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매일경제

서울 구의동 '고구려 보루 유적'에 담긴 비밀

임기환 입력 2018. 04. 19. 18:12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고구려사 명장면-43] 서울시 광진구 잠실대교 북단 한양아파트가 있는 곳은 해발 53m의 태봉이라 불리는 구릉이었다. 이 구릉 정상부에 무너져 내린 둥근 형태의 석축 시설물이 있었다. 1977년 이 일대에서 잠실·화양지구 토지구획 정리사업이 시작되면서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이곳을 발굴조사했다.

구의동 보루 전경 /사진=서울대학교 박물관

발굴 결과 놀라울 만큼 많은 유물이 쏟아졌다. 400점 가까운 토기는 물론 다량의 철제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 종류도 단지, 항아리, 시루 등 갖가지였다. 철기도 칼·창·화살촉·도끼 등 무기류, 보습·가래·쇠스랑 같은 농구류, 솥·항아리 같은 생활용기 등으로 다양했다. 무엇보다 1300여 점에 이르는 철제 화살촉이 눈길을 끌었다. 한 유적에서 이처럼 많은 종류의 철기가 대량으로 출토된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유적 자체도 독특했다. 지름 15m, 둘레 46m, 높이 1~1.8m 정도의 석축을 쌓고, 그 안에 온돌과 출입구, 배수로 등을 갖춘 주거 유적이 확인됐다. 주거 유적 중심부에는 폭 1.5m, 깊이 2.3m가량의 집수시설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있었다. 석축 남쪽 2곳에는 네모난 돌출부가 있었는데, 한강 남쪽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쪽을 향하고 있었다.

구의동 보루 복원도 /사진=서울대학교 박물관

이 유적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처음부터 논란이 있었다. 많은 군사 유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군사 요새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다소 의문이 있지만 애초부터 이 유적이 백제 고분일 거라는 선입관이 강했다. 그래서 군사 유적일 여지를 어느 정도 남겨둔 채 이 유적을 백제 고분으로 간주했다. 이때만 해도 학계에서 고구려 유물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유적이 고구려 유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1988∼1989년 몽촌토성 발굴에서 출토된 토기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유명한 고구려의 나팔형 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으로 남한에서 고구려 토기 출토가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구의동 보루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와 비슷함을 알게 되면서 뒤늦게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 군사 유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유적이 위치한 구릉 정상은 해발 고도가 높지 않으나 한강변에 접해 있어 강 건너 백제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등 한강 남쪽의 넓은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 보루는 일종의 전방 초소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곳과 짝해 아차산 일대에 다수의 고구려 보루 유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살펴보겠다.

그 뒤 1997년에 서울 광진구와 경기 구리시 경계에 자리 잡은 아차산에서 여러 고구려 보루 유적을 서울대 박물관에서 발굴하게 됐다. 이를 통해 고구려 토기 등 유물와 군사 유적에 대한 정보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면서 구의동 보루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도 보다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구의동 유적에서는 창 9점, 도끼 4점, 긴 칼 2점 등 개인 무기가 출토되었는데, 보병의 휴대 무기가 창이니까 창의 숫자만큼 군인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10명 정도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소규모 군사시설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구의동보루 투시 복원도 /사진=서울대학교 박물관

군사초소 유적에서 철기류와 토기류가 대량으로 출토된 점이 의아했다. 초소가 폐쇄됐으면, 군사들이 당연히 무기 등과 생활도구들을 갖고 이동했을 터다. 그런데 이 유적의 출토 양상을 보면 이런 무기와 도구들이 버려진 모습이었다. 군사들이 밥을 짓기 위해 이동할 때 반드시 먼저 철거하는 철솥과 철항아리가 요새 안 온돌 아궁이에 그대로 걸려 있는 채로 출토됐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군사들이 자신을 지킬 무기를 버리고 갈 리가 없다. 아마도 무기나 솥 같은 도구들을 미처 챙기지 못하고 겨우 몸만 빠져나가야 할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음에 틀림없다. 아니면 그곳에서 병사들이 모두 전멸했거나….

더구나 주거지에서는 불탄 흔적도 남아 있었다. 무기와 토기들이 불탄 자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고, 불을 끄려는 흔적도 볼 수 없었다. 불이 나면서 그걸 끝으로 이 유적은 파괴되고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구의동 보루에서 발굴된 솥과 아궁이 /사진=서울대학교 박물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이 구의동 보루에 머물던 고구려군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적의 기습 공격을 받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때가 언제일까?

이 구의동 보루 유적은 강 건너 백제 도성을 조망하기 위해 축조된 시설이다. 그렇다면 이 보루는 아직 백제가 한성에 도읍하고 있을 때 고구려군이 내려와서 한강 북쪽을 차지했을 무렵에 처음 만들어졌을 것이다. 빠르면 광개토왕이 백제를 압박할 때이거나, 늦어도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하기 이전 5세기 중엽일 것이다.

이때 백제군이 한성을 위협하는 고구려군을 막기 위해 강을 건너 공격해왔던 것일까? 그런데 이곳 보루와 부근 아차산 보루 유적에서 출토되는 고구려 유물은 대체로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에 걸치는 것들이다. 시기를 좀 더 뒤로 당겨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바로 551년,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동맹해 고구려를 공격해온 그때다.

이때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은 한성(漢城)을 공파하고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했고, 거칠부 등 여덟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의 10군을 확보했다.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 이 두 명의 걸출한 군주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하게 되자 고구려군은 그냥 무너져내리듯 한강 일대 영토를 순식간에 빼앗기고 말았다.

고구려는 왜 이렇게 쉽게 한강유역을 내주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시 구의동 보루로 돌아가보자. 장수왕과 문자왕 때 고구려가 차지한 한반도 중부지역은 대략 금강 상류지역에서 소백산맥 이북 지역이었다. 차츰 백제나 신라에 영토를 빼앗기면서 점차 경계선이 북상했다고 하더라도, 백제 군대가 한강 남쪽까지 코앞에 다다른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즉 백제와 신라가 동맹해 북진군을 일으켰을 때, 한강 북쪽 구의동 보루에서 본다면 아직 적이 쳐들어오기까지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의동 보루의 군사들은 너무 급박해서 무기까지 내팽개치고 도망했거나 혹은 전멸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기습을 당했다기보다는 전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한강이라는 천혜의 방어선도 사람이 지키지 않으면 도랑만도 못한 법이다. 당시 고구려의 남쪽 방어망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구의동 고구려 보루 유적은 우리에게 많은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귀한 자료를 가득 담고 있다. 이 구의동 보루 유적은 남한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고구려 유적이라는 점만으로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유적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보루가 자리했던 구릉조차 깎여나가 언제 구릉이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 보루가 있던 자리에는 1983년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제 보루의 흔적은 발굴조사보고서의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자리에는 보루보다 더 높은 아파트가 서 있지만, 개발이란 이름 아래 수많은 역사 유적을 파괴했던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이 시대의 단견(短見)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