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과학사](31)전쟁 중 헤어진 아들, 새의 인식표로 찾다

2018. 5. 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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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오가 조류학 연구자로 성장한 뒤였다. 북방쇠찌르레기를 연구하던 원병오는 새들에게 일본에서 구해 온 인식표를 달아주었고, 그 가운데 1963년에 포획했던 한 마리가 1965년 평양에서 아버지 원홍구의 눈에 띈 것이다

조류학자 원병오 교수/이상훈 기자
1965년 여름, 북한의 원로 조류학자 원홍구(元洪九·1888~1970)는 평양 만수대 근처에서 철새인 북방쇠찌르레기 한 마리를 잡았다. 그는 새를 관찰하다가 다리에 추적용 알루미늄 가락지(인식표)가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누군가 다른 연구자가 그보다 앞서 이 새를 잡았다가 인식표를 채우고 놓아주었다는 것을 뜻했다. 철새의 이동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흔히 이용하는 연구방법이다.

그런데 원홍구는 가락지에 ‘農林省 JAPAN C7655’라는 일본 표지가 새겨져 있다는 데 주목했다. 북방쇠찌르레기가 일본에서 서식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의 조류학계에 이 인식표의 내력에 대해 묻는 편지를 보냈다.

원홍구는 일본 도쿄의 국제조류보호연맹 아시아본부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답장에 따르면 이 인식표는 일본 농림성이 야마나시(山梨) 조류연구소에 제공한 것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철새 인식표를 생산하지 못했던 남한의 조류 연구자들이 일본에 협조를 요청하여 야마나시 조류연구소가 인식표를 보내주었고, 그 중 하나를 달고 있던 북방쇠찌르레기가 원홍구에게 포착된 것이었다.

이 답장에는 인식표를 제공 받은 남한 연구자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읽은 원홍구는 다시 일본에 한 장의 편지를 더 보냈다. 그 이름 ‘원병오’의 한자 표기를 확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원홍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진 막내아들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조선인 생물학자

원홍구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생물학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평안북도 삭주에서 1888년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생물학에 뜻을 두고, 당시 한반도에서 농업과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가장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수원농림학교에 진학했다. 1910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관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원홍구는 학업을 마치고 1915년에 귀국하여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20년에는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자리를 잡고 박물학을 강의했다. 가고시마 유학 시절에는 식물학에 뜻을 두었으나, 송도고보 교장 스나이더(Lloyd Harold Snyder)의 권유로 조류 채집을 시작한 뒤로는 평생을 조류 연구에 몰두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32년에 발표한 논문 ‘내가 수집한 조선산 조류 목록’은 한반도 조류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보고서로, 200여종의 자생 조류의 한국어 이름을 싣고 있어 당시 한반도의 생태환경뿐 아니라 한국어의 모습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다. 송도고보 시절 제자였던 석주명은 원홍구의 뒤를 이어 송도고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비 연구로 국내외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평안도 출신이었던 원홍구는 주로 북한지역에서 활동했다. 송도고보에 이어 평안남도 안주공립농업학교(1931)를 거쳐 함경남도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1940)와 평안남도 덕천공립농업학교(1945) 등에서 교장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는 강서농업학교 교장을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1947)의 교수가 되었고, 훗날 과학원 생물학연구소장을 역임하는 등 북한 생물학계의 중추적 인물로 활동하다가 1970년 10월에 사망했다. 사망 후에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는 등 사후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북한 우표. 빨간 테두리가 표시된 우표가 원홍구 조류학자 기념 우표./경향신문 자료사진

전쟁과 이산, 그리고 서신 왕래

원홍구는 고향인 38선 이북에서 활동하다가 북한에 터를 잡은 것이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월북’과는 다르다. 다만 그의 가족도 분단의 시련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원홍구는 부인·두 딸과 함께 북의 터전을 지키고, 세 아들은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한 곳에 모여 있다가 화를 당하느니 잠시 전란을 피해보자는 선택이었지만 그것이 영영 이별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전쟁이 모든 민족 구성원에게 상처만 남긴 채 끝나고 분단이 고착되면서, 월남한 원홍구의 아들들은 혼자 힘으로 앞길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들들도 생물학자로 성장했다. 장남 원병휘(元炳徽·1911∼1995)는 광복 전 이미 만주와 한반도 북부 쥐 연구로 이름을 알렸고, 월남 후 동국대학교 교수로 포유류 연구를 계속했다. 막내 원병오(元炳旿·1929∼ )는 아버지를 본받아 조류 연구에 뜻을 두고, 원산농업대학을 졸업한 뒤 월남하여 경희대 교수가 되었다.

앞서 소개한 사연은 원병오가 조류학 연구자로 성장한 뒤에 일어난 일이다. 북방쇠찌르레기를 연구하던 원병오는 새들에게 일본에서 구해 온 인식표를 달아주었고, 그 가운데 1963년에 포획했던 한 마리가 1965년 평양에서 아버지 원홍구의 눈에 띈 것이다. 원홍구가 1970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실제 상봉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갈라져 살아왔던 아버지와 아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당시 북한 언론은 이 기적 같은 사연을 대대적으로 다루었고, 소련과 일본 등 북한 소식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할 수 있었던 외국 언론들도 이 소식에 주목했다. 1993년에는 일본과 북한이 합작하여 〈새〉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조선일보〉 이영완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사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이들 부자는 제3국의 생물학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안부를 확인하고 소식을 주고받아 왔다고 한다. 그러나 서슬 퍼런 냉전 시기에는 서로의 소식을 안다 해도 그것을 밝히기는 어려운 일이었는데, 쇠찌르레기 덕분에 ‘새가 이어준 이산가족의 인연’이라는 아름다운 사연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다. (영화 〈새〉의 결말은 국제 학술행사에 참여하려는 아들을 남한당국이 막아서는 바람에 부자는 꿈에서 상봉하는 데 머무르고 만다는 체제 선전이기는 하다.)

한반도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나라로 갈라진 지 올해로 딱 70년이 된다. 이것을 ‘건국’이라며 추어올리려는 이들도 있지만, 이산가족의 아픔을 비롯하여 분단이 남긴 상처들을 생각하면 그런 편협한 주장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원홍구와 원병오 부자의 사연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새는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누구나 가슴 아프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몇 달 전만 해도 전쟁 걱정을 했던 한반도에 놀랄 만큼 훈풍이 불고 있다. 국제정세라는 것이 하룻밤 새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도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갈라놓았던 산하를 다시 사람들이 이어 하나로 되돌릴 수 있기를 희망을 담아 기원해 본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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