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만물상] '좌표 찍기'

안용현 논설위원 입력 2018.05.10.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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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중국 문화대혁명에서 수많은 사람이 '주자파(자본주의 추종파)'나 '반당 분자'로 몰려 잔인한 린치를 당했다. '누가 주자파다'는 낙인은 대자보가 찍었다. 문혁 세력이 대자보로 누군가를 낙인찍으면 홍위병들이 곧바로 폭력을 휘둘렀다. 희생자들은 '바보 모자'로 불리는 원뿔형 종이 모자를 쓰고 목에는 '자본주의 앞잡이' 등의 팻말을 건 채 테러를 당했다. 홍위병들은 '좌표'가 찍히면 살인을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1933년 1월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 독일 나치는 4월부터 유대인 상점 창문에 육각 모양 노란색 '다윗의 별'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치의 좌표 찍기다. 다윗의 별에는 'Jude(유대인)'라는 글자가 쓰였다. 1938년 11월 10일 새벽부터 밤까지 나치의 좌표가 찍힌 유대인에 대한 폭력이 독일 전역에서 난무했다. 177개 유대 예배당과 7500여 개 유대인 상점 유리창이 깨지는 등 박살 났다. 유대인 90여 명이 사망했다. 그날 밤 깨진 유리가 수정처럼 빛났다고 해서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라고 불리는 광란이다.


▶지난달 MBC가 2014년 세월호 단식 농성을 비판한 우파 집회를 보도하면서 북한 정치범수용소 고발 뮤지컬 '요덕 스토리'를 만든 탈북자 정성산씨를 함께 10여 초 내보냈다. 그 후 정씨에게 항의 전화가 하루 100통씩 걸려왔다고 한다. 운영하는 냉면집 창문에 노란색 스프레이로 세월호 추모 리본이 그려지고, 비난 벽보가 나붙었다. 좌표가 찍힌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선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쓰는 일이 자꾸 벌어지고 있다.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이나 글은 인터넷에서 '좌표 찍기'부터 당한다. 한 번 찍히면 댓글 부대가 떼로 달려들어 입에 담기도 어려운 언어폭력을 휘두른다. 실제 폭력도 시작됐다. 지난 5일 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괴한으로부터 턱을 얻어맞았다. 앞으로 물리적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더 늘어날 수 있다.

▶남한 방송을 듣다가 북 수용소에 갇혔던 정성산씨는 북의 폭력을 피해 목숨을 걸고 탈북했다. 정씨는 최근 좌표 찍기 폭력을 겪고 "10년 전 요덕 스토리를 만들었을 때보다 요즘이 더 무섭다"고 했다. 이성과 양식(良識)이 사라진 자리에 광기가 싹튼다. 자기 의견만 옳고 다른 의견에는 폭력도 불사하려는 듯한 요즘 세태에 두려움을 느끼는 건 정씨뿐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