒤였죠.”

영화 ‘청연'의 한 장면. 이 영화에 출연했던 김주혁과 장진영, 모두 하늘로 떠났다.

-평소 운전을 자주 했나요?

“주혁이가 군대에서도 운전대를 잡았어요. 국군의 날 행사에서 탱크 견인 트럭을 운전할 정도의 실력이었어요. 평소에도 종종 내 차를 주혁이가 운전했죠. 신중한 사람이라 과속도 절대 안 해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김주혁의 사인을 ‘즉사 가능 수준의 두부 손상'으로 결론 내렸다. 오작동이나 급발진 등 차량 결함은 없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궁에 빠져 연연할 수 없어 이야기의 커브를 틀었다.

-배려가 출중했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보 같을 정도로 그랬어요. 배우는 배려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기 쉬운데 그 친구는 안 그랬어요. 다른 배우들이 대형 벤을 타고 다녀도 자긴 카니발을 탔어요. 뒷좌석에 앉는 것도 싫어했어요. 그러면 매니저가 파트너가 아니라 운전사처럼 보인다고. 항상 운전석 옆에 탔죠.”

-여성 중심의 서사에서 유독 제 역할을 다한 것도 그 바탕에 여성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초적인 기운이 조금도 없었어요.

“한국이 휴 그랜트였죠. 누군가 “너는 왜 여자들만 받아주냐?” 그러면 주혁이가 갸우뚱하면서 그랬어요.
“아닌데, 나는 내 역할 열심히 하는 건데…” 장진영이 ‘싱글즈'와 ‘청연'으로 여우주연상을 두 번 받았고, 손예진이 ‘아내가 결혼했다'와 ‘비밀은 없다'로 또 받았죠. 상가에서 많은 여배우가 오래 울다 갔어요. 엄정화, 김선아도 참 그 친구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어요.”

-아버지인 김무생 선생이 아주 엄하셨지요?

“엄하셨지만, 또 ‘막둥이'라고 주혁이를 예뻐했어요. 김무생 선생이 1대 ‘허준'을 하셨는데, 주혁이가 그 바통을 이어 ‘허준' 역을 했어요. 당시에 ‘무신'을 마친 상황이라 나는 연이은 사극을 반대했는데 “형! 나 이거 해야 돼. 아버지가 했던 작품이잖아" 하면서 달려들었죠. 결과적으로 3년간 수염 붙이고 사극만 했어요. 그새 사람들이 얼굴을 다 까먹어버렸어(웃음).”

차태현, 김준호, 데프콘 등과 출연했던 시즌3 ‘1박 2일'에서의 행복한 한 때. 그는 팀의 가장 연장자였다.

김종도는 대중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김주혁에게 예능‘1박2일'을 권했다. 이런 출연 스토리는 ‘1박 2일'에 ‘인지도 O인 명품 배우'라는 웃긴 자막으로 소개됐다. 예능에서 보인 모습대로 주혁은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낯가림이 사라지면 어김없이 막내 기질이 드러났다. ‘1박 2일' 멤버들은 형이지만 형 행세를 하지 않는 ‘구탱이형'을 사랑했고, 1년 8개월 동안 김주혁은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그는 후에 새 멤버를 축하해주기 위해 인형 탈을 뒤집어쓴 채 언덕을 구르고 손 하트를 날리며 프로그램에 재등장하기도 했다.

-그의 인생에 ‘1박 2일'이 선물이었던 것 같네요.

“선물이었죠. ‘1박 2일'하면서 형으로 살았던 경험이 주혁이에게 사회성을 가르쳤어요. 후배들이 힘들어할 때 챙겨주고 상황을 리드하면서 점점 성숙해져 갔어요. 신기한 건 주혁이는 계속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는 거예요.”

김종도가 김주혁을 만난 건 1997년이었다. “유준상이 괜찮은 친구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더군요.” 둘은 영동호텔에서 쭈뼛거리며 서로의 간을 보았다. 주혁은 sbs 공채 출신으로 몇 개의 단역을 거쳐 드라마 ‘카이스트'에 출연 중이었다. 당시 김종도는 김주혁을 ‘촌놈’으로 김주혁은 김종도를 ‘사기꾼’ 인상으로 기억했다. 알고 보니 둘은 비슷한 부류였다.

“당시에 나는 차도 없었어요. 주혁이가 소나타를 몰고 나를 픽업해서 영화사를 돌아다녔어요. 오디션장엘 가면 감독들이 내가 배우인 줄 알고 ‘조폭' 대본을 들이밀곤 했죠(웃음).”

둘은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거쳤다. 드라마 ‘카이스트'를 끝날 즈음엔 김종도가 고시원에 살기도 했다. “주혁이가 드라마 팀 회식을 한다는데, 명색이 매니저가 거기 갈 차비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술도 못 하고 사교성도 없으니 얼마나 뻘쭘했겠어요. 회식 끝나고 초코파이랑 우유 사서 숙소로 간다고 전화가 왔길래, 내가 괜히 미안해서 성질을 부렸어요. 감독 옆에 붙어 있어야지, 그렇게 낯을 가려서 앞으로 어쩔 거냐고.”

평생 낯을 가렸지만, 그는 무대가 요구하면 빼지 않고 나섰던 광대이기도 했다. 2011년 tvN의 ‘새러데이 나잇 코리아(이하 SNL)’는 분홍 손거울을 들고 면도하는 김주혁의 날렵한 턱선 사진으로 홍보를 시작했다. 내털리 포트먼이 19금 욕설을 퍼붓고, 짐 캐리가 우람한 팔뚝을 자랑하며 블랙 스완을 연기하는 이 위험천만한 쇼의 첫 무대를 젠틀한 김주혁은 완전히 장악했다.

tvN의 ‘새러데이 나잇 코리아’에 첫 호스트로 출연했던 김주혁. 아무도 첫 호스트로 출연하지 않으려했던 이 위험천만한 쇼에 출연해 환상적인 코미디 연기를 펼쳤다.

아직도 얼굴에 새파란 칠을 한 채 나비족 흉내를 내는 자신의 영상을 보며 “‘아바타’는 정말 아쉬워요”라며 킥킥대던 김주혁을 잊을 수 없다. 스티브 잡스 코스프레로 나왔던 ‘구로동에서 휴대폰 대리점 운영하는 김주발 씨’는 또 얼마나 귀엽게 경박했던가.

-그가 타고난 배우였다고 보십니까?

“타고난 배우였어요. 몸과 소리와 눈, 3가지가 다 좋았죠. 저음에도 딕션이 좋은 목소리, 알 파치노처럼 퀭한 듯 애잔한 눈, 그리고 근육이 탄탄한 몸까지. 하루에 3번 운동을 해서 슈트에 최적화된 몸을 만들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대학원생처럼 차림이 촌스러웠는데 점점 노력해서 베스트드레서 상만 3번을 받았죠.”

그는 김주혁의 작품 중에 ‘광식이 동생 광태’가 가장 김주혁다웠다고 회고했다. 남을 위해 희생만 하다가 7년 동안 로맨스의 기회를 놓친 남자, 자기 결점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소심한 캐릭터엔 김주혁의 본성이 얼마간 묻어있다. “드라마로는 김은숙 작가의 ‘프라하의 연인’이 굉장했어요. 지금의 공유 같은 인기였죠(웃음).”

김주혁은 2001년 ‘세이 예스'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첫 상대가 박중훈이었다. 여섯 신 정도 등장하는 작은 배역이었지만, 그는 그 영화를 내내 자랑스러워했다. ‘흥부'까지 20년 동안 20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존경했던 사람은 한석규였다. 한석규처럼 다큐처럼 연기하되 캐릭터의 매력을 살리고 싶어 했다. 한석규는 “주혁이를 보면 꼭 나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둘은 닮았다. 나긋한 성품, 담백한 연기, 보통의 사람의 얼굴... 필연인 듯 90년대엔 한석규가, 2000년대엔 김주혁이 그 시대의 멜로를 이끌어 갔다.

가끔은 ‘청연'에서 그가 장진영과 함께 하늘을 향해 미래를 예건 하듯 손을 들고 웃던 장면이 떠오른다. 기상 장교로, 여류비행사로, 삼십 대의 그들이 자기 한계를 깨며 얼마나 높고 애틋하게 비상했는가를 떠올리면, 그 각혈할듯한 진심의 생애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내가 결혼했다'나 ‘비밀은 없다'에서도 김주혁은 기꺼이 손예진의 ‘컬트적 욕망’을 받아주었다. “내가 하늘의 별을 따달래? 달을 따달래? 그냥 남편 하나 더 갖겠다는 거 아냐?” 그런 ‘말 안 되는 말'도 ‘말 되게 들어주는’ 놀라운 재주가 그에게 있었다. 19금 사극 ‘방자전'에 출연하는 조여정을 꿋꿋하게 방어해주던 이도 김주혁이었다. “고마웠어요, 나의 방자님"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유작이 된 ‘흥부'에서는 그의 이런 인간적이고 연기적인 면모가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특별히 친동생 같은 정우를 데리고 느티나무 아래 잠시 쉬어 모주를 마시던 장면이 기억난다. 나는 스크린 안에서건 밖에서건 만인의 형이자 만인의 동생으로 위계 없이 살았던, 한 인간의 생애에 감화받았다.

유작이 된 영화 ‘흥부'의 한 장면. 영화에서도 쉼표가 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술을 못 했던 그는 술자리에선 실론티만 마셨다. 어쩌다 파도타기를 하면 맥주 반 잔에도 만취해 쓰러지곤 했다. 술은 못 했지만, 술 마시는 자들의 행적을 관찰해 연기에 써먹곤 했다. 윤종찬 감독의 영화 ‘청연'과 홍상수 영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술에 전 남자를 천연덕스럽게 표현해냈다. 술과는 거리가 멀었으되 헤비스모커였다. 물욕이 없던 그가 유일하게 탐냈던 게 담배였다. 차 뒷좌석에 담배를 박스로 싣고 다녔다.

그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하루 세 차례 운동과 흡연 그리고 지병이 있는 형과 함께 지냈다. 가끔 동료 배우들과 회사 근처 떡볶이집에서 매운 떡볶이를 사다 먹었다. 촬영장이 그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동료들은 그의 ‘보통사람 같은 매력'을 좋아했다. 평소에도 끈기 있게 하지만 독하지 않게, 아등바등하지 않게, 조용히 늙어가길 바랐다.

-어떤 인간을 싫어했습니까?

“잘난 체 하는 사람을 싫어했어요. 나대는 걸 못 참아 해서 누가 오버하면 사색이 되곤 했죠(웃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극도로 싫어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너무 슬퍼하면 거기서 사색이 될 듯 같아. 아마 밝게 기억해주길 바랄 거예요.”

-배우로서 아쉬운 점은 없었나요?

“자기를 좀 생각해야 했는데, 너무 남 생각만 했어요. 바보다 싶을 정도로. 여우처럼 제 몫을 잘 챙겼으면 했지만, 양처럼 순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좋았지만, 그래서 또 아쉬워요. 자기 하고 싶은 데로 실컷 한번 살아봤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언론인으로 출연해서 정교한 연기를 펼쳤던 tvN 드라마 ‘아르곤'.

-언제 가장 행복해했습니까?

“죽기 직전이죠. 이젠 뭐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보면 그런 운명도 나쁘지 않아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으니까요.”

-후회되는 건 없나요?

“둘이 여행을 많이 못 가봤어요. 딱 한 번 날씨가 좋아 여의도에서 그 길로 커브를 틀어 부산을 가본 게 다예요. 후회보다는 그리움이 커요. 이젠 슬프기보다 외로워요. 친구가 곁에 없으니… 불현듯 울컥 심심해지겠죠.”

항상 같은 골목길 자리에 차 세워두고 대본 보기를 좋아했던 그를 위해, 운구 차량은 마지막으로 강남구청 뒷골목(김종도의 집 아래였다)에 머물러 담배 한 대를 태운 후 장지로 떠났다. 김종도는 “내가 그런 좋은 사람의 친구였다는 게 기쁘다"고 했다. 여전히 밤에 잠이 들 때면 드라마 ‘아르곤'에서의 반듯한 뒷모습이, “거친 세상이지만 꿈을 꾸는 것도 좋지않겠냐”던 ‘흥부'의 선한 음성이 아른거리는 채로.

몇 년 전 그와의 인터뷰에서 요즘같이 이기적인 세상에 상대의 연기까지 아우르며 연기하는 게 너무 힘들지 않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가 쓸쓸하게 말했다. “요즘 그 문제가 저의 딜레마예요. 저는 앙상블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결국 살아남는 사람들 보면 악착같이 자기 것 챙기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그러질 못해서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싶기도 해요. 그러다 보면 제 인상은 점점 흐릿해져서 사람들은 이제 저한테서 관심도 없게 되겠죠(웃음).”

그의 예상은 틀렸다. 그의 인상은 갈수록 또렷해졌고, 이제 사람들은 영원히 김주혁을 기억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한때 이런 좋은 친구가 있었다고. ‘끈기 있게 하지만 너무 독하지 않게, 아등바등하지 않게, 조용히 늙어가고자 했던’ 멋진 중년의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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