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 칼럼] 이 세상에 동경시(東京時)는 없다

이정모 입력 2018. 5. 1. 10:59 수정 2018. 5. 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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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지금 모두 시간을 맞춰라. 정확히 30분이다. 그 시간 내에 인질을 구출하고 즉시 퇴각한다. 명심해라. 단 일분일초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 알겠지.”

소설 ‘스페셜리스트’의 한 장면이다. 인질 구출 작전에서 시간은 아주 중요하다. 전 부대원이 같은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를 차고 있어야 한다. 수많은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봤다. 하지만 그냥 소설과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다. 요즘은 이런 지시를 굳이 내리지 않아도 된다. 휴대폰과 전자시계는 GPS가 알려주는 시간을 자동적으로 게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4월27일 역사적인 남북평화회담이 열린 판문점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에 도착하자 근접 풀 기자가 주변에 있던 기자에게 “문 대통령이 8시31분에 도착했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다른 기자의 시계는 이미 9시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8시31분이라고 말한 기자의 휴대폰이 북한 시간으로 자동 세팅되어 일어난 해프닝이다. 그렇다. 북한 사람의 시간은 남한 사람의 시간보다 30분 늦다.

불과 2년여 전에 시작된 일이다. 북한은 2015년 8월15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시간을 30분 늦췄다. 당시 조선중앙TV는 “현재의 시간보다 30분 늦은 시간 동경 127도30분을 기준으로 하는 시간을 표준시간으로 정하고 평양시간으로 정한다”라고 보도했다. 그런데 그 해 말 자유아시아방송은 북한의 10대 뉴스를 정리하면서 “지난 8월15일 남한이 표준시로 사용하는 ‘동경시(東京時)’ 기준 0시30분부터 새로 바뀐 ‘평양시’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라고 표현했다.

세종대왕 때부터 만들어진 해시계 앙부일구는 우리 민족과학의 자랑이다. 그런데 앙부일구는 휴대폰 시계와 맞지 않는다. 그때는 그게 맞는 시간이었다. 앙부일구는 각자 자기가 있는 곳에서 보이는 태양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시계다.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오르는 시간이 정오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정오가 있었다. 어차피 한 마을에서 태어나 그 마을에서 살다가 죽는 시대, 빠르게 멀리 이동하지 못하던 시대에는 각자의 시간을 쓰면 됐다.

그런데 아뿔싸!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철도가 등장했다. 기차로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시계와는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기차역의 벽시계를 봐야 했다. 시간을 통일할 필요가 생겼다. 영국인들은 그리니치를 지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그리니치 평균시(GMT, Greenwich Mean Time)를 정했다.

철도가 좁은 영국을 벗어나 거대한 대륙으로 뻗어나가자 문제가 확대되었다. 1876년 캐나다 공학자 샌포드 플레밍은 시골역에서 기차를 놓친 후 통일된 시간, 즉 표준시가 필요하다고 깨닫고 관련 논문 두 편을 제출했다. 그리고 1884년 마침내 영국 그리니치 자오선이 세계 공통 자오선으로 채택되었다. 굳이 그리니치 자오선이 표준이 될 이유는 없지만 영국이 이미 30년 이상 표준시를 사용해왔고 미국 철도 회사도 이를 기준으로 기차시간표를 작성했기 때문에 ‘편의성’이 높다는 사실이 고려되었다.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시절이던 1908년 4월1일 서양식 시간대를 처음 도입하면서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표준시를 도입했다. 그리니치 자오선이 지나가는 영국보다 8시간30분 빠른 시간이고 GMT+8:30로 표기한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일본과 같은 동경 135도 GMT+9:00으로 변경되었다.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우리나라 표준시는 이승만 정권 때 다시 GMT+8:30으로 돌아갔다가 5ㆍ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에 의해 또 다시 GMT+9:00으로 돌아가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이것을 되돌린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은 근사했다. 하지만 이번 주 토요일인 5월5일부터 다시 남한과 같은 시간을 쓰기로 했다. 지난 27일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만찬을 하기에 앞서서 평화의 집 대기실에 남과 북의 시간을 각각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가 걸려 있는 장면을 보고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내린 결단이라고 한다.

그러자 남한의 일각에서는 북한이 시간을 바꿀 게 아니라 남한이 시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왜 우리가 동경시를 따라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동경시(東京市)는 있어도 동경시(東京時)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의 표준시는 동경(東京)이 아니라 동경(東經) 135도를 기준으로 삼은 시간이다. 대략 오사카를 지난다.

표준시를 설정할 때, 정수 시간 단위의 시차를 두는 것이 표준이자 권고사항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과 같은 시간을 쓸지, 중국과 같은 시간을 쓸지를 결정해야 한다. 지금처럼 일본과 같은 동경 135도 표준시를 쓰면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중국과 같은 시간을 쓰려면 우리는 무수한 것들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어중간한 경우 빠른 시간을 택하는 게 일반적이며 에너지 절약에도 유리하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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