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전 18살 제주 소녀 김평국 곁에는 변호사가 없었다

2018. 3. 20.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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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수형인 재심청구
제주지법, 재심청구 심문기일 열어
피해자 4명 당시 군사재판 진술
15~19살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몰매 맞고 군사재판 뒤 형무소 수감
"죽기 전에 명예회복을"..재심청구

[한겨레]

제주 4·3 사건 수형인들이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제갈창)의 심리로 19일 오후 2시 열린 재심 청구 사건 심문기일에 출석하기 전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왼쪽부터 법무법인 해마루의 임재성·김세은 변호사와 재심을 청구한 부원휴(89)·오희춘(85)씨. 앞쪽 김평국(88·왼쪽)·현창용(86)씨는 휠체어를 타고 법원에 왔다. 제주/김민경 기자

“재판 받으러 가신 장소 기억나세요?”(임재성 변호사)

“고개나 들겠습니까. 죄인이라고 하니 고개 숙이고 따라갔지요. 들어가 보니 군인 세 명이 좀 높은 석에 왔다 갔다 하면서 서 있더라고. 현수막이 걸려 있었어요. 제77조 내란죄. 그거 하나는 기억에 있어요.”(김평국씨)

“몇 명이나 같이 재판 받으셨어요?”

“대략 눈짐작으로 둘러보니 한 100명이 안 됐나.”

“앞에 군인이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좀 높은 데서 왔다 갔다가 하고. 재판이라는 걸 받는데, 죄인 누구누구 불러다가 호명하거나 무슨 죄냐고 물어본 것도 없고 오늘이 무슨 날이라고 하는 것도 없고. 써 붙인 것만 보고 내란죄라는 죄로 벌을 받고 있구나 하는데 다 끝났다고 다 가라고.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재판이라는 건지 뭔지.”

“형량은 언제 들었어요?”

“포승줄을 가져와서 다섯 명씩 묶더니 배에 실어 전주형무소에 놓고 갔는데, 징역을 살아도 몇 년인지 모르고 갑갑하다고 하니 간수가 1년이라고 말했습니다.”

1948년 12월 경찰에 끌려가 ‘재판인지 뭔지’를 받는 18살 소녀 김평국씨 곁에는 변호사가 없었다. 본인임을 확인하는 ‘판사’의 인정신문도, 검사의 공소사실 낭독이나 구형도, 판결 선고도 없었다. 죽음의 공포에 겁먹었던 김씨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88살 할머니가 된 김씨는 지난 19일 처음으로 제대로 된 법정에 섰다. 증인석에 휠체어를 고정시킨 김씨의 맞은편에는 자신의 변호사가, 오른편에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판사 3명이 앉아 있었다. 검사뿐 아니라 자신과 같은 제주 4·3 사건 수형인, 지원단체 등 김씨를 응원해줄 방청객도 있었다. 재판 전 “많이 긴장된다”던 김씨는 “증인석에 서니 마음이 편해지고 해야 할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70년 만에 법정에서 ‘그날’들에 대해 조목조목 진술했다.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제갈창)는 이날 ‘제주 4·3 사건 수형인’들의 재심 청구에 대한 2회 심문 기일을 열고 김씨 등 청구인 4명의 당사자 진술을 들었다. 제주 4·3 수형인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제주도에 설치된 고등군법회의(군사재판)에서 옛 형법 제77조 내란죄, 국방경비법 제32조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죄, 제33조 간첩죄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의 이름, 본적지, 판결, 언도(선고) 일자, 복형 장소가 적혀 있다. 수형인 명부에 적힌 김평국씨의 이름 아래에도 ‘언도 일자: 1948년 12월5일, 항변: 무죄, 판정: 유죄, 형량: 징역 1년, 복형: 전주’ 등이 적혀 있었다. 김씨와 같은 제주 4·3 수형인 18명은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며 지난해 4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김씨는 1948년 가을께 “피난을 가야 산다고 해서 제주 남원통 시내로 내려갔는데, 경찰이 들이닥쳐 촌에서 온 사람은 다 나오라고 해 어머니, 두 동생과 영문도 모르고 잡혀갔습니다. 경찰에서 개 때려잡는 것처럼 말로는 할 수 없을 만큼 매로 사흘간 맞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김씨와 함께 증언한 현창용(86)·오희춘(85)·부원휴(89)씨는 15~19살 나이에 경찰에 끌려갔다가 1948년 12월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인천·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1948년 12월 군사재판은 제주 4·3 사건 때 중산간 마을에 사는 민간인을 몰아내는 1948년 10월17일 제주도경비사령부의 포고령과 11월17일 이승만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뒤 무장대를 토벌한다며 군경이 주민들까지 ‘대량 학살’하는 과정에서 적법 절차도 지키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진행됐다. 억울했지만 “징역살이가 부끄러워”서 타지에서 결혼했던 김씨는 이제야 맘 편하게 “무죄를 밝혀달라”며 재심을 청구했다. “이 재판을 40, 50, 60살 때 했으면 내 마음에 자유가 들어왔을 텐데, 그때는 징역이라는 그 두 글자가 몸에 딱 배겨갖고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재판 받아 좋은 일 나 봤자 죽는 일이나 기다리는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만 진짜 너무 억울합니다.” 30분 넘게 진행된 증언을 마치며 김씨가 재판부에 한 말이다. 제주/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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