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법지대 태극기집회, '모르는 척'이 상책?

류인하 기자 2018. 5. 13.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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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매주 토요일, 서울 광화문 일대~안국역으로 이어지는 길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노인들이 점령한 지 오래다. 곳곳에서 ‘5·9 대선 원천무효’, ‘박근혜 사면’ ‘문재인 탄핵’ 등 갖가지 표어가 적힌 팻말을 든 노인과 ‘할저씨’(할아버지와 아저씨의 합친 말)들이 산발적으로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한다. 시민들 사이에는 일종의 불문율도 생겨났다. 바로 태극기를 든 집단 옆을 지나가면 쳐다보지도, 말을 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을지로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ㄱ씨(38)는 “지난 주말 여자친구와 길을 가다 ‘오늘도 많이 모였네’라는 말을 했다가 노인으로 보기도 애매한 나잇대의 어르신들이 ‘야 너 뭐야. 잠깐 서봐’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멈췄다가는 봉변을 당할 것 같아 황급히 도망쳤다”면서 “주변 지인들도 그렇고 소위 ‘태극기부대’라는 사람들을 보면 안 보이는 척, 안 들리는 척, 말 못하는 척하고 지나가는 게 상책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1년째인 지난 3월 10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이 박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위 사진은 특정사실과 관계없음 / 연합뉴스

광화문 일대~안국역 사이 매주 모여

주말마다 서울 도심에서 열리는 이른바 ‘태극기집회’에서 폭력행위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이렇다 할 대응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마모씨(31)는 지난 4월 28일 오후 7시쯤 친구와 함께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궁중문화축전 전시회 구경을 갔다가 태극기집회 참가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세월호 광장을 지나던 중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이 한 가족을 향해 욕을 하는 것을 보고 도우려다 봉변을 당한 것이다. 마씨는 현재 종로경찰서에 쌍방폭행으로 입건된 상태다. 마씨도 이들의 폭행에 저항해 함께 몸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덤벼드는 상황에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고 발로 차는 행동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 상황에서 무작정 맞고 있을 수만은 없었고, 많은 사람이 덤비고 있어 순간 공포심을 느꼈다”고 했다.

ㄴ씨는 지난해 3월 10일 태극기집회 참가자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하고 현재까지 1년 넘게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그는 박근혜 대통령 재임 4년을 기록한 책을 만드는 작업을 위해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광화문광장 앞에 설치된 태극기집회 무대를 지나던 중 한 노인이 “너 뭐야!”라며 멱살을 잡아 ㄴ씨를 바닥으로 넘어트렸다. 10여명의 집회 참가자들이 ㄴ씨를 밟고 발로 찼다. ㄴ씨는 의무경찰과 사복경찰들을 향해 “도와달라”고 소리쳤지만 이들은 “우리도 기동대가 없으면 못 막아요”라며 도와주지 않았다. ㄴ씨는 머리만 6번을 걷어차였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ㄴ씨는 순간 정신을 잃은 척했다. 그 순간 폭행에 가담했던 한 여성이 “이 사람 (여)학생이래”라고 소리쳤다. 참가자들은 ㄴ씨의 사지를 들어올려 안국역 뒤편 공터에 내려놓고 도망갔다. ㄴ씨는 폭행 당시 갖고 있었던 700만원 상당의 캐논 카메라도 도난당했다. 경찰에 피해신고를 했지만 석 달 뒤 돌아온 것은 ‘범인을 검거할 단서가 없어 검거하지 못했다. 미제편철한 후 다른 단서 발견 시 재수사하겠다’는 내용의 사건 처리결과 통지서였다. 통지서를 받은 지 1년 2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경찰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ㄴ씨는 “당시 태극기집회는 큰 행사였고, 의경과 사복경찰이 그렇게 많은 상황이었는데도 경찰은 채증영상 하나조차 없다고 했다”며 “경찰은 정신없이 맞고 있던 나에게 ‘왜 때린 사람의 얼굴을 못 봤냐’고 묻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태극기집회 현장은 이제 말 그대로 무법지대에 가깝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집회 참가자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시비가 붙고,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갖가지 이유로 시비가 붙는다. 심지어 일부 참가자가 싸온 김밥을 한 줄이 아닌 두 줄을 가져갔다는 이유만으로도 몸싸움이 벌어진다. 한미동맹강화국민운동본부 소속 ㄷ씨(76)는 “나보다 어린 사람이 눈을 부라리면서 시비를 걸고 서로 멱살을 잡는다”면서 “점잖은 참가자들 중에서는 (폭력)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하고, 몇 번 시비가 붙어 이후로 안 나오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권일용 전 경찰청 범죄행동분석팀장(프로파일러)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확신이 강해지고 확증편향이 높아진다”며 “태극기집회는 정치적 문제를 떠나 너무나 심각한 자기확신과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폭력적인 성향 역시 잠재돼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충돌예방만 내세우며 나서지 않는 경찰의 무대응이다. 경찰은 현재 태극기집회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사태에 대한 어떠한 대응책도 갖고 있지 않다. 경찰이 집계하는 것은 불법폭력시위 발생건수일 뿐 집회 참가자와 일반 시민들 사이에 벌어지는 시비 및 폭력행위가 아니다. 이 때문에 집회 현장에서 피해를 입은 시민들 사이에서는 경찰로부터 적극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지난달 28일 태극기집회 참가자에게 폭행당한 마씨의 상처. / 제보자 제공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싸움 벌어져

지난 3월에는 나들이를 가던 일가족 4명이 수원역 인근에서 태극기집회 참가자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때도 경찰의 적극적 구호조치는 없었다. 이씨와 폭행 가담자들을 떼어놓는 데 그쳤다. 경찰청 관계자는 경찰의 안일한 대처 지적에 대해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을 보호하라는 등의) 지침을 내주거나 봐주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이어 “수원역에서 발생한 사건은 가해자들을 잡아 조치했고, 당시 출동한 경찰들에 대해서도 엄하게 꾸짖었다”며 “다만 경찰 입장에서는 폭행 현장의 쌍방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의 경찰 집회관리는 단속·검거 위주로 운영돼 왔다. 채증을 통해 불법현장을 발굴하고 입건하는 데 치중한 셈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실제 2016년 전체 불법폭력시위 유형 중 ‘도로·철로 점거시위’ 적발건수는 전체 28건 중 21건(75%)에 해당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합법적으로 신고한 집회에 참가했더라도 인도가 아닌 도로 등을 지나갈 경우 채증을 통해 입건하는 사례가 존재해 왔다는 뜻이다. 반면 2017년 1~9월까지 도로·철로 점거로 적발된 건수는 단 2건에 불과했다. 경찰의 집회관리 방식이 단속·검거에서 ‘보호’로 변경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대응이 과격한 폭력이 벌어지는 태극기집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은 충돌의 최소화를 위해 노력할 뿐 어느 한 쪽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보수단체들은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만으로 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이고, 특히나 노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에게 정치적 신념은 거의 맹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며 “지나가는 시민이 사소하게 던진 말이나 행동 하나도 그들에게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폭력적인 행동으로 유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경찰의 미온적 대처 역시 현장진압의 한 방식으로 설명했다. 그는 “이미 예민해져 있는 상황을 강제진압 등 무력으로 제압할 경우 더 큰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때문에 시민들 입장에서는 경찰이 미온적이라거나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에게 우호적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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