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때 경찰 도움으로 목숨 건진 청소년의 증언

맹대환 2018. 5. 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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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하 전 도경국장 강경진압 거부에 풀려나
10여 년 흐른 후 안병하 국장의 지시 알게돼
【광주=뉴시스】맹대환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에 붙잡혔다가 경찰의 도움으로 풀려 난 이정주(56) 광주시교육청 전문경력관이 당시 안병하 전남도경찰국장을 회고 하고 있다. 2018.05.08 mdhnews@newsis.com


【광주=뉴시스】맹대환 기자 = "안병하 전남도경찰국장(현 전남경찰청장)이 죽기 직전의 저를 살린거죠. 5·18민주화운동 때 안 국장이 살린 광주시민은 수 백명 이상일겁니다."

5·18민주화운동 제38주년을 앞두고 신군부의 강경진압 지시를 거부하며 광주시민들의 안전을 우선시했던 안병하 전 전남도경찰국장의 행적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이정주(56) 광주시교육청 전문경력관에게 안병하 전 전남도경국장은 생명의 은인이다.

이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18세(고 2) 청소년으로 시위대에 가담했다. 조선대부고 야간에 다니다 중퇴한 후 옛 전남도청 건물 뒤에서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었다.

인쇄소에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신문을 접했고 시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계엄령과 김대중씨의 구속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를 시위대로 인도했고 미성년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운명과 마주해야 했다.

1980년 5월20일 오후 5시30분께. 이틀 전부터 공수부대의 유혈진압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금남로에서 버스와 택시 등을 이용한 차량시위가 벌어졌다.

이씨는 그 때 친구 두 명과 택시를 타고 있다가 진압군에 혼자 붙잡혔다. 진압군은 그를 곤봉으로 무차별 폭행한 뒤 멜빵바지 뒤 쪽 끈을 잡고 광주YMCA까지 질질 끌고 갔다. 그 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어른 30여 명이 있었다.

이 때부터 운명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진압군의 호송차량 도착이 늦어지자 경찰이 검거자들을 경찰에 인계해 달라고 요청했다. 군인들이 수락하지 않자 몇차례 더 요청했고 결국 경찰이 시민들을 경찰 호송버스에 태워 동부경찰서로 데려갔다.

당시 진압군에 의해 조선대 운동장이나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던 시민 상당수가 사망하거나 큰 부상을 입었던 것과 대조하면 경찰의 판단이 생사를 가른 것이다.

몇시간 후 한 경찰간부가 호송버스에 올라 타 커튼을 모두 치고 전조등도 켜지 않은 채 시민들을 어디론가 이송했다. 도착해보니 도청 내에 있던 도경 회의실이었다.

이 곳에서도 이씨는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공수부대원들이 찾아 와 시민들에게 곤봉을 무차별로 휘둘렀어요. 이 때 한 경찰이 등이나 팔다리는 부러져도 고칠 수 있으니 머리를 다치지 않게 감싸안으라고 조언하더군요."

한 경찰은 앳돼 보이는 이씨를 회의실 한 쪽 구석에 있는 간이침대 밑으로 숨겨줬다.

"침대 밑에 숨어서 보니 군인이 간간이 들어와 곤봉을 휘두르는 바람에 많이 맞았던 한 어른은 죽은 것 같았어요."

지옥 같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음 날 금남로에는 학생과 광주시민들의 시위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감당하지 못한 공수부대는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다.

그 무렵 이씨도 풀려났다. 경찰이 밖에서 채웠던 자물쇠를 풀어놓고 후퇴한 것이다. 이씨와 함께 붙잡혔던 시민들은 도청 뒤 쪽 담을 넘어 흩어졌다.

이씨는 8일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경찰이 나중에 책임소재를 피하기 위해 도망가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열쇠를 열어놓아 진압군에 끌려가지 않고 결국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당시 경찰이 시민들에게 우호적인 것을 이상하고 고맙게 생각했지만 어떤 이유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10여 년이 흐른 후 안병하 당시 전남경찰국장이 신군부의 강경진압 지시를 거부한 데 따라 경찰이 시민의 안전을 우선시 했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당시 이씨가 진압군에 붙잡혔다가 경찰 도움으로 풀려난 상황은 기록이 없었으나 최근 이씨가 증언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이씨는 최근 안 전 국장의 셋째 아들 안호재씨를 만나 고마움을 표시했다. 안씨도 이씨로부터 아버지의 5·18행적을 듣고 증언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안 전 국장은 5·18 후 신군부의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됐으며 보안사령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후유증에 시달리다 1988년 10월 별세했다.

이후 2006년 순직에 의한 국가유공자로 등록됐으며, 정부는 지난해 안 전 국장의 계급을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특진 추서했다. 전남경찰청은 지난해 11월 안 전 국장의 추모 흉상을 청사 1층에 건립했다.

mdhnews@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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