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오마이뉴스

나를 키운 나무.. 600번의 새봄

이돈삼 입력 2018. 05. 09. 12:09

기사 도구 모음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모교' 담양 한재초등학교의 느티나무

[오마이뉴스 이돈삼 기자]

담양 한재초등학교의 느티나무. 태조 이성계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을 들일 때 심었다고 전해진다. 수령 600년으로 추정된다. 천연기념물 제284호로 지정돼 있다. ⓒ이돈삼
오전 10시 30분, 조용하던 교실에서 여러 명의 어린아이들이 달려 나온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아이들이 콘크리트 의자를 둘러싸고 모여 딱지치기를 한다. 종이 딱지가 아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딱지다. 느티나무가 드리운 숲그늘 아래서다.

나무를 타고 위로 기어올라 나뭇잎처럼 싱그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는 아이도 여럿이다. 나무 밑에서 먹이를 물어 나르는 개미와 장난을 치는 아이도 보인다. 나의 눈과 마주치자, 연둣빛 나뭇잎처럼 수줍게 웃음 짓는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이 한없이 예쁘다. 내 몸과 마음도 금세 연녹색으로 물든다.

살아있는 자연체험 학습장이 따로 없다. 나무와 함께 노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토실토실 여물어가는 동심이 엿보인다. 아이들을 품어주는 느티나무도 듬직하다. 예나 지금이나, 사계절 언제라도 변함이 없다.

나무를 타고 노는 초등학생들. 사진기를 들이대자 나뭇잎처럼 싱그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세를 취해준다. ⓒ이돈삼
느티나무가 드리운 숲그늘에 모여 딱지치기를 하고 있는 초등학생들. 종이 딱지가 아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딱지다. ⓒ이돈삼
옛 생각이 절로 났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독후감 발표회를 한다고, 이 나무 그늘 아래에 전교생이 모였다. 학년마다 4개 반이, 그것도 반마다 60여 명이 다니던 때였다. 나무는 그 많은 아이들을 다 안아주었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엔 이 나무 아래에서 엄마가 정성껏 준비해 온 도시락을 펼쳐놓고 먹었다. 어쩌다 맛본 찐달걀 한두 개도 오졌다. 장기자랑 무대도 나무 아래였다. 가끔 진행된 야외수업도 늘 이 나무 아래에서 했다. 졸업사진을 찍을 때도 나무를 배경으로 줄을 지어 섰다.

어떤 날은 나무가 드리운 숲그늘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마을의 어르신들도 농한기 때면 여기서 더위를 식혔다. 나무는 언제라도, 누구라도 다 보듬어주었다. 힘이 들 때는 격려를, 우울해 할 때는 위로를 해주었다. 뉘엿뉘엿 기운 해를 뒤로하고 찾아간 날 밤,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달빛도 그지없이 황홀했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켜켜이 남아있다. 그때 깨복쟁이 친구들은 어디에서 뭘 하며 살고 있을까. 어떤 시인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거기에 빗대, 나를 키운 8할은 아마도 이 나무였지 않았나 싶다. 지금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된 나무다.

한재초등학교의 느티나무. 그 품새가 범상치 않다. 나무 한 그루로 울창한 숲을 이뤄 초등학생은 물론 마을주민들까지도 위무해 준다. ⓒ이돈삼
느티나무 밑에서 먹이를 물어 나르는 개미와 장난을 치고 있는 초등학생. 사진기를 든 나의 눈과 마주치자, 연둣빛 나뭇잎처럼 수줍게 웃음 지어 보인다. ⓒ이돈삼
한재초등학교의 느티나무 이야기다.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의 소재지인 대치리에 자리하고 있다. 한자로 큰 대(大), 고개 치(峙)를 쓰는 '한재'다.

'어른 다섯의 아름이 넘는 교정의 느티나무/ 그 그늘 면적은 전교생을 다 들이고도 남는데/ 그 어처구니를 두려워하는 아이는 별로 없다/ 선생들이 그토록 말려도 둥치를 기어올라/ 가지 사이의 까치집을 더듬는 아이/ 매미 잡으러 올라갔다가 수업도 그만 작파하고/ 거기 매미처럼 붙어 늘어지게 자는 아이/ 또 개미 줄을 따라 내려오는 다람쥐와/ 까만 눈망울을 서로 맞추는 아이도 있다….'

고재종의 시 '담양 한재초등학교의 느티나무' 앞부분이다.

느티나무 숲그늘에서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재초등학교 학생들. 나무와 함께 노는 어린 학생들의 얼굴에서 토실토실 여물어가는 동심이 엿보인다. ⓒ이돈삼
봄햇살에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느티나무 가지. 학교 학생들은 물론 마을주민들까지 모두 품어준다. 그 모습은 사계절 언제라도 변함이 없다. ⓒ이돈삼
나무는 운동장 한쪽에 서 있다. 그 품새가 범상치 않다. 늠름하기까지 하다. 키가 30m 가까이 된다. 가지는 사방으로 넓게 뻗어 있다. 둘레는 어른 대여섯 명이 두 팔을 벌려야 감쌀 수 있다. 가슴높이 둘레가 8.3m에 이른다. 나무 한 그루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을 들일 때 심었다고 전해진다. 새봄을 600여 번 맞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가 깊고 생물학적으로 보존 가치도 높다. 천연기념물(제284호)로 지정돼 있다. 담양의 여느 대나무보다도, 관방제림의 팽나무 고목보다도, 태곳적 이야기를 간직한 메타세쿼이아나무보다도 융융하다.

느티나무는 주변의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가족을 이루고 있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은행나무단상(杏壇)을 연상케 한다. 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에게 넓고 푸른 꿈을 심어주고 있다. 1만 명이 넘는 졸업생들에게도 숲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심어줬다.

느티나무 아래에 서 있는 돌부처상. 조각 솜씨는 섬세하지 않지만, 오랜 기간 불공을 받아온 옛사람들의 민간 신앙이었다. ⓒ이돈삼
오전 중간 쉬는 시간 30분을 이용해 운동장에 나온 남학생들이 야구놀이를 즐기고 있다. 600살 된 느티나무가 학생들을 듬직하게 지키고 서 있다. ⓒ이돈삼
숲에 서 있는 돌부처도 친근감을 안겨준다. 조각 솜씨는 섬세하지 않다. 후백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기간 불공을 받아온 옛사람들의 민간 신앙이었다. 한때 땅속에 묻혀 있었다. 마을 주민의 꿈에 나타나 세상의 빛을 다시 봤다고 전해지고 있다.

학교의 상징이 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석불이 어우러진 학교숲이다. 제1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았다. 대회는 생명의숲과 산림청, 유한킴벌리에서 주관한다. 숲은 학교의 배경이 되는 병풍산 자락과 한데 어우러져 더 멋스럽다.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단풍나무 등이 한데 어우러진 담양 한재초등학교의 학교숲 전경. 제1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았다. ⓒ이돈삼
초등학교의 역사도 깊다. 1920년 대치동공립학교로 문을 열었다. 100년이 다 됐다. 하지만 갈수록 학생들이 줄고 있다. 지금은 전교생이 100여 명 남짓 밖에 안 된다. 왁자지껄하던 옛 학교도 속속 폐교로 변하고 있는 지금이다.

느티나무와 함께 커가는 아이들을 다시 바라본다. 아이들의 공간이 자꾸 작아져만 가는 것 같다. 내 주변을 맴돌며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안절부절하는 학교지킴이의 모습도 현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느티나무 숲그늘에 모여서 노는 초등학생들 모습. 사진기를 본 여학생들이 사진을 찍어달라며 졸랐다. ⓒ이돈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Copyrights ⓒ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