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성장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정치사상 입력 2018. 4. 6.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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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는 시간의 강물 속으로 던져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몸이 자라고 마음이 영글어간다. 흔히 ‘성장’이라고 부르는 이 사태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먼저, 성장한다는 것은 주변과 자신의 비율이 변화하는 것이다. 성장의 체험 속에서 크기란 상대적이며 가변적이다. 꼬마였을 때, 가로수는 아주 커 보였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 가로수는 점점 작아 보이고 가로수 너머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확장된 시야 속에서, 한때는 커 보였던 부모 품도, 고향 동네도 점점 작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마침내 저 멀리 새로운 세계가 눈에 들어오고 나면, 어느 날 문득 떠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가족을, 옛 친구를, 혹은 자신이 나서 자란 고장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갔다. 이렇듯 성장은, 익숙하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작아져버린 세계를 떠나는 여행일 수밖에 없다. 익숙한 곳을 떠났기에, 낯선 것들과 마주치게 되고, 그 모든 낯선 것들은 여행자에게 크고 작은 흔적 혹은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는 우리를 다시 성장하게 한다. 혹은 적어도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그리하여 이제 세상 이치를 알 만하다고 느낄 무렵, 갑자기 부고를 듣는다. 예상치 못했던 어느 순간, 사랑하거나 미워했던 이의 부고를 듣는다. 무관심할 수 없는 어떤 이의 부고를 듣는다. 이 부고 역시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킨다. 이제 삶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부고의 체험은 다른 성장 체험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알 것만도 같았던 삶과 세계를 갑자기 불가사의한 것으로 만든다. 그 누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낱낱이 알겠는가. 이 세계는 결코 전체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어떤 불가해한 흐름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일, 우리의 삶이란 불가해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위태로운 선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 이 모든 것이 성장의 일이다.

그렇다면 성장은 무시무시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성장은 무시무시하게 확장된 시야와 더불어 심미적 거리라는 선물도 함께 준다. 미학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아름다움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다. 깎아지른 벼랑도 그 바로 앞에 서 있을 때나 무섭지, 멀리서 바라보면 오히려 아름답게 보인다. 풍랑 한가운데 있는 선원들은 공포에 사로잡힐지 모르지만,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회화사의 걸작 중에는 꽃다발을 가까이에서 묘사한 정물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난파선이나 전함을 그린 그림도 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1838)라는 그림을 보라.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살아남은 전함 테메레르호의 선체는 상처로 가득하다. 이 늙은 전함의 마지막 순간을 그릴 때, 터너는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투성이의 갑판을 그리지 않고, 대상과 심미적 거리를 유지한다. 그런데 거리를 두어야지 아름답게 볼 수 있다고 해서, 대상으로부터 한껏 멀어져버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대상으로부터 너무 멀어지면, 그 대상은 작아져버린 나머지 아예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게 된다. 그래서 터너는 전함으로부터 무조건 물리적으로 멀어지기를 택하지 않고, 그 특유의 모호한 붓질을 통해 물리적으로 그다지 멀리 있지 않아도 아련하게 느껴지게끔 전함을 그렸다. 아련하되 그 거리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기에, 테메레르호는 결코 보는 이의 눈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상처 입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확장된 시야는 삶이라는 이름의 전함을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관조 속에서 상처 입은 삶조차 비로소 심미적인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이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이다.

시야의 확대가 따르지 않는 성장은 진정한 성장이 아니다. 확대된 시야 없이는 상처를 심미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 동시에, 아무리 심미적 거리를 유지해도, 상처가 없으면 향유할 대상 자체가 없다. 상처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 용기가 없어 망설이다가 끝낸 인생에 불과하다. 태어난 이상, 성장할 수밖에 없고, 성장 과정에서 상처는 불가피하다. 제대로 된 성장은 보다 넓은 시야와 거리를 선물하기에, 우리는 상처를 입어도 그 상처를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상처도 언젠가는 피 흘리기를 그치고 심미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성장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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