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왜 100여년 지배하던 한강유역을 빼앗겼을까?

임기환 2018. 5. 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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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44] 551년,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은 군사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목표는 고구려 공격이었다. 동맹의 두 주역인 성왕과 진흥왕, 비록 나이는 큰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영웅적 풍모를 지닌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이 두 인물이 손을 잡았으니,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 성왕은 백제 중흥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그는 538년 협소한 웅진으로부터 새로이 사비(충남 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웅진은 개로왕 때 한성을 잃고 허겁지겁 남으로 내려와 머물렀던 피난처와 같은 곳이어서 아무래도 도읍지로서는 모자람이 있었다. 사비도성은 웅진에 비해서 방어상에는 취약점이 있으나 바닷길로 나가 국제무대로 진출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즉 사비 천도 자체가 다시 강국으로 부상한 국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인 셈이다.

성왕은 나라의 면모를 일신하는 의미에서 국호도 남부여(南扶餘)로 고쳤다. 백제가 부여족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음을 대외적으로 선포하는 순간이었다. 사비 천도와 더불어 중앙과 지방의 지배체제도 새롭게 가다듬었으며, 불교 교단을 정비하는 등 문풍을 크게 일으켰다. 성왕의 이 모든 노력은 한마디로 잃어버린 옛 땅, 즉 한강유역을 수복하기 위해서였다.

신라 진흥왕은 7세의 나이로 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라 처음에는 왕태후의 섭정이 있었으나, 551년 재위 12년 정월에 개국(開國)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젊은 군주 진흥왕은 친정하면서부터 대외 군사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아마도 진흥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을 이용하는 북진 정책에 신라가 도약하느냐 마느냐하는 승부를 걸었던 듯하다.

551년 성왕과 진흥왕은 동시에 북진군을 일으켜 한강유역을 공습했다.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와 가야 연합군은 한성(漢城)을 공파하고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하였다. 거칠부 등 여덟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죽령을 넘어 고현(高峴)까지 진출하여 한강 상류의 10군을 확보하였다. 한강 하류와 상류로 나누어 진격한 백제와 신라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단번에 고구려 방어망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지난 회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의동 보루 유적은 고구려군이 무기도 챙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겨우 몸만 도망친 듯한 정황을 보여준다. 이곳 구의동 보루만이 아니라 고구려 남방 전선 전체가 마찬가지였을 게다. 이런 정황이면 과연 방어망이라는게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아차산 홍련봉 보루 발굴 사진

고구려군은 왜 이렇게 무기력하게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것일까? 광개토왕 때부터 백년 가까이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얻은 한강 땅인데, 왜 이렇게 단숨에 빼앗겨 버렸을까? 그 이유를 따져보면 한두 가지가 아닐 게다.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 방식의 문제도 짚어봐야 하고, 새로운 긴장이 일어나고 있던 요하 일대 서방 전선의 정세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상치 않은 왕의 죽음이 연이어지는 불안한 국내 정세에 우선 주목하고 싶다.

지난 회에서 안장왕과 한씨 미인의 로맨스를 다루면서 언급하였듯이 531년 안장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그 뒤를 이은 안원왕 역시 재위 15년인 545년에 외척들 간의 정쟁 와중에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이런 두 왕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 어디에도 정쟁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의 정세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백제는 두 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백제본기(百濟本紀)'에 남겼고,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기(欽明紀) 6년·7년조에 이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제법 신뢰성 높은 기록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

안원왕은 세 부인이 있었는데, 정비인 대부인(大夫人)은 소생이 없었으며, 중부인(中夫人)과 소부인(小夫人)에게서 각각 자식을 두었다. 중부인의 아버지는 추군(麤群)이었고, 소부인의 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태자가 없는 상태에서 이 두 외척은 자신의 외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호심탐탐 기회를 엿보았는데, 재위 15년에 안원왕이 병이 들자, 마침내 후계를 노린 외척 추군과 세군 사이에 정쟁이 벌어졌다. 545년 12월, 두 외척이 동원한 군대는 평양성 안에서 3일 동안 전투를 벌였고, 이때 패배한 세군 측의 희생자가 2000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틀 뒤 안원왕도 끝내 붕어하고 말았다.

이때 2000명이 넘는 희생자 수를 보면 당시 왕위를 둘러싼 정쟁에 외척만이 아니라 상당수 중앙귀족이 가담한 대규모 정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만큼 중앙에서 일어난 정쟁의 여파는 지방에까지 심각한 파급을 일으키고 있었다. '삼국사기' 권44 거칠부전(居柒夫傳)에 의하면 551년 거칠부가 지휘하는 신라군이 북진할 때 고구려의 혜랑법사(惠亮法師)가 문도를 이끌고 거칠부를 맞이하여 "지금 우리나라의 정국이 혼란하여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신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이러한 혜량법사의 동향으로 볼 때,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상실한 데에는 중앙 정계의 혼란뿐만이 아니라 중앙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거나 위기의식을 느낀 지방세력의 이탈도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었다.

안장왕~양원왕대에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쟁이 거듭 일어나면서 고구려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바로 한강유역의 상실이었다.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한강유역 공격은 고구려의 국내 정세를 잘 파악하여 적절한 기회를 포착한 군사행동이었다. 위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전하는 '백제본기' 기록은 당시 백제가 고구려의 내부 정세에 상당히 정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백제인의 염원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반대로 고구려는 나태하고 방심했다. 자신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백제의 눈길을 미처 깨닫지도 못했다. 소백산맥 남쪽 신라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 대가는 컸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효과적으로 수습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언급하겠다. 그리고 당시 국제 정세의 변화는 한반도만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전체에 새로운 파동이 일고 있었다. 이때 고구려인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깊은 저력을 보여주었다. 한강유역 상실은 뼈아픈 교훈이 되었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으면 그것은 더 이상 실패가 아니다. 쉬운 듯하지만 막상 실행하기 어려운 깨달음이다. 실패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나라가 망하는 사례를 역사에서 숱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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